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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그녀에게(2002)> - 사랑의 본질에 관한 도발적 질문

▲포스터의 상반된 색감이 인상적이다






  줄거리


  마르코의 애인이자 투우사인 연인 리디아는 투우 경기중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같은 병원에는 또 다른 코마환자인 알리시아와 그녀를 보살피는 고용 간호사 베니그로가 있습니다. 혼수상태의 리디아를 보며 슬퍼하고 절망하는 마르코. 그와 대조적으로 베니그로는 알리시아를 돌보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베니그로는 혼수상태인 알리시아에게 강간이라는 돌이키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그의 사랑은 파국을 맞게 됩니다. 마르코와 베니그로, 두 사람의 상반된 모습의 사랑을 통해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관객에게 다소 도발적으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과감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친절한 연출


  이 영화는 파격적 소재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혼수상태라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분법적 통념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런 대상과 사랑을 한다는 파격적인 소재는 듣는 것만으로도 어렵고 지루할 거라는 우려를 불러일으키죠. 이 소재에서 나오는 주제는 더 무겁습니다. 사랑, 나아가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죠. 거기에 다른 특징인 상징성 강한 영상까지 더해집니다. 이런 레시피라면 전형적인 예술영화가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관객과 친화되려고 노력한 감독의 친절한 연출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본격적 주제를 드러내기 이전에 감독은 두 연인의 멜로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우연적 요소라는 다소 어설픈 부분도 있지만, 마르코 커플의 사랑의 시작부터 훑어주는 이야기 전개는 관객에게 후에 등장할 극단적 상황에 대해 보다 몰입하게 해줍니다. 교차편집을 통해 마르코와 리디아의 관계에서 작은 반전을 꾀한 점도 흥미를 더해주는 부분이구요. 베니그로의 경우에도 혼수상태의 알리시아와 보내는 시간들을 매우 사랑스럽게 표현해줍니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그의 행동을 사랑이라 설득하려면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가 될겁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움이라는 감성적 표현을 통해 난해한 문제를 쉽게 넘어갑니다. 설득력 있다는 점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지루하지 않게 화두를 건낸다는 점에서 정말 노련한 전개방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 또한 관객 친화적입니다.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아주 직선적인 돌직구를 날리기 때문이죠. 더불어 시각적 충격을 더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 베니그로와 여자 간호사가 알리시아의 몸을 닦아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혼수상태 환자의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죠. 이를 통해 후에 일어날 파격적 사건을 위한 분위기 형성과 더불어 시각적 충격을 통해 몰입도를 고조시킵니다. 또한 헌신과 에로스라는 양립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후에 허벅지를 마사지하는 베니그로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같은 질문을 보다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다시 던지기도 합니다.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관객의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고, 보다 주제에 집중하도록 하는 배려가 느껴집니다.


  질문의 본질이 왜곡되지 않기 위한 배려는 베니그로의 강간장면에서도 등장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에는 강간장면이 없습니다. 감독은 베니그로의 강간을 영화 속 영화인 <애인이 줄었어요(El Amante Menguante)>를 통해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애인이 개발한 다이어트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몸이 작아져가는 남자가 최종적으로 여성의 질속으로 들어가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하게 된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작품입니다. 혼수상태 환자를 강간한다는 파격적 사건을 또 다시 파격적인 영화로 암시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베니그로의 강간을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만 강간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암시적으로 나타냈기에 베니그로에 대한 혐오감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논쟁을 피하고자 하는 배려인 셈이죠. (http://www.youtube.com/watch?v=JSGDvlxVk4E)


  이처럼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상징적인 요소들을 많이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마무리를 장식한 무용 장면은 영화 속 알리시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타인에 의해 동선을 확보하는 시작의 무용이나, 다른 무용수들에 의해 움직임이 강제 당하고 그 와중에 호흡만을 표현하는 마무리의 무용은 혼수상태였던 알리시아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 부분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 상징의 표현 방법이 무용이라는 점입니다. 무용은 흔히 몸의 언어라고 불리웁니다. 후에 기술하게 될, 육체라는 관념에 대한 감독의 시각을 또 다른 예술 장르로 표현한 것이죠. 무용 뿐만 아니라 수영하는 남자의 등 근육이나 투우장 소들의 모습 등 분위기를 환기하는 장면에서 육체를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육체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감독의 의중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앞에도 언급한 <애인이 줄었어요>를 통해 사랑과 육체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점도 인상적인 부분이죠.


