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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가 미국의 위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퀄리티가 넘사벽인 책을 한 권 만났다. 엄청난 깊이의 내공,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근거 자료, 이를 문화적 역사적 밈(meme)을 활용하여 풀어내는 미친 필력까지...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 듯하다. 이 책은 202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분야에도 후보로 올랐다. 그 책은 바로 <신화의 종말>이다.

 

<신화의 종말>은 오늘날 미국이 마주한 위기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오늘의 문제는 오늘의 잘못으로 생기지 않았다. 저자 그렉 그랜딘은 위기의 진정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미국이 건국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접하던 '서부 개척의 낭만'이 오늘의 미국을 어떻게 궁지에 몰아넣었는지 알려준다. 이를 위해 인용하는 역사적 사료가 너무도 방대하고 구체적이어서 저자의 내공과 집요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혹자는 이쯤에서 '우리가 왜 미국의 역사와 위기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2가지 이유에서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 오늘날 미국은 초초초강대국이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현존하는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초강대국을 넘어서 극초강대국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아마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국방비가 아닐까 싶다. 미국의 국방비는 세계 1위이고, 2위부터 10위까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중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뺀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동맹국이다. 농담처럼 "미군이야말로 지구방위대다."라곤 하는데, 사실상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미국이 휘청일 때 세계가 어떤 충격에 휩싸일 수 있었는지 2008 세계 금융 위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수많은 개인의 삶이 비극에 빠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사실상 오늘날 지구에 사는 모두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대외의존도가 높고 미국과 긴밀한 경제적, 군사적 동맹 관계를 가진 나라는 더욱더 그렇다.

 

둘째, 미국 스스로 자신의 경계를 국경에 한정 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 <신화의 종말>에 등장하는 미국 사람들의 생각은 살짝 두려울 정도였다.

 

미국민들은 자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 결론이 다소 오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이 사실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누군가가 내 삶을 자기 멋대로 휘두를 힘이 있고, 스스로 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에 대해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신화의 종말>에서 말하는 '신화'의 핵심은 바로 변경(Frontier)이다. 저자는 미국이 변경으로의 팽창을 약속하며 많은 문제들을 어물쩍 끌어안은 채 지금까지 전진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국가적인 난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변경에 처박아두었다는(짬 시켰다는) 말이다. 건국 초기에는 서부로의 팽창을 약속하며 아메리카 원주민 문제를 어물쩍 넘어갔고, 멕시코 전쟁을 통해 남북전쟁으로 인한 분열을 봉합한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제를 어물쩍 넘어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정치적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히스패닉 문제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 변경이 닫혔다고 말한다. 더는 미국이 팽창할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미국이 팽창을 약속하며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던 시기가 종말을 맞은 셈이다. 그렇게 변경의 신화가 끝을 맞았기에 이 책의 제목은 <신화의 종말>이 되었다.

 

책에서는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 접근을 통해 신화의 종말을 거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영화가 있어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책을 읽은 분들께는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본 분들께는 영화에 등장하는 비극의 실체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1) 시카리오 : 암살자들의 도시

 

<시카리오>는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진 사상 최악의 카르텔 범죄와 이에 대항하는 CIA, FBI의 고군분투를 다룬 작품이다. 드니 뵐뇌브 감독의 메마른 영상미가 일품인 작품이며, 영화의 결말이 선사하는 충격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핵심 중 하나는 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수사기관의 불법이다. 카르텔이 저지르는 불법이 아니다. 정의를 위해 합법적인 방법으로 악당을 소탕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심을 바탕으로 각종 불법을 저지르며 카르텔을 상대한다.

 

멕시코의 암울한 치안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수사관들의 불법 행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따지고 보면 양심적으로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다), 미국의 변경에 서부 개척 시대보다 더한 무법지대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의 종말>에 따르면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무법 상황은 정치와 경제가 기묘하게 얽힌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정치 세력은 백인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멕시코인들을 비롯한 히스패닉계 미국인을 배척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인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의 표를 얻기 위해, 또 그들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인력을 제공받는 기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민 정책을 추진하기도 한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 속에서 불법 이민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자경단을 꾸려 헌법을 뛰어넘는 권한을 휘두르고 있다. (예를 들어, 불법 이민자 사냥 등) 즉, 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무법지대가 바로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인 셈이다.

 

2) 로스트 인 더스트

 

<로스트 인 더스트>를 보면 왜 트럼프 같은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에는 극심한 경제 양극화로 빈민으로 전락한 백인 농부 형제가 나온다. 그들은 은행에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 강도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한 번에 터는 금액이 많아야 1~2,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돈으로 1~200만 원?) 너무 많은 돈을 강탈하면 수사 기관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짜낸 꼼수였다. 내가 영화에서 봤던 은행 강도 중에 가장 가오 떨어지는 존재가 바로 이 형제들이었다. 과거 서부 영화의 낭만을 생각하면 씁쓸함이 절로 배어 나온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부의 낭만이 끝났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신화의 종말>과도 이어진다. 이제 변경이라는 신화 혹은 낭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빈민층으로 전락한 백인 하층민, 흔히 레드넥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개척 시대의 카우보이처럼 총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그 총구가 은행이라는 경제적 상위 계층을 향한다. 책에서는 그 총구가 히스패닉계 불법 이민자를 향하고 있다.

 

3) 윈드 리버

 

설원에서 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윈드 리버의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와 신입 FBI 요원 제인은 함께 이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다. 하지만 영화가 지목하는 진짜 범인은 사람 한 명이 아니다. 진짜 범인은 바로 '원주민 보호구역'이라는 모순된 공간이다.

 

<윈드 리버>에서 보이는 원주민 보호구역은 사실상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다. 눈밖에 보이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 범죄와 가난에 둘러싸여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미국 시민이지만, 동시에 미국 시민이 아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은 자치구역으로 인정받아 연방법에서 자유롭고 그들만의 법을 유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연방 정부에 투표할 자격이 없고 투표권을 얻으려면 자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즉, 원주민 보호구역은 사실상 '원주민 방치 구역'인 셈이다.

 

<신화의 종말>에서는 이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영토를 보장해 주겠다 약속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 구역으로 밀고 들어갔고, 미국 정부는 변경으로 변경으로 원주민을 쫓아냈다. 그렇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풍요로운 영토를 빼앗기고 척박한 변경에서 세상과 백인을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3편의 영화를 만든 핵심 인물은 테일러 셰리던이다. 그는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을 맡았고, <윈드 리버>는 직접 연출까지 맡았다. 이런 그의 행보를 보고 한 평론가는 그를 가리켜 '경계'를 다루는 감독이라 불렀다. <신화의 종말>을 보고 나자 이 말을 조금 바꾸고 싶어졌다. '변경'을 다루는 감독이라고 말이다.

 

"오늘의 문제는 오늘의 잘못으로 생기지 않았다."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은 신화의 종말이라는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로 인해 세계에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충격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그렇듯, 문제의 시작은 오늘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책 <신화의 종말>을 통해 오늘의 문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3편의 영화를 통해 그 실상이 어떤지 생생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 이보다 더 훌륭한 교양 지식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이 책이 넘사벽 퀄리티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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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