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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초식남 월드






  면접 스터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박을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그저 그런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탁소 주인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니 별로. 아직 취업 못 했냐? 그게 그렇게 됐다. 나도 뭐 그냥 빌붙어 산다. 서른을 넘긴 늙은 소년들은 남자가 되지 못한 현실을 한탄했다. 그래도 이리 허심탄회하게 처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둘 다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리라.


  2차 면접을 앞두고 면접 스터디 중이라고 말하자 박이 눈썹을 치켜뜨며 반색했다.


  "야. 이 엉아가 기가 막힌 멘트 하나 알려주랴?"


  취업/공시 카페에서 다년간 활동한 경험 덕분인지 박은 면접관의 심리를 다 꿰뚫는 것처럼 굴었다. 그가 말하길 고스펙일수록 충성심을 어필해야 한단다. 잘난 놈들 데려와서 가르치고 경력 쌓아주면 돈 더 받겠다고 날름 이직해버려 회사가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 능력에 걸맞은 연봉을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걸 할 줄 알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겠냐며 핀잔을 주었다. 돈을 더 주기 싫으니까 충성심 높은 애들을 뽑아야 한다. 면접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반드시 묻는다. 박은 침을 튀겨가며 주장했다. 스터디에서도 뻔하게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기가 막힌 멘트가 무엇인지 궁금해 박의 지식자랑을 대단한 것으로 치켜세워주었다.


  "그래서 충성심을 어필하는 기가 막힌 멘트가 뭐야?"


  박은 씨익 웃더니 편의점을 가리켰다. 우리는 4캔에 만 원 하는 수입 맥주를 사 들고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 이젠 진짜 궁금해서 못 참겠다. 도대체 그 멘트가 뭔데?"


  박은 목젖을 크게 출렁이며 캔 하나를 거의 비우더니 크아아아 구수한 소리를 뱉었다.


  "아... 나 갈란다."


  내가 일어서자 박이 알았어 알았어 하며 나를 달랬다.


  "기가 막힌 멘트가 뭐냐면..."


  나는 박의 말을 듣고는 바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면접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들어가느냐'이다. 나와 함께 들어갈 녀석은 어벙해 보이는 놈이었다. 얼굴은 공대생 멸치처럼 못생겼고 코 위에는 안경을 쓰던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인상을 꾸미겠다고 쓰지도 않던 렌즈를 끼고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정장이 안 어울렸다. 중학생이 아르마니를 입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소심하고 매력 없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녀석은 김 씨로 지거국 출신이었다. 스펙은 착실했으나 매번 떨어지다 보니 자신감이 바닥을 친 취업준비 1년생이었다. 역시 간판이 후달리는 걸까요? 김의 물음에 나는 솔직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본심은 달랐다. 간판이나 스펙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 사람을 뽑질 않는 게 문제지. 질문 몇 개로 제대로 된 사람을 가려낼 수는 있나? 어차피 면접은 운빨좆망겜이다. 단지 성공 확률이 양심 출타 수준으로 낮을 뿐. 그러나 이런 말을 굳이 해줄 필요는 없었다. 김은 그대로 간판을 신경 쓰며 주눅 들어 있으면 족했다. 잔인한 남자라 나를 욕하지 말아 주길. 밥그릇이 작으면 경쟁은 치열해지는 법이다.


  면접은 예상대로 순조로웠다. 김은 묻지도 않은 학교 얘기를 꺼내며 본인의 콤플렉스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는 그걸 보며 한층 여유롭게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면접관이 그걸 물었다.


  "자네는 집이 서울인데 울산까지 올 수 있겠어요?"


  "기숙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숙사야 있죠. 그런데 근무하다가 힘들다고 서울 보내 달라고 그러는 건 아니죠?"


  "군대도 다녀왔는데 기숙사 생활이야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다른 회사가 서울에서 근무시켜준다고 경력자 구하면 이직해버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박이 알려준 멘트를 써먹을 기회가 왔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여자를 사귀어왔지만, 한 번도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재치 만점. 의미 만점. 발성 만점. 이보다 완벽한 멘트는 없었다.






  그런데 면접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안경을 벗더니 눈을 비비고는 이미 많이 벗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잠시 후 한숨을 푹 꺼지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여자를 많이 사귀었다고?"


  "네?"


  "아... 아닐세."


  그게 마지막 질문이었다. 이후로 면접관은 나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찌그러졌던 김은 평정심을 찾고는 유창하게 답변하기 시작했다. 면접이 거의 끝날 무렵 면접관이 김에게 물었다.


  "그쪽은 대학 때 연애 안 해봤나요?"


  "네. 고백은 많이 해봤는데. 다 차였어요."


  김은 못생긴 얼굴로 멍청한 웃음을 헤실헤실 흘렸다. 이를 바라보는 면접관의 눈가가 어딘가 모르게 촉촉하게 느껴졌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2주가 지나고 문자가 도착했다.


  "당사의 사원 모집에 관련한 면접에 참석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귀하의 인상적인 면접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들로 인해 합격하지 못하였음을 통보 드립니다. 아쉽지만 귀하의 면접 참석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앞으로의 귀하의 취업에 좋은 결과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박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놈이 괜히 지 애비한테 빌붙어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젠장. 여자랑 손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왜 바보같이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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