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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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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쇼 호스트인가? 모든 직업에는 윤리라는 게 있다. 평론가로서 내 직업윤리는 영화를 판매하는 데 일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요 채널들 사이에 촘촘히 끼어 있는 홈쇼핑 채널에서 나오는 쇼핑 호스트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B tv는 영화를 파는 IPTV이다. 이 채널을 틀 때마다 나오는 저 빨간 안경 아저씨는 나와 같은 직업으로 분류된다. 그를 볼 때마다 토악질이 나와 잽싸게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는 B tv가 파는 영화에 서울대학교와 조선일보 출신답게 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있어 보이는 어휘의 잔치들로 장식을 달아준다. 그처럼 못 나가지만 씨네 21의 주성철 편집장도 가끔 여기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다. 영화주간지 편집장이 영화를 파는 채널에 몸을 팔고 있는 걸 보노라면, 측은하다. 늬네 ..
날개를 달았습니다 가수 이적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지금은 노래 본좌로 불리지만, 데뷔 초만 해도 이적은 노래 못하는 가수로 평가받았습니다. 특히나 함께 카니발을 결성했던 김동률과 많이 비교당했죠. 고등학교 시절 '이적이 낫냐, 김동률이 낫냐' 하는 논쟁은 급우는 물론 선생님도 관심을 두던 얘깃거리였습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았죠. "이적은 가사, 노래는 김동률." 당시 김동률은 이미 대체 불가능한 보컬로 평가받았습니다. 김동률의 노래를 김동률보다 잘 부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죠. (동일한 평가를 받는 가수로는 전인권, 박정현 등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적은 호소력 높은 고음을 갖고있었지만, 김동률처럼 매력적인 저음도 없었고, 음량이 풍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단단한 중저음에 익숙한 팬이라면 그가 이런 ..
호구론 호구. 범의 아가리. 바둑돌 석 점에 둘러싸여 한쪽만 비어있는 모양. 여기서 유래된 또 다른 의미. 어수룩해서 이용하기 좋은 사람. 사기꾼과 타짜에게 털어 먹히기 위해 죽을 곳에 제 발로 뛰어드는 사람. 범의 아가리에 갇힌 자. 호구. 털어 먹힌 것도 억울한데, 왜 사람들은 굳이 호구라고 부르며 아픈 곳을 후벼 파는 걸까? 왜냐면 멍청해 보이니깐. 들어가면 죽을 수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하지만 죽을 곳인 줄 알았으면 제 발로 들어갔을까? 전문 사기꾼의 설계는 매우 치밀해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속임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니, 도리어 똑똑할수록 파악하기가 힘들다. 스스로 어리숙하다고 생각해서 욕심부리지 않고, 뭐든지 열심히 찾아보려는 사람은 사기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똑똑하..
[기담] 야구공과 할아범 남자아이는 시절에 따라 즐기는 스포츠가 달라진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를 즐겨했고, 중학교 때는 축구만 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스포츠는 야구였다. 이런 변화가 벌어진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의 몸집과 연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야구를 하곤 했던 공터를 어제 잠시 방문했는데, 이렇게 좁은 데서 어떻게 1, 2, 3루를 나누고 배트를 휘둘렀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야구를 했지만, 딱 반년 정도 야구를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팔목이 욱신거리곤 한다. 어른들은 우리가 공터에서 야구 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홈런이라도 날렸다가는 야구공이 주변 담장을 넘어가거나 주차된 자동차를 뚜드려패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크게 뭐라 하..
[단편] 초식남 월드 면접 스터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박을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탁소 주인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니 별로. 아직 취업 못 했냐? 그게 그렇게 됐다. 나도 뭐 그냥 빌붙어 산다. 서른을 넘긴 늙은 소년들은 남자가 되지 못한 현실을 한탄했다. 그래도 이리 허심탄회하게 처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둘 다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리라. 2차 면접을 앞두고 면접 스터디 중이라고 말하자 박이 눈썹을 치켜뜨며 반색했다. "야. 이 엉아가 기가 막힌 멘트 하나 알려주랴?" 취업/공시 카페에서 다년간 활동한 경험 덕분인지 박은 ..
[서평] 나는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젠가는 바둑에서도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거야. 체스도 이겼잖아?" "야. 바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에이, 바둑도 경우의 수라는 게 있는데. 그걸 전부 계산해버리면 그만이지." "바둑은 경우의 수가 361 팩토리얼이라고. 네가 1초에 1씩 세도 죽을 때까지 다 세지도 못해." "뭐 361 팩토리얼은 무한대인가? 까짓거 계산해버리면 그만이지. 언젠가는 컴퓨터가 이길 거야." "아니야!" "맞아!" 그리고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상대로 승리했다. 바둑에서도 컴퓨터가 인간을 능가한 것이다. 바둑은 절대 컴퓨터에게 정복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친구는 바둑 캐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신의 한 수로 1승을 거두던 날 눈물을 흘렸다고..
[단편] 내 안의 너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시작을 따지자면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집 대문에 새로 오픈한 피자집 전단이 붙어있었다. 오픈 기념. 피자를 시키면 치킨이 공짜. 나는 뭐에 홀렸었나 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네. 만 팔천 원입니다. 아뿔싸. 돈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비자금에서 한 장. 내 비상금에서 한 장. 그렇게 혼자서 피자 한 판과 치킨 한 마리를 꿀꺽했다.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초등 6년 개근상에 빛나던 내가 생애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아픔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분이 멀다고 설사가 나오느라 문밖으로 다섯 걸음도 나설 수 없었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변기 위로 달려가 뿌지지지쪼로로록퍝촵 기묘한 관악기를 연주해야 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고 계속..
자신을 변호하지 말지어다 황희 정승이 잠시 집에 머물 때의 일이다. 세종 : 황희를 들라 하라. 황희 : 아... 안돼... 하녀 둘이 시끄럽게 싸우다 황희에게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한 하녀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가 대답했다. "그래 들어보니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이야기했다. 황희는 이번에도 똑같이 대답했다. "그래. 네 말도 옳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한 소리 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둘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한 사람은 틀렸다고 하셔야죠." 그러자 황희가 대답했다. "부인 말도 옳소."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다. 식자들이 말하길 대립하는 것을 하나로 포용하는 관용의 정신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실상은 줏대 없고 안일한 이야기에 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