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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무뢰한> - 질척한 하드보일드 멜로

※ 이 글은 영화 <무뢰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더러운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살인범 박준길(박성웅)을 쫓고 있다. 그는 잠적한 박준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유일한 실마리인 박준길의 애인 김혜경(전도연)에게 접근한다. 정재곤은 이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속이고 김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 마카오의 영업부장으로 잠입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저 화류계의 끝물이라고 생각했던 김혜경의 외로움과 순수함을 알게 되고, 정재곤은 그런 그녀에게 마음이 흔들리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아직 해는 뜨지 않은, 어슴푸레 하늘이 밝아오는 새벽녘. 밤새 퍼마신 술에 절은 몸을 이끌고 해장을 할 겸 순댓국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주방과 홀을 겸하는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순댓국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니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앉아있었다. 이런 시간과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여기, 참이슬 한 병 더 주세여~"

  그녀가 살짝 취기가 도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주방에 들어간 아주머니는 주문을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 이내 포기하고 김빠진 사이다처럼 의자에 늘어졌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인에게 들이대기 위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 시간이면 밖에 진짜 이슬이 많이 맺혀 있을 텐데요."

  내 말에 고개를 든 그녀는 어디서 되도 않는 개수작을 떨고 있냐는 듯이 얼굴 전체에 짜증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서면 안 된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녀를 마주 본 자리에 엉덩이를 깔았다.

  "혼자 술 마시면 체해요. 같이 마시죠. 내가 재미난 안주거리를 참 많이 가지고 있거든."

  그녀는 귀찮음 반, 호기심 반인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나의 합석을 침묵으로 허락했다. 마주 본 그녀의 얼굴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관리를 받는 것인지 꽤 좋은 피부를 가졌지만, 화장은 왠지 싼 티가 났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서른이 넘어 보였다. 발랄하면서도 농염한 색기를 풍기는 그런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던 그녀는 대뜸 내 쪽으로 몸을 확 기울였다.

  "아저씨! 오늘은 아저씨 꺼 말고 내 안주가 더 맛있을 것 같은데, 내 얘기 좀 들어줄래요?"

  "밤새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네~ 누굴 만났거든요."

  "남자였나 보죠?"

  그녀는 내 질문을 무시한 채 대화를 계속했다.

  "그의 이름은 <무뢰한>이었어요."





  스타일에 어울리는 이야기, 이야기에 어울리는 스타일

  그녀는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요. 근데 옛날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뭐랄까... 분위기가 조금 낡았다고나 할까? 낡은 아파트나 후미진 골목, 싸구려 룸싸롱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촌스럽기도 하고... 그냥 그 사람 분위기가 좀 어둡고 칙칙했어요."

  그녀는 빈 잔을 가리키며, 잔을 채우라는 듯 눈짓을 했다. 나는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분위기에 어울리는 칙칙한 이야기였죠. 자기가 형사(김남길)였는데 잡으려는 살인범(박성웅)의 애인(전도연)하고 눈이 맞아버렸다나?"

  "꽤 재밌어 보이는데요?"

  "재밌긴요. 이런 이야기는 이제 인터넷에도 못 올려요. 쌍팔년도도 아니고 요즘에 그런 형사가 어딨어요?"

  하긴... 요즘 사람들에게 들이대기에는 한물간 이야기라는 기분이 든다.

  "근데 그 범인 애인이 참 불쌍하더라고요. 한창때는 텐프로에서 잘 나가는 여자였데요. 잘 나가는 조폭 두목한테 스폰도 받았다고 하고요. 그런데 부하 하고 눈이 맞아 버린 거죠. 그 때문에 그 부하는 살인범이 되었고요. 그렇게 스폰도 떨어져 나가고, 모아둔 돈은 주식으로 다 날려 먹고, 나이도 많고... 결국, 퇴물이 돼서 서울 외곽의 싸구려 룸싸롱 마담이 된 거죠. 빚만 잔뜩 진 채로요."

  "<무뢰한>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네요. 낡고 촌스럽다는 건 참 씁쓸하군요."

  "그렇죠. <무뢰한>의 독특한 분위기는 김혜경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더군요."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이야기 속 그녀의 이름을 자연스레 읊었다.

  "그래서 그 둘은 어쩌다 사랑에 빠졌답니까?"

  "형사도 처음에는 살인범을 잡으려는 생각뿐이었데요. 가게 관리하는 놈을 협박해서 가게에 영업부장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말만 영업부장이지 솔직히 그냥 어깨죠 뭐. 그래서 김혜경 따라다니면서 외상 값 받고 그랬다나 봐요. 그러다가 여자의 의외의 모습을 보았죠. 범죄자 애인이라 그저 그런 여자겠거니 싶었는데, 의외로 강단 있어 보였나 봐요."

  "잃을 게 없는 사람, 오늘만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무섭죠."

  "범인을 잡으려고 형사가 돈이 많은 척 떡밥을 뿌렸데요. 도망자는 돈이 필요하니, 언젠가 여자한테 돈을 꾸러 올 거고, 그때 뿌려놓은 떡밥으로 월척을 낚을 속셈이었죠. 여자는 그것도 모르고 그 남자를 유혹해서 돈을 뜯어내려 했고요."

  "질척한 이야기군요."

