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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꼰대,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나 말이야. 요즘 꼰대가 된 것 같아."


  친구 녀석이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주제에 저런 소리를 뱉었다.


  "장가도 안 간 주제에 뭔 소릴 하는 겨?"


  "며칠 전에 우리 회사가 산학협력하는 곳에 갔다가 대학생 애들하고 술을 마셨는데."


  "여대생한테 찝쩍거렸냐?"


  "날 너 같은 종자랑 비슷하게 여기지 말아줬으면 해. 그러니깐 닥치고 들어봐. 우리 회사가 양조 사업을 하거든? 나는 술 자문으로 그 일에 들어간 건데, 거기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애가 술에 대해 너무 모르는 거야.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는데, 너무 꼰대질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젊은 시절 우리는 절대 꼰대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이든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훈계하고 싶어 안달 나 보였고, 그렇다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대개는 화려했던 청춘을 자랑하는 데 그치거나, "요즘 애들은..."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신세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애는 크면 양조장 사장이 될 텐데. 나보다는 술을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술에 대한 철학도 있어야 하고..."


  "그거야 내면에 깊이가 있어야지. 겨우 대학생이 널 어떻게 따라오겠냐? 걔 합법적으로 술 마신 지 5년도 안 됐어."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그걸 강요한 것 같고, 그러다 '요즘 애들은 왜 다 이 모양이지?' 이런 선입견이 생기는 것 같아서 좀 두려웠다."






  친구와 대화를 나눴을 때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친구의 꼰대 걱정이 기우라고 생각했다. 아직 우리는 꼰대가 되기에는 가진 것도 없고, 너무 어리다고 여겼다. 그런데 다음 소절을 읽고 꼰대란 무엇인가 고민에 빠졌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훈계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꼰대는 나이와 상관없다."


  흔히 나잇값 하면 '어르신'이고 나잇값 못하면 '꼰대'라고 한다. 그런데 꼭 나이가 있어야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한두 살 많은 걸 내세워 상대를 억압하면 꼰대와 다름없다. 알맹이도 없는 소리를 인생의 진리라고 충고하면 그 또한 꼰대다. 그렇게 주변 사람의 창의력과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면 그게 바로 꼰대다.


  무엇이 그들을 꼰대로 만드는 걸까? 훈계하는 것이 잘못일까? 아니다. 똑같이 훈계해도 누구는 '멘토'가 되고 누구는 '꼰대'가 된다. 헛소리만 늘어놓아서 그럴까? 하지만 아무리 옳은 소리여도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이 나왔다. '소통'이다. 꼰대 짓은 잘못된 소통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꼰대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中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래서 항상 소통에 주목했다. '이 글은 통하였느냐?' 내 글을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통하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련 책도 많이 보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소통의 원리를 가르쳐 준 것은 어느 고양이 한 마리였다.


  우리 동네에는 길고양이들이 많다. 하나같이 예쁘장해서 햇살 좋은 날이면 일광욕을 즐기며 자태를 뽐내곤 한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다. 공포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고양이였다. 하루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가고 있었는데, 녀석이 담장 위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샌드위치 속을 조금 떼어 녀석 앞에 내밀었다. (참치 샌드위치였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내 손을 빤히 쳐다볼 뿐 입을 대지 않았다. 나는 팔이 저릴 때까지 손을 뻗고 있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가던 길에 나섰다. 손에 묻은 음식은 바닥에 훌훌 털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등 뒤로 '툭'하는 소리가 났다. 녀석이 담장 아래로 내려와 내가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 


  상대와 통하려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강요하는 순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글이 통한다. 녀석은 날 때부터 길고양이였다. 사람 손에 있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다. 그게 녀석의 방식이었다. 나는 음식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녀석과 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거치고 나면 아마 녀석을 쓰다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녀석과 소통하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으니까.


▲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中






  통하려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역지사지라는 좋은 옛말이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해내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사실 나도 힘들다. 타인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모른다. 그럼에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나도 겪어 봤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교만이다. 그리고 꼰대 짓이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다 안다고 자기도취에 빠질 게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부처님처럼 한 방에 이심전심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알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이 이해를 낳는다. 그러고 나서야 통할 수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위대한 사상과 화려한 필력을 뽐내는 일이 아니다. 독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나아가 세상과 시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그게 진정한 글쓰기다. 그렇게 글로 세상과 통하는 일이다. 


 겸손함이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핵심이 아닐까? -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中






  그때는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긴장하지 않으면 친구도 나도 언제 꼰대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으면 고민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내 행동이 강요는 아닐까? 나는 주변 사람과 제대로 통하고 있나?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는 나에게 이런 고민을 선사해 준 고마운 책이다. 꼰대가 되고 싶진 않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연히 두렵다고 말하는 친구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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