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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기담] 야구공과 할아범






  남자아이는 시절에 따라 즐기는 스포츠가 달라진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를 즐겨했고, 중학교 때는 축구만 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스포츠는 야구였다. 이런 변화가 벌어진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의 몸집과 연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야구를 하곤 했던 공터를 어제 잠시 방문했는데, 이렇게 좁은 데서 어떻게 1, 2, 3루를 나누고 배트를 휘둘렀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야구를 했지만, 딱 반년 정도 야구를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팔목이 욱신거리곤 한다. 

  어른들은 우리가 공터에서 야구 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홈런이라도 날렸다가는 야구공이 주변 담장을 넘어가거나 주차된 자동차를 뚜드려패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이런 소릴 하면 늙은이 취급을 받겠지만, 그 시절에는 아직 정이 남아있었다. 어른들은 '이 놈들아 조심하지 못해!'라고 소리 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야구공을 돌려주셨다. 

  그러나 정말로 화를 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공터 정 맞은편에 사는 어떤 할아범이었다. 나는 그분의 성함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패라는 것은 잘 사는 집의 전유물이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평범한 2층짜리 연립주택에는 매직으로 휘갈긴 번지수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 집에 사는 할아범은 정말로 무서웠다. 자기 집 마당으로 공이 넘어오면 쇠붙이를 비비는 듯한 목소리로 '이놈들'하고 소리치며 튀어나왔다. 그는 떡갈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로 이마빡을 두드려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정하게 잘 뛰어다니는 분이 지팡이는 뭐하러 가지고 있나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3학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날 나는 앞선 타석에서 모두 안타를 쳤다. 그리고 3번째 타석에 들어섰을 때.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답게 날아가는 홈런을 본 적이 없었다. 야구공은 가을을 맞아 높아진 하늘 끄트머리를 살짝 스치면서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와장창.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창문을 박살 낸 순간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떡갈나무 지팡이의 집이었다. 

  야구공을 감탄하며 바라보던 아이들의 표정은 와장창 소리와 함께 사색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매서운 홈런 축하였다. 아무도 나를 등 떠미는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죄를 시인한 죄수처럼 터벅터벅 할아범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 와중에도 '와 진짜 멀리도 날아왔네'하는 생각이나 하던 걸 보면 그 홈런이 참 멋있긴 멋있었나 보다. 

  할아범의 집 앞에 거의 다 왔을 때야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할아범이 지팡이를 들고 뛰쳐나왔어야 했는데. 그날은 빨간 벽돌집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우리는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여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야. 초인종 눌러봐."

  "미쳤냐? 그러다가 뒤지게 맞으려고?"

  애들은 옥신각신했다. 나는 어찌 되었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고, 뒤지게 맞을 각오로 초인종을 눌렀다. 전기 신호가 삐지지지직 전해지는 느낌이 손끝에서 느껴졌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이들은 문 앞에 주저앉았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그냥 담을 넘어가 버리면 될 것도 같은데, 당시에는 누구도 차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참 아이다웠다. 

  그렇게 몇 분을 주저앉아 있다가 한 아이가 집에서 다른 공을 가져오겠다며 일어서자 아이들이 우르르 따라 일어섰다. 그때였다. 삐 소리와 함께 철 대문이 덜컹 열렸다. 인터폰으로 문을 연 모양이었다. 그러나 할아범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철문이 바람을 따라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아이들은 다시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할아범네 집에 들어섰다.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내가 박살 낸 유리창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 주변에 공은 없었다. 아마 눈에 보였다면 공만 집어 들고 냉큼 도망 나왔을 것이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어두컴컴한 거실이 보였다. 아직 낮이긴 했지만, 불빛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했다. 나는 쇠와 유리로 만든 현관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계세요? 쾅쾅쾅. 계세요? 

  내가 문을 두드리자 아이들은 대문밖으로 죄다 도망쳐버렸다. 대문 밖에서 고개만 뻐끔 내밀고는 나를 측은한 듯이 바라봤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끼이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계세요?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무 대답이 없자 나는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빡구가 말하길 '아마 네 인생 최고로 용기 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라고 하더라.

  글쎄다.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라 반대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고 깨진 창문으로 갔다. 아마 무서워서 공만 들고 냅다 도망칠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창문 주변에는 야구공이 없었고, 나는 컴컴한 집 안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때 할아범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때 이빨을 딱딱 부딪쳤던 걸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람이 겁에 질리면 정말 만화처럼 이빨을 쉴 새 없이 딱딱거린다. 

  할아범은 주방 식탁에 앉아 나를 향해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의 앞에 자발적으로 끌려갔다. 내가 식탁 맞은편에 서자 그가 야구공을 불쑥 내밀었다. 아아. 진짜 끝장이구나.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때 할아범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마치 쇠 풍선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쉬이이익) 이거 줄 테니깐 내 부탁 하나 들어주련?"

  "네?"

  "(쉬이이익) 혼내지 않을 테니 내 부탁하나만 들어다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범은 건넛방을 가리켰다. 

  "(쉬이이익) 저 방에 좀 가다오. 들어가서 지팡이 좀 갖다 다오."

  "...그건 할 수 없어요."

  내가 해놓고도 당장 이해 가지 않는 소리였다. 왜 그깟 심부름을 거절했을까?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고, 할아범의 표정은 험악하게 변해갔다. 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할아범이 내 왼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나는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겨우 그를 뿌리쳤고, 그대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집 밖에서 기다리던 아이들도 나를 따라 달렸고, 우리는 홈플레이트에 도착해서야 겨우 가쁜 숨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공도 없고 시간도 늦은 관계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왼팔에 시커먼 멍이 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누가이랬냐며 나를 혼내셨고, 나는 억울하고 서글픈 마음에 엉엉 울어가며 할아범이 그랬다고 실토했다. 어머니도 할아범은 무서웠나 보다. 해가 뉘엿해질 즈음 아버지가 오시고 나서야 부모님이 할아범 집으로 갔다. 부모님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겨 9시 뉴스가 시작할 때가 돼서야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이런 거 맞니?"

  "정말이에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잡았다니까요."

  "그 사람이 정말 그 할아버지 맞아?"

  "그럼 그 집에 다른 사람도 살아요?"

  아버지는 '됐다.' 한마디 하시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왜 그렇게 물으셨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찾아갔을 때 할아범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것도 죽은 지 꽤나 오래 지났다고... 할아범은 건넛방 침상 위에서 가냘픈 모양으로 죽어있었다 했다. 내가 문을 열지 않았던 바로 그 방 말이다. 며칠이 더 지나서야 미국에 산다는 아들이 동네를 찾았고, 사람들은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했다. 

  팔에 든 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갈수록 심해져 병원을 찾았을 때 '괴사'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살을 긁어내는 끔찍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고, 그동안 야구는 언감생심이었다. 

  지금 할아범의 집은 없다. 할아범 집 주변 4채의 건물을 허물고, 5층짜리 원룸이 들어선 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공터와 할아범네 집터를 지나가기가 두렵다. 그 주변을 지날 때면 아직도 왼팔이 욱신거리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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