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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스틸 앨리스> -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 이 글은 영화 <스틸 앨리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훌륭한 어머니이고, 밖으로는 권위 있는 언어학 교수였던 앨리스(줄리안 무어). 그러나 완벽하고 행복했던 그녀의 삶에 예기치 못한 슬픔이 드리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했던 여인에게 희귀성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것이다. 이 영화는 자신을 잃어가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맞서는 한 여인의 투쟁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 알츠하이머

  병은 무섭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질병은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공포로 남아있다. 질병이 두려운 이유가 그 이후에 맞닥뜨려야만 하는 죽음 때문일까? 아니다. 죽음보다 질병이 더 두렵다. 내가 지금 암에 걸렸다고 상상해보자니 정말 암담하다. 아마도 부모님은 병원비를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길을 걸어가셔야 할 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한다. 병은 불행을 불러오는 악마다. 그래서 병마(病魔)라 한다.

  인생을 앗아가는 질병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우리 엄마는 가끔 나에게 끔찍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나라도 조만간 안락사가 합법화되지 않을까?" "나는 치매에 걸려도 요양원에 가지 않을 거야. 약 먹고 죽거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사라질 거야." 엄마에게 알츠하이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공포의 대상이다.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도 말한다. "차라리 암이면 좋겠어. 그러면 부끄럽지는 않잖아." 나는 이 대사에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알츠하이머는 인간성 자체를 앗아가는 죽음보다 두려운 병이기 때문이다.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가는지 오열의 신파가 아닌 관조적 시선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녀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의 반응은 퀴블러-로스의 사망단계1)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앨리스는 이 단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시련의 단계를 맞이해야 한다. 바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에 대한 이야기다.

▲ 남편(알렉 볼드윈)의 반응은 퀴블러-로스*의 5단계와 유사하다.


* 퀴블러-로스의 사망 5단계 :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





  전형성과 의외성

  <스틸 앨리스>의 배경은 전형적이다. 번듯한 직장, 헌신적인 남편,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 심지어 막내딸(리디아,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반항적인 모습까지. 앨리스의 인생은 작위적이라 할 정도로 평범하다. 이러한 평범함은 알츠하이머가 한 여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영화는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처럼 환자와 보호자 사이의 특별한 사랑을 다뤘다면 병마에 잠식당하는 앨리스의 모습이 더욱 측은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스틸 앨리스>는 이러한 측은함을 경계한다. 알츠하이머 환자에 대한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에 <스틸 앨리스>는 의외의 시점을 제공한다.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시점이다. 영화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겪는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늘 다니던 조깅 코스에서 길을 잃거나, 자주 만들던 요리법을 잊는 등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머릿속이 빠져나가는 듯한 앨리스의 심정을 그려낸다. 이러한 시점은 앨리스가 바지에 오줌을 싸버리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바지에 오줌을 싸는 것은 관련 영화라면 흔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바지에 오줌을 쌀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는 환자의 심정을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한 영화는 <스틸 앨리스>뿐이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는 앨리스의 심정은 단순한 절망 그 이상의 것을 전해준다. 

  그것은 바로 품위의 상실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약속을 잊는 정도라면 "그럴 수도 있지. 난 알츠하이머 환자잖아."라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을 "바지에 오줌 쌀 수도 있지."라고 넘길 수는 없다. 그것은 앨리스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앨리스 중심의 시점은 이처럼 죽음보다 무서운 알츠하이머의 공포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장치가 된다.

  품위가 상실되는 공포의 클라이막스는 앨리스의 자살 실패다. 발병 초기, 앨리스는 내가 더는 나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자살 안내 동영상을 촬영한다. '나비'라는 폴더의 이름은 아직 나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아직 품위를 지킬 수 있을 때, 고통을 잊고 나비처럼 귀천(歸天)하고자 했던 앨리스의 바람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병이 깊어진 앨리스는 그 동영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동영상의 지시도 따르지 못하고 결국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슬퍼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환자가 겪는 품위의 상실과 그로 인한 수치심. 그리고 이를 넘어 나로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복잡한 심경을 스크린에 구현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스틸 앨리스>가 갖는 독특한 시점의 결과이자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이유이다.

▲ 영화 내내 환자의 심경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다

  점점 심해지는 병은 그녀에게 품위도 수치심도 앗아갈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굴복하지 않는다. 인상 깊었던 앨리스의 연설장면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이상한 행동과 더듬거리는 말은 우리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요. 우리는 어리석고, 무능하고, 우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일 뿐이지요. (중략) 저는 살아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죠.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기억 못 하는 저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인생에 행복한 날들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고통받고 있다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의 부분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옛날의 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현재에 충실히 살자'라고 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또한, 내가 잃는 방법에 대해 통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앨리스를 동정하지 않는다. 병세가 심해지는 그녀의 모습을 불쌍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모습을 투쟁이라 말한다. 상실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 말한다.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라 말한다. 그 모습이 어리석고, 무능하고, 우스울지라도, 그것은 투쟁이기에 숭고하다. 그 투쟁 안에서 앨리스는 여전히 품위있는 앨리스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앨리스에게 막내딸이 책을 읽어준다. 나조차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내용에 대해 딸이 묻는다. "그게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그러자 앨리스는 한참을 숨 고른 뒤 나직하게 내뱉는다. "사랑".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를 강제하고 있다. 이는 영화 전체에서 유지하던 관조적인 기조를 거스른다. 더구나 사랑이라는 대사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감독의 바람일 뿐, 현실의 대사는 이처럼 달콤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이 장면은 오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오류에 마음이 움직인다. 대부분의 말들이 지워졌음에도 마지막까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고결한 모습에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는 앨리스의 품위를 위해 영화의 품위를 포기한 연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도 감사한다. 그리고 몹시도 울었다. 왜 이렇게 하염없이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 눈물이 앨리스의 상실에 대한 동정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앨리스가 마지막까지도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대다수의 건강한 사람을 위한 영화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스틸 앨리스>는 병마와 투쟁하는 세상의 모든 환자에게 "당신은 여전히 당신입니다."라고 위로하는 영화가 아닐까?

▲ 당신은 여전히 당신입니다.






※ <스틸 앨리스>는 루게릭병을 앓았던 故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유작입니다. 이 영화는 그가 투쟁한 결과인 셈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