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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쓰레빠


  맨발의 소녀가 내복만 입고 골목을 서성였다. 냉기를 머금은 보도블록 위에서 소녀는 새앙쥐마냥 손발을 부비며 오들오들 떨었다. 어느 담벼락 아래, 반지하에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렸다. 소녀는 그 온기에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한참을 연통만 바라보느라 소녀는 누가 접근하는지도 몰랐다. 넝마 같은 그림자가 소녀를 덮쳤다. 소녀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잔뜩 겁이 올라 목을 움츠렸다. 가뜩이나 가녀린 어깨가 더 좁아 보인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이 소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소녀는 고양이를 마주한 새앙쥐 처럼 바짝 얼어버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울음보가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맨발로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사내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터질듯한 울음보가 가까스로 멈췄다.
  "추운데 내복만 입고 나왔네. 아무리 놀고 싶어도 밖에 나올 땐 옷도 입고, 신발도 신고 나와야 해요."
  소녀의 어깨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여기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아저씨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집이 어딘 줄 아니?"
  "네."
  "그럼 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는 신고 있던 쓰레빠를 벗어 소녀 앞에 두었다. 소녀가 아직 촉촉한 눈망울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신고 가자."
  소녀가 작은 발을 쓰레빠에 밀어 넣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걸을 때마다 턱턱 소리를 냈다. 모퉁이를 하나 돌자마자 소녀가 한 연립주택을 가리켰다.
  "저기가 집이야?"
  소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집에 들어가자."
  아저씨가 계단으로 소녀를 올려보냈다. 소녀는 고작 일곱 계단을 오르며 열 번은 넘게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소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아저씨는 발길을 돌렸다. 맨발의 아저씨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뿌듯한 걸음걸이로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차가운 보도블록 위로 온기가 발자국처럼 새겨졌다.

  겨울바람은 매섭다. 허름한 연립주택의 창틀은 겨울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시퍼런 외풍이 창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이따금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덜컹덜컹 고함을 질렀다.
  "야! 너 어디 있었어? 또 자고 있었어?"
  소녀의 아비가 소리 질렀다. 소녀가 밖에 나간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아빠가 물 떠오라고 했는데 못 들었어? 너 죽을래?"
  아비의 고함에 소녀는 겨울 가지처럼 떨었다. 무서워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이 년이 왜 대답을 안 해. 너도 내가 우습냐? 어? 우습냐고!"
  아비는 쓰레빠를 집어 들었다. 소녀의 가냘픈 몸 위로 눈보라 같은 매질이 쏟아졌다.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쓰레빠가 소녀의 왼뺨을 후려갈겼다. 소녀는 버티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비는 그제야 매질을 멈췄다. 현관에 쓰레빠를 집어 던지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야 물 떠와."
  "네."
  소녀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컵을 가져왔다. 맞은 곳이 아파 팔을 뻗지도 못했다. 
  "거기 두고 꺼져."
  아비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혈맹원과 채팅하느라 바빴다. 사냥감이 나오면 가끔 마우스도 움직였다. 하지만 소녀가 떠다 준 물은 입도 대지 않았다. 소녀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외풍이 서늘한 손길로 소녀의 맞은 자리를 쑤셔댔다. 한기가 시려운 소녀는 콩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일주일 째 소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허기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꼬르륵 소리가 자명종처럼 울렸다. 소녀는 쓰린 속을 달래고자 싱크대로 갔다. 키가 작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았다. 식탁 의자를 가져오려다 힘이 없어 그만두었다. 의자를 질질 끌었다가는 아비한테 혼날지도 모른다. 까치발을 들어 겨우 수도를 틀고 물 한 컵을 채웠다. 소녀는 그 물을 밥이라도 되는 양 꼭꼭 씹어 마셨다. 그런다고 배가 부를 리는 없었다. 꼬르륵 소리만 멎을 뿐이었다.

