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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리뷰]<왕의 남자> - 처선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광대짓을 하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은 양반에게 공길을 팔아먹는 꼭두쇠(남사당패의 우두머리)를 살해하고 한양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과 만나 왕을 능멸하는 놀이판을 벌려 돈을 벌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처선(장항선)은 이들을 의금부로 끌고 와 매질한다. 그러나 왕(연산, 정진영)을 웃겨보겠다는 장생의 말에 혹하여 이들의 무대를 왕 앞에 올리게 된다. 공길의 재치로 왕의 맘에 든 장생패는 처선의 조언에 따라 더욱 판을 벌려 궁궐 사람들을 가지고 논다. 그러나 판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더불어 공길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이를 지켜보던 장녹수(강성연)의 질투심도 날로 깊어가기만 한다. 이 피 냄새 나는 놀이판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놀이판에서 놀지 않는 자

  <왕의 남자>의 서사장치는 ‘놀이’이다.…… 금기의 벽에 절망하고 내면의 상처에 고통 받던 네 사람은 놀이를 통해 잠시 위로받았으나, 끝내 현실과 역사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실재계의 어둠 속으로 투신한 것이다. 놀고 싶었던 왕, 연산은 역사를 방기했고, 금지된 연인을 얻고 싶었던 광대, 장생은 역사에 무심했다. 그들은 땅도 하늘도 아닌 반(半) 허공에 머물다 허공으로 탈주해버린 인물들이다. 이들은 세상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지만 주체의 의지로 탈주하는 인물들이며, 역사가 아니라 놀이의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 이현경 비평 ‘반(半) 허공에서 허공으로 탈주하는 호모루덴스’ 中

  우리의 놀이판은 열려있다. 서커스, 연극 심지어 개그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관객은 단순히 관람하는 것을 넘어 놀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 일조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무대에 가담하기도 한다. 연극과 클럽이 혼재된 공간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잣거리를 벗어나 궁으로 들어온 장생패에게 관객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연산과 녹수  뿐이다. 나머지 중신들이나 선왕의 여인들은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현실에 적을 두고 있다. 연산과 녹수, 장생과 공길은 현실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공간인 놀이판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묘한 인물이 존재한다. 그는 현실에도 놀이판에도 속하지 않는다. 놀이판 사람이지만 관객도 배우도 아니다. 놀이판에서 놀지 않는 자. 그가 바로 연출가 처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선의 연출은 실패했다. 관객과 배우가 모두 폭주하며 죽음으로 침전했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책임은 처선에게 있다. 그들이 놀이를 놀이로 놔두지 못하고 폭주하여 현실을 파괴했던 것은 처선이 놀이판과 현실의 경계에서 두 공간을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대는 그저 광대일 뿐이라는 처선의 마지막 대사는 노는 사람들(장생, 공길, 연산, 녹수)이 결백하다는 항변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책감에 그는 자살을 택한다. 

  반(半) 허공에서 허공으로 탈주했던 것은 놀던 사람들의 의지였을까? 분명히 판을 벌려준 것은 처선 이었지만 폭주는 그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 라캉 철학을 들고 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일 것이다. 그들의 폭주가 주체의 의지라면 주인공이라는 직함에 어울릴 정도로 멋있을 것이다. 허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노는 자들을 폭주로 몰아넣은 것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상황, 죽음을 유도하는 상황, 파멸로 이끄는 상황이다. 이렇게 처선이 벌려놓은 놀이판은 이공간의 개념을 넘어 등장인물의 심리를 지배하는 심리학적 공간으로 격상된다. 이와 더불어 처선의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 진다. 그가 바로 연출가가 아니던가. 결국 반(半) 허공에서 줄타기 하며 놀던 자들은 죽음이라는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이를 죽음이란 실재계의 어둠으로 투신했다거나 탈주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심리적 동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지향점에서 죽음에 대한 찬미가 느껴진다는 점은 이 해석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세적인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 놀이판을 바라보는 처선의 시선은 담담하다






  놀이에 대한 애정이 화면을 채웠다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시나리오, 배우들의 열연(특히 이준기)은 천만관객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을 가졌다. 반면에 연출적인 부분에선 스타일 요소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통상적인 촬영 기법을 고수한 탓에 미술적 감각이 느껴지는 컷은 매우 적고 존재해도 그 길이가 짧다. 더불어 컷 전환에 있어 시점이나 동선이 유지되지 못하는 기본적인 실수들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사극들과 달리 의상 색깔이 화려하다는 점이다.(이 특징은 요즘에 와서는 보편화 되었다) 다른 하나는 놀이에 대한 애정이다. 놀이꾼을 모으는 장면을 보면 감독은 우리의 고전 놀이들을 필름에 담아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애정은 놀이판 장면을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었다. 촬영과 편집의 아쉬움이 화려하고 충실한 미장센으로 극복된 셈이다. (그러나 연극과 구별되는 보다 영화적인 특성은 촬영과 편집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쉽기는 하다) 특히 영화의 백미 중 하나인 줄타기 장면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영화 속 놀이판을 정말 그럴싸하게 만들어 준다. 

▲ 줄타기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예술이다






  고전이 될 가치가 있는 명작

  이미 오래 전에 개봉한 작품이며 노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비평은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처선을 중심으로 한 비평은 쉽게 보기 힘들다. 내 주변에서 처선을 주목한 사람은 어머니셨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무게감을 표출하는 처선이란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셨다고 한다. 특히 이를 연기한 장항선 선생님의 끊어질 듯한 발성이 인상적이라고 하셨다. 당시엔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왕의 남자>를 리뷰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머니의 시선이 떠올랐다. 처선을 중심으로 본다면 어떤 작품이 될지 몹시 궁금했다. 그렇게 다시 본 <왕의 남자>는 세월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더구나 처선이라는 인물에 이입되어 지켜본 작품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고전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필자의 경우는 다시 봐도 재밌고, 볼 때 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을 고전으로 꼽는다. <왕의 남자>는 개성 강한 인물들과 그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들로 인해 어떤 인물에게 집중하느냐에 따라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혹자는 개봉당시의 시대상 반영이 미흡하고 비정치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단점은 인정하는 바이나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훌륭하다. 10년, 20년이 지난 후에 <왕의 남자>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은 분명히 재밌을 거라 장담한다. 끝없는 재해석과 재창조가 가능한, 고전의 자격을 갖춘 작품이다.

▲ 오래되고 색이 바래도 운치가 있는 것이 고전일 것이다






  총평

  처선을 중심으로 인물을 지배하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지배하는 놀이판을 살펴보며 놀이판이란 열린 공간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연출에서 실수가 존재하나 화려하고 충실한 미장센으로 이를 극복했다. 세월이 지나 다시 보아도 여전한 재미를 주는 고전이 될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한줄평

  언제라도 놀자고 하면 달려갈 것 같다. ★★★★





※ 천만관객 영화 중 스크린 대비 관객 수에서 <왕의 남자>는 독보적이란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