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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이동진은 쇼 호스트인가?


  모든 직업에는 윤리라는 게 있다. 평론가로서 내 직업윤리는 영화를 판매하는 데 일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요 채널들 사이에 촘촘히 끼어 있는 홈쇼핑 채널에서 나오는 쇼핑 호스트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B tv는 영화를 파는 IPTV이다. 이 채널을 틀 때마다 나오는 저 빨간 안경 아저씨는 나와 같은 직업으로 분류된다. 그를 볼 때마다 토악질이 나와 잽싸게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는 B tv가 파는 영화에 서울대학교와 조선일보 출신답게 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있어 보이는 어휘의 잔치들로 장식을 달아준다.


  그처럼 못 나가지만 씨네 21의 주성철 편집장도 가끔 여기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다. 영화주간지 편집장이 영화를 파는 채널에 몸을 팔고 있는 걸 보노라면, 측은하다. 늬네 회사는 도대체 얼마나 월급을 적게 주길래, 거기 와서 몸과 영혼을 파니?


  나는 그대들을 비웃는 걸로 쾌락을 삼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직업군으로 분류되는 게 쪽팔려서 하는 소리다.


  영화주간지 FILM2.0의 온라인 편집장을 지냈던 최광희 평론가가 이동진 평론가를 겨냥해 위 글을 남겼다. 감정 섞인 비방이나, 출신을 운운하며 판단하는 논리에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이 글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문장에서 생각해볼 만한 거리를 찾았기에 글을 쓰고자 한다. 


  "평론가로서 내 직업윤리는 영화를 판매하는 데 일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평론가는 작품을 평가하는 사람이다. 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물론 작품에 대한 감상은 주관적이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작품을 싫어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 주관적 감상을 근거와 논리를 갖추어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이 평론이다. 어떤 작품이 좋다면 무엇이, 어떻게, 왜 좋은지 말해야 한다. 


  그래서 평가에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사로운 감정이란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평론은 취향에 근거와 논리를 더하는 일이다. 독특한 취향을 바탕으로 기발한 평론을 한다면, 업계에서는 오히려 훈장감이다. 그럼 끼어들지 말아야 할 사사로운 감정이란 무엇이냐? 인맥이나 돈 따위가 그것이다. 나랑 친한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 높은 점수를 준다거나, 홍보 수당을 두둑이 받고 글을 쓴다면? 그 순간 더는 평론가가 아니다. 홈쇼핑 채널에서 나오는 쇼 호스트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맥락에서 '평론가로서의 직업윤리는 영화를 판매하는 데 일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는 발언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다. 형편없는 작품에 평론가의 이름으로 따봉을 날린다면, 그게 무슨 평론가인가 따봉충이지.







  그런데 영화를 홍보하면 전부 쇼 호스트가 되는 걸까? 평론가는 영화를 판매하는 데 조금도 일조하면 안 되는 걸까? 잠깐, 평론가가 영화를 판매하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나 있나? 만약 저명한 평론가가 어느 영화를 극찬한다면, 자연스레 영화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에는 아예 이를 통계로 제공하는 시대다. '로튼 토마토'는 평론가로부터 호, 불호의 평가를 모아 '썩은 토마토 지수'를 제공한다. 토마토가 싱싱하면 관객의 기대가 높아지고, 썩어 문드러지면 예매가 줄어든다. 그럼 평론가가 영화 판매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영화를 비판하는 '모두 까기 인형'이 되는 것뿐이다.


  세상에는 흉흉한 망작도 많지만, 추천하고픈 걸작도 많다. 그중에 마케팅 비용이 부족한 영화도 있다. 제대로 홍보도 못 하고, 스크린도 얼마 못 잡아 입소문을 타도 10만 관객조차 채우지 못하는 작품이 있다. 대개 독립영화들이 이런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독립영화라고 무일푼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아무리 저렴한 영화도 최소 몇억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이들에게 홍보란 대부분 그림의 떡이다. 


  정말 좋은데 대중성이 없거나, 혹은 대중성이 있어도 어른의 사정으로 빛을 못 보는 영화들. 나는 이런 작품을 볼 때면 널리 널리 외치고 싶다. "여러분. 여기 꿀잼 영화가 있습니다. 스크린에 얼마 걸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내서라도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꼭 보세요." 이러고 있는 나는 평론가로서 자격이 없는 걸까? 


  이동진은 어떨까? 만약 그가 영화 제작사로부터 돈을 받고, 그 대가로 글을 쓴다면, 그때는 쇼 호스트라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최광희의 글에 이동진이 돈을 받고 평론을 썼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동진이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나와 장식 달아주는 걸 비판하지만, 그것이 과연 평론가의 직업윤리에 어긋나는지는 의문이다.






