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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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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공무원이든, 고시든, 토익이든, 자격증이든, 인적성이든... 뭔가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많은 요즘이다. 수험생활 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있다. 하긴 불안하겠지. 세월은 하릴없이 흘러가는데, 붙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깐. 자신감은 갈수록 줄어들고, 시험에 떨어질까 봐 불안해한다. 아주 열심히 불안해한다. 밥 먹고 식후 땡 하는 시간마저 자책할 정도로 불안해한다. 어떤 교수가 그랬다더라. "유리병이 바위와 모래로 가득 차 있어도, 그 안에는 커피 한 잔을 담을 공간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삶에 여유가 없어도 친구와 커피 한잔 할 여유는 있다는 말이죠." 담배 한 까치도 맘 놓고 피우지 못하는 수험생을 보면, 그 교수는 뭐라 말할까? 담배 연기를 담아두기에 수험생의 유리병은 너무 작은 ..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조금만 도와주면 금방 끝낼 수 있어." 나는 그녀의 부탁이 마냥 좋았다. 덕분에 그녀와 붙어있을 시간이 늘어나니 그저 싱글벙글했다. 말끔한 청바지에 잘 다린 셔츠를 입었다. 빨간 넥타이를 매려다가 '이건 좀 오바다.' 싶어 자제했다. 오늘은 어떤 향수가 좋을까 고민해본다. 아니 고민해 보는 척하고는 하나밖에 없는 향수를 칙칙 뿌렸다.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건 니 생각이고. 마이를 휙 돌려 멋들어지게 걸쳐 입고는 집 밖으로 나섰다. 학교 앞에 도착해 그녀에게 연락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나온단다. 멀뚱히 기다리고 있자니 비어있는 손이 허전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그녀가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를 두 잔 시켰다..
차단의 비통함 일베가 극성이던 시절, 나는 전투 의지가 불타올랐다. 일베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키배도 뜨고, 얼굴 맞대고 설전도 벌였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럴까? SNS에서 메갈을 옹호하는 지인을 봐도 그저 심드렁하다. 아마 그 시절에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열변을 토해봤자 일베 유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이렇게 증거자료가 많이 돌아다녀도 못 알아먹는 사람이 나 따위가 떠드는 소리에 생각을 바꿀 리가 없다. 애당초 개방적이고 말랑말랑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뭐라 하기 전에 사태를 올바르게 볼 것이다. 내가 용쓰며 부르짖어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니, 다른 사람과 설전을 벌이기가 꺼려진다. 전투 의지가 샘솟지 않는다. 싸우면 이길 수는 있나? 논리에..
[단편][기담] 로드킬 그날은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7월 한창이었습니다. 이런 날에는 주간보다는 야간에 일하는 게 훨씬 쏠쏠합니다. 야밤에 더위를 피해 한강 둔치를 찾는 손님이 많거든요. 목동이나 연희동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한강 가는 손님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한강에 가면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은 널렸고요. 네. 저는 택시기사입니다. 이제 막 야간 영업이 피크를 찍는 11시 무렵이었습니다. 느닷없이 휴대전화가 의외의 이름을 얼굴에 띄우고는 "빼애애액" 신경질을 냈습니다. 이경필. 고향에 사는 불알친구입니다. 경필이와 연락 안 한 지 몇 년은 되었습니다. 마지막 연락은 고등학교 은사께서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친구란 경조사 때나 연락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도 경조사라도 불러주는 친구가 있어서..
이유는 없어, 그냥 좋아! 여자친구가 카톡으로 보여줄 게 있다고 야단이다. 뭣이 그리 중허길래 이리 호들갑이냐고 물으니 사진을 한 장 보낸다. 초등학교 2학년 사촌 동생 희소가 쓴 그림일기였다. 그림은 괴발개발, 글씨도 삐뚤빼뚤, 별거 없는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다. 이걸 잘 썼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본인이 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제 점수는요."라며 평가하기도 우스웠다. 신나는 목소리로 전화했는데 못 그렸다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뭐라 대답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여자친구는 "봤어? 봤어?" 하며 나를 재촉했다. 이제는 잘 굴러가지도 않는 짱구를 쥐어짜고 나서야, 나는 중립적이면서도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근데 왜?" 그러자 여자..
어느 30대 취준생의 하루 오늘도 하루를 잃었다. 시간은 굼벵이처럼 다가와찰나의 입맞춤을 남기고는영원한 상실을 새겼다 세월이 하세월이라고동동발 구르던 시절이엊그제인데 나는 어젯밤잃어버린 일 분 일 초가 아쉬워쇠주잔에 눈물을 따라 마셨다 천둥벌거숭이는찬란한 20대를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고개 숙인 아재는그제야 땅에 새겨진발자국을 돌아본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길래소중한 걸음걸음을저리도 무심히 버리고 왔을까 돌아보고 후회하고는돌아서면 잊어버리는나의 죄명은 게으름 나는 죄가 부끄러워세상 밖으로, 글월 속으로외면하고, 도망쳤다 이렇게 부끄러운 시 한 편을 남기며오늘도 하루를 잃는다. ※ 언젠가는 꿈과 현실이 마주하는 장소를 찾을 수 있기를... 그 날까지 쓰러지지 않는 끈기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단편] 쓰레빠 맨발의 소녀가 내복만 입고 골목을 서성였다. 냉기를 머금은 보도블록 위에서 소녀는 새앙쥐마냥 손발을 부비며 오들오들 떨었다. 어느 담벼락 아래, 반지하에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렸다. 소녀는 그 온기에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한참을 연통만 바라보느라 소녀는 누가 접근하는지도 몰랐다. 넝마 같은 그림자가 소녀를 덮쳤다. 소녀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잔뜩 겁이 올라 목을 움츠렸다. 가뜩이나 가녀린 어깨가 더 좁아 보인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이 소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소녀는 고양이를 마주한 새앙쥐 처럼 바짝 얼어버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울음보가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맨발로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사내의 목소리..
싸구려 브로치 국민학생 시절 용돈을 모은 적이 있다. 정기적인 용돈은 없었다. 책이나 학용품을 사고 남은 돈을 꽤 오랫동안 모았다. 그 돈으로 엄마의 생일선물을 사려 했다. 여자는 작고 반짝이는 선물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목표는 액세서리로 정했다. 반지나 목걸이는 너무 비쌌다. 꿩대신닭이라는 기분으로 나는 브로치를 사기로 했다. 이마저도 어린이에게는 비싼 물건이었다. 그러니 긴 시간 모아온 돈으로 브로치를 샀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선물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행여나 깡패라도 마주칠까, 나는 주머니에 넣은 상자를 꼭 쥐었다. 엄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발걸음도 빨라졌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흥분 속에서, 쿵쿵 쾅쾅, 심장이 요동쳤다. 엄마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