  상징적인 장면들이 많지만 이 점이 대중성을 떨어뜨리진 않았습니다. 노래나 무용, 무성영화 등의 상징적 요소들이 단순히 상징으로만 작용하기 보다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굉장히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입니다.  또한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상징이 목적이 되지 않고 철저히 수단으로만 작동하며 이야기 전개에 무리를 두지 않습니다. 감독이 얼마나 영화의 주제에 집중하길 원하는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에 집중해 달라는 이러한 연출은 현학적인 무게감을 탈피하고 질문의 본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상반된 캐릭터들의 상반된 연기


  감독의 연출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주제가 추구하는 바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백미로는 대비되는 두 주연 배우의 연기를 꼽고 싶습니다. 베니그로는 비정상적으로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허나 베니그로역의 하비에 카마라는 오히려 철저히 절제된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가 알리시아를 마사지 해주는 장면에선 어떠한 욕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마르코 역의 다리오 그렌디네티는 넘쳐흐르는 감정의 표현을 보여줍니다. 리디아의 사고 이후 절망하는 표정, 베니그로의 광기를 대하며 고성을 뱉는 모습, 베니그로를 떠나보낸 뒤 슬퍼하는 모습 등 다양한 상황마다 그 때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렇게 행동과 상반되는 감정표현 방식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혼수상태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모호한 상황에 대한 두 캐릭터의 해석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다리오 그렌디네티의 감정의 폭발은 이러한 해석과 통하게 됩니다. 베니그로는 삶과 죽음을 연속적으로 이해하고 혼수상태는 그 한 구간의 모습으로 인식합니다. 이처럼 죽음에 초연한 가치관과 하비에 카마라의 절제된 연기가 통하게 되는 것이죠.


  이 영화에서 참 독특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있는데 알리시아 역의 레오노르 와틀링입니다. 그녀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대사도 없고 오로지 육체와 호흡만으로 알리시아의 생명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죠. 이걸 연기로 봐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영화 내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자태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살아있는 듯,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있는 알리시아






  영화가 던진 질문


  연출이나 연기에서 칭송하고 싶은 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역시 가장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주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니, 어쩌면 질문이라기 보다는 질문을 만들어내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는이에게 사랑과 본질에 대한 의문의 씨앗을 심어주는 느낌입니다.




  1) 나무를 돌보다가, 사랑에 빠질 수는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진 상황은 동일하지만 두 주인공들이 대하는 자세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는 단순히 혼수상태에 대한 시각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인식 차이에 기반합니다.

"나무를 돌보다가, 나무와 사랑에 빠질 수는 없어!"

마르코는 혼수상태에 빠진 리디아를 나무와 같은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마르코의 관점에서 데카르트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생각을 할 수 없는 알리시아는 존재 자체가 부정 당합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알리시아는 그저 빈 껍데기일 뿐이죠. 그렇기에 마르코는 사고를 당한 리디아에게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곳에 리디아의 '영혼'은 없기 때문이죠. 받아들인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러한 관점은 데카르트의 등장 이후, 아니 어쩌면 이전부터 통속적으로 사회에 퍼져 있는 관습적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육체와 영혼을 나누어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개는 존재하는가?




  2) 몸으로 소통한다.