  평론가를 '남이 만든 작품에 들러붙은 기생충'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평가는 당연히 부당하다. 평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고, 소비자가 존재하는 문학 작품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남이 만든 작품에 들러붙었다'라는 점이다. 작품도 없는데 평론이 나올 수는 없다. 또한, 평론을 쓰면 작품의 소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결국, 영화 평론가는 영화라는 산업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셈이다. 


  비즈니스적으로 봤을 때 평론가는 생산자와 소비자 중간에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일감을 받아,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팔아야 한다. 이런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실적만 잘 내는 리더가 아닌 동시에 엘리트라는 호칭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실적을 많이 내는지 따질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윈윈을 만들어 냈는지 따져 봐야 한다. 윈윈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소비자에게 공급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윈윈이다. 더 많이 고용한 기업도 사회와 윈윈했다고 말할 수 있다. 회사가 얻은 이익을 직원과 더 나누고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환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윈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中


  만약 영화 제작사(생산자)가 좋은 영화를 만들고, 평론가(중간)가 이 영화를 극찬하며, 그로 인해 관객(소비자)이 영화를 찾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윈윈윈이 아닐까? 이것이 평론가의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일까? 아니다. 평론가도 영화 산업 종사자다. 그런데 영화 산업이 흥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평론가가 작품에 '기생'할 필요는 없다. '공생'이 가능하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리공생'도 가능하다. 


  위대한 평론가의 행적도 윈윈윈이었다. 앙드레 바쟁은 오손 웰스를 혹평에서 구원했고, 프랑수아 트뤼포는 히치콕을 재평가했으며, 정성일은 임권택을 세계에 알렸다. 그 결과 세계의 영화광들은 훌륭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를 판매하는 데 일조했다고, 윈윈윈을 이뤄냈다고, 평론가의 직업윤리에 어긋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윈윈윈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평론가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관심 밖의 작품을 화젯거리로 올리기는 힘들다. 운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영화가 망작이면? 이때는 별수 없다. 누군가 한 명은 패배해야 한다. 


  영화가 너무 쓰레기라 평론가가 글쓰기를 포기해버리면 평론가의 패배다. 영화가 쓰레기라고 글을 쓰면 생산자의 패배다. 누군가 패배해야 한다면 이 둘이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 절대 소비자가 패배해서는 안 된다. 언제 소비자가 패배하게 될까? 영화가 쓰레기인데 평론가가 거짓으로 칭찬할 때다. 이러면 소비자가 패배한다. 평론가를 믿고 영화를 찾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이런 짓을 벌이는 사람을 '평론가'라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평론가가 지켜야 할 직업윤리. 그것은 관객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 평론가가 판매에 일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관객의 패배를 딛고 벌어진 일이어서는 안 된다. 평론가는 관객의 승리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제작사의 승리를 우선하면 쇼 호스트가 된다. 


  그럼 한번 따져보자. 영화 소개 채널에서 영화를 추천하는 행위가 관객을 기만하는 일일까? 이것은 어떤 영화를 어떻게 소개하는지에 달린 일이다. 망작을 명작으로 포장한다면 쇼 호스트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저 채널에 나와 영화를 소개했다고 쇼 호스트 취급당할 이유는 없다. 







  평론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사람들이 보도록 만들어야 해요. 평론가는 거간꾼이고 맞선 주선자예요. 그런데 오히려 어려운 평론 탓에 사람들이 '아, 이 영화 보지 말자'라고 생각한다니까요. 나는 고생해서 이런 영화도 본다고 얘기하는 게 무슨 평론이에요? 평론은 매개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해줘야 해요. 자신이 받은 감동을 타인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그것을 평론가가 마련해줘야 하는 거예요.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中


  내가 영화 글을 막 쓰기 시작했을 무렵, 아는 사람이 이 글귀를 전해주었다.


  "너가 앞으로 써나갈 글은 이런 모습일 것 같다."


  그 말 그대로 되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거간꾼이 되기로 했고, 영화 주선자가 되고자 했다. 내가 무언가 대단하다는 오만에 빠질 때면 저 글귀를 찾아보며 초심을 떠올렸다. 이제는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더했다. 윈윈윈을 이루는 것. 내가 쓴 평론으로 영화도 흥하고, 나도 흥하고, 관객도 흥하는 일을 이뤄내고 싶다. 만약 이런 나를 누군가 쇼 호스트라 욕한다면?


  "괜찮아요. 그것이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라면 말이죠."






Written by 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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