  "네. 한물간 술집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나마 아직 반반하니 몸으로 꼬셔야죠. 그치만 살을 섞던 그 순간은 행복했어요. 이 남자라면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형사 주려고 잡채를 버무리는 손길이 조금은 흥겨워 보였데요."

  이야기에 너무 몰입했는지, 그녀는 마치 자기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듯 말하였다. 얼굴에 스치는 씁쓸한 미소가 눈에 밟혔다.

  "마무리가 별로 좋지 못할 것 같네요."

  "퇴물이 된 술집 여자이자 살인범의 애인. 그 여자는 이게 인생의 밑바닥인 줄 알았겠죠. 그런데 그 밑에 더 깊은 바닥이 있었어요. 형사에게 받은 미끼를 애인에게 전달하는 순간 경찰이 덮쳤고, 애인은 자신과 살을 섞었던 그 형사의 총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절망 뒤에 더 큰 절망이 있었군요. 배신의 상처가 오래갔겠네요."

  "그거 알아요? 그냥 계속 시궁창이었으면 별로 상처받지 않았을 거에요. 잠시였지만 희망을 품었으니 더욱 절망스러웠겠죠."

  "그래서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나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허허 웃으면서 나중에 다시 만났다가 칼빵 먹었다며 배에 있는 상처를 보여줬어요."

  그제서야 여인의 목에서 남자의 스킨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차를 놓친 기분이었다.

  "아저씨. <무뢰한>이야기 어때요?"

  "지독한 하드보일드 멜로군요. 뭐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기도 한데, 분위기와 이야기가 참 잘 어울리네요. 연륜이 꽤 있나 봐요? 이렇게 분위기와 이야기가 절묘하게 호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죠."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새초롬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걸까?

  "여자 나이를 그렇게 함부로 넘겨짚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 매너 좋은 줄 알았는데, 센스는 영 꽝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빈 잔을 들이밀었다.

  "내공이 높다고 합시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 <무뢰한>의 독특한 스타일은 김혜경의 삶을 상징한다.






  어울리는 김남길. 그리고 전도연, 전도연, 전도연.

  "그 형사,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얘기 좀 더 해봐요."

  그녀는 다 식어버린 국밥을 한술 뜨더니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눈을 치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떠올리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눈빛이 굉장히 날카로웠어요. 비정한 사람이라는 기분이었는데, 의외로 성격은 서글서글하고 재밌더라고요. 그런 성격 때문인지 이렇게 지독하기만 한 일은 처음 겪은 것 같았어요."

  "그래도 마스크 덕분에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맞아요. 그 분위기랑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뚱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어서 정말 그 여자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냥 일이었을 뿐인지 본심을 잘 드러내진 않았어요. 그래도... 김혜경과 동침하던 날을 이야기할 때 보여줬던 눈빛은 잊지 못할 거에요. 우수에 찬 남자의 눈빛이 멋있다는 말을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그녀는 또 한 번 추억에 잠겼다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그 미소를 헹구듯이 소주를 털어 넣었다. 나와 얘기하기 전부터 취한 목소리였던 그녀는 연거푸 털어 넣은 술에 취기가 올라오는 듯 했다. 살짝 풀린 눈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 예뻐 보였다. 나는 말 없이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빌려주었다. 내 어깨에 기댄 채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줄곧 듣기만 했던 나는, 그녀를 대신하듯 입을 열었다.

  "그 여자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같이 이야기하면서 느꼈는데 카리스마가 있네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하고, 압도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어떨 때는 드세게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순애보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나 원래 이런 여자 아니에요. 살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 이중적인 모습을 한 몸에 담아낸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한동안 대한민국 원탑 자리는 계속 그녀의 것으로 남아있을 것 같네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는 발끈하며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받아쳤다.

  "이 아저씨가 어디 첨 보는 사람한테 당신 타령이야? 나 그렇게 만만한 여자 아니거든요? 그리고 나 원래 그런 여자 아니었어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길 없는 김남길의 눈빛은 정재곤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듯 했다.






  이런 게 누아르지...

  그녀는 더 마시면 안 되겠다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얘기 잘 들었어요. 밥값은 제가 낼게요."

  "뻔하고 칙칙한 이야기일 뿐인걸요."

  "때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한 법이죠. 전 그 칙칙함이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씁쓸한 여운이 나쁘지 않네요."

  "영락없는 아저씨네요. 후후"

  그녀는 취기가 오른 와중에도 접대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게를 나서기 전 그녀가 뒤돌아 물었다.

  "잠깐 우리 집에서 쉬었다가 갈래요? 택시 타면 금방 가요."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닙니다. 전 이제 하루 시작이라서요."

  "그래요...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잘 가요 아저씨."

  그녀는 내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칙칙한 테이블 옆에 칠이 벗겨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저 의자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리도 못생겨졌을까? 하지만 그 사연이 아무리 기구하고 애절할지라도 그저 그런 이야기는 술안줏거리로 휘발될 뿐이다. 다만 우울하고 씁쓸한 여운만이 기억될 것이다.

  "이런 게 누아르지..."

  나는 문밖을 나서며 입안에 남은 씁쓸함을 몰아내듯 가래를 뱉어냈다. 그리고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초여름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그만 눈이 시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