  소녀가 다 마신 컵을 싱크대에 넣었다. 싱크대에는 먹고 남은 컵라면이 있었다. 아비가 먹고 대충 던져 놓은 듯하다. 빨간 국물 위로 담뱃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소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잠깐 고민하다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눈을 딱 감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금은 살 것 같았다. 한 모금 더 마시려는 찰나.
  "야. 넌 왜 쓰레기를 먹어."
  아비가 소리쳤다.
  "너 미쳤어? 왜 아무거나 주워 먹고 지랄이야."
  아비는 소녀의 손에서 컵라면을 낚아채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국물은 흘러내려 가고 약간의 건더기와 담배꽁초 하나가 싱크대에 남았다.
  "너 진짜 누구 엿맥일려고 작정했어? 이거 먹고 탈 나면? 병원비는 뭐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아비가 소녀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그대로 소녀를 질질 끌고 가 방구석에 집어 던졌다. 소녀의 몸집만 한 아비의 발이 소녀를 무참히 짓밟았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소녀는 짓밟히며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연신 빌었다. 때리다 지친 아비가 매질을 멈췄다. 아비는 숨을 헐떡이며 싱크대로 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소녀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렁그렁한 눈을 훔쳐댈 뿐이었다. 울었다가는 또 맞을 테니...
  "옘병 여편네가 집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뭐 먹을 것도 하나 없고."
  아비는 냉장고를 열었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을 닫았다. 소녀는 방구석 그늘 속에 몸을 숨겼다. 아비가 더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면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소녀가 눈을 떴다. 아비는 밤새 게임을 하다가 방금 곯아떨어졌다. 소녀는 어제 먹었던 컵라면이 생각나 싱크대를 둘러보았다. 텅 빈 스티로폼 용기와 담배꽁초 하나가 놓여있었다. 소녀는 그대로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 것만 같았다. 안 된다. 이러다 정말 영원히 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녀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소녀는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비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현관으로 걸어갔다. 아저씨가 준 쓰레빠를 조용히 신었다.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아뿔싸, 도어락을 열 수가 없다. 삐리리 전자음에 아비가 깰지도 모른다. 

  소녀는 쓰레빠를 집어 들고 집안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넘기로 한 것이다. 커다란 세탁실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창문을 밀자 '드르륵'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한껏 커진 동공으로 아비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비는 계속 자는 듯하다. 이번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십수 분이 흘러 마침내, 소녀는 자신이 통과할 작은 틈을 만들 수 있었다. 소녀는 창문으로 쓰레빠를 던졌다. 허공을 자유롭게 날던 쓰레빠가 어딘가에 툭 떨어졌다. 이제는 소녀가 나갈 차례다. 소녀는 창틀에 올라섰다. 발밑이 아찔했다. 쓰레빠처럼 훨훨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옆 벽에 가스관이 보였다. 소녀는 가스관에 매달렸다. 떨어질까 두려워 온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맞은 자리가 저려왔다. 그렇게 두려움과 고통을 견디며 소녀는 가스관을 타고 내려왔다. 무사히 바닥에 발을 딛고 나서야 소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돌 바닥에 발이 시려웠다. 소녀는 쓰레빠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맨발로 골목을 나섰다.

  골목을 벗어나자 슈퍼가 보였다. 소녀는 무작정 슈퍼로 들어섰다. 눈에 보이는 빵을 집어 허락도 없이 뜯어 먹었다. 소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슈퍼 아줌마가 다가왔다. 소녀는 허겁지겁 먹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아줌마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자 그제서야 뒤돌아봤다. 아줌마한테 혼나는 건 두렵지 않았다. 먹고 있는 빵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소녀는 햄스터처럼 손에 든 빵을 황급히 입안에 구겨 넣었다. 아줌마가 소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얘야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
  아줌마의 친근한 목소리가 소녀를 다독였다. 소녀는 입이 가득 차 대답도 못 하고 우물거렸다.
  "우유랑 같이 먹자. 진짜 체하겠네."
  아줌마는 냉장고에서 흰 우유를 꺼내려다, 노란 바나나 우유를 꺼냈다. 카운터에서 빨대를 가져와 바나나 우유에 콕하고 찔러넣었다. 소녀는 아줌마가 건네준 바나나 우유를 쭉쭉 마셨다.
  "아이고 뉘 집 부모가 애를 맨발로 밖에 내보낸 겨."
  소녀의 몰골을 보고는 아줌마가 탄식했다.
  "아가, 발 시렵지?"
  "네."
  "신발은 어쨌어?"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잃어버린 아저씨의 쓰레빠가 떠올랐다.
  "아가, 이거 신어라."
  아줌마는 신고 있던 쓰레빠를 벗어서 소녀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소녀가 작은 발을 쓰레빠에 밀어 넣었다.
  "고맙습니다."
  소녀가 꾸벅 인사했다. 슈퍼 아줌마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11살 딸을 2년 동안 집에 감금한 채 때리고 굶기며 학대해온 30대 남성이 검찰에 송치됐다. 소녀는 인천의 아동보호기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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