  이에 반해 베니그로는 알리시아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간호사의 책무를 넘어 끊임없이 대화하고 애정을 베풀죠. 그의 이러한 태도는 데카르트의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 점에서 통념과 어긋난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베니그로가 영혼 없는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알리시아가 건강할 때 부터 사랑했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영혼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죠. 영혼 없는 존재를 사랑한다면 네크로필리아와 다를 바 없을겁니다. 허나 알리시아를 마사지 해주는 베니그로에게서 욕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죠. 통념과 어긋난다고는 하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헌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정도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허나 이 작은 설득력을 바탕으로 베니그로의 사랑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서 소통이라는 특성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쌍방이 소통해야 합니다. 나와 상대가 서로를 향하고 있어야 하죠. 한 쪽만 향한다면 그것은 짝사랑일 겁니다. 그렇기에 얼핏 베니그로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보입니다. 베니그로는 헌신적인 사랑의 신호를 계속 보내지만 알리시아는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리디아의 병실에 찾아온 베니그로는 리디아의 피부가 좋지 않다고 걱정하며 손수 로션을 발라줍니다. 사고 후 짧은 시간만에 리디아는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던 것이죠. 그렇다면 알리시아는?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의 건강함, 그것이 바로 알리시아의 응답인 것입니다. 베니그로의 헌신에 답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몸으로 알리시아는 소통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몸입니다. 앞에서 감독이 육체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많은 상징을 사용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독은 데카르트에 기반한 관습적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베니그로에게 알리시아의 몸은 알리시아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그녀가 정신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지만, 알리시아라는 정체성과 본질은 몸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와 대화하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며 애정을 보내줍니다. 그렇게 비어있는 그녀를 그가 채워준 것입니다.


  베니그로의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철학가 메를로 퐁티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몸의 현상학자라 불리우는 메를로 퐁티는 몸은 외부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은 몸을 통해서 외부 대상과 소통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몸 자체가 본질이며 소통의 경계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이라면 몸으로 소통하는 알리시아는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알리시아에게 있어 베니그로는 그녀가 몸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가교이자 가장 빈번한 소통의 대상입니다. 베니그로와 알리시아의 사랑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AT 필드는 몸이라는 경계의 확장인가? 본질 확장의 실체화? 음... 만화를 적당히 봐야 할듯...




  3) 의지없는 소통


  베니그로의 헌신과 그에게 몸으로 소통하는 알리시아. 정말 고결한 사랑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는 순간, 감독은 간과해서는 안될 다른 화두를 던집니다. 사실 어떤 관객이라도 베니그로의 사랑에 대해 직감적으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알리시아에게 의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소통에는 의지가 없습니다. 강요된 소통인 것이죠. 게다가 베니그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강간. 상대의 의지와 상관없는 폭력적 사랑. 아니 사랑이란 단어를 쓸 수도 없는 야만적인 행위일 뿐이죠. 비록 감독이 영화 속 영화로 장면을 치환했다 하더라도 거부감이 무마될 뿐, 그 행동의 부당함은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베니그로는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되고, 그의 사랑은 파국으로 결말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당함 대문에 영화 말미에 마르코가 알리시아에게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의지 없는 소통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는 소통을 능동적 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를 외부와 작용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수긍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자의적으로 소통하기도 하지만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서도 끊임없이 외부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지 없는 소통은 완전한 소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발적 현상에 그칠 뿐, 사랑이라는 지속적 현상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죠. 비록 몸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갖추고 있지만 의지가 없기에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는 셈입니다.




  4) 영화가 심은 질문의 씨앗


  결국 마르코도 베니그로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인생이 그렇기도 합니다. 어떤 일에도 정답은 없죠. 하지만 이는 어떤 것도 오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도 됩니다. 결국 우리는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영화는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허나 사색하라는 요청을 보냈다고나 할까요?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를 통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발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과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을 작품


  2002년 이라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영상미와 파격적 소재를 가진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 파격성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무거운 주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친절한 연출도 정말 좋습니다.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예술영화랍시고 현학적인 자세를 갖지 않은 점도 맘에 듭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추천해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함께 같이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마무리로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노래 띄우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cucurrucucu paloma






※ 10년이 지난 작품인데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그녀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을 만큼 좋은 영화였습니다.

※ 무거운 주제지만 대중적이라는 면과 충격적 영상과 파격적 소재라는 점에서 <데블스 에드버킷>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