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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버닝> - 세 인물의 의미

※ 이 글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닝>의 이야기는 모호하다. 있어 보이게 표현하자면 열린 결말이고, 싸게 말하자면 떡밥이 널려있다. 받으면 끊어지는 전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물은 존재하는 걸까? 정말 벤이 해미를 죽였을까? 고양이는 정말 보일이일까? 벤의 두 번째 여인은 어떻게 됐을까? 모임 멤버들은 벤의 정체를 알까? 그리고 종수는 정말로 벤을 죽였을까? 이야기는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이렇게 열린 이야기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각자의 감상이 있고 각자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게 싫었다면 감독이 친절하게 서술했어야 맞다. 그럴싸한 단서만 뿌리며 떡밥 놀음하는 게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모호한 이야기는 모호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 모호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는 게 제대로 된 '해석'의 시작일 것이다. 


  <곡성>과 달리 <버닝>은 이야기만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 같다. <곡성>은 마지막 종구와 무명의 대화를 통해 모호함의 의미를 정리했다. 그러나 <버닝>은 그런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만 본다면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관객은 종수만큼이나 단서가 모자라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하지 않고, 추측과 단정에 머물 뿐이다. 결말에 이르러도 모호함은 여전하다. 모호함의 의미도 모호하다.


  그러나 인물은 명확하다. 모호한 이야기에 비하면 인물은 의식의 흐름 같은 소리가 쏙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명확하다. 그리고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의 모호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고 나면 이 영화가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해미]는 대한민국 청춘의 가장 한심한 모습이다.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꾼다.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면을 가꾸려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외모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성형 수술을 하고 촌스러운 걸 따진다.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녀온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녀의 여행 후기는 성장이라기보다는 좌절에 가까웠다. 사라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자신도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비전, 목표, 고민 같은 게 없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고뇌하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 자기 연민에 그칠 뿐이다. 극단적으로 자존감이 바닥인 존재다. 현실에서는 이토록 바닥난 자존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버닝>의 인물은 이토록 명확하다. 


  해미를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눈먼 청년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동기부여', '열정' 같은 소리를 외치면서 으쌰으쌰하지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기업 입사'나 '공무원'이라고 말한다. 뭐 그런 꿈을 품어도 좋다. 하지만 진짜 대기업에 입사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은 열정 같은 소리를 입으로만 떠들거나 SNS에 자랑하지 않는다. 하물며 고시생이라면 인터넷 뒤질 시간도 없을 것이다. 눈먼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를 보며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를 바라지만, 욕망만 있을 뿐 행동이 없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주면 뭐하나. 운동해라. 책을 봐라. 이런 말을 들었으면 감동하고 있을 게 아니라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프리카 여행은 허세의 절정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존감만 바닥을 쳤음에도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떠든다. 마치 SNS에 '나 아프리카 다녀옴'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해미는 그런 존재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고, 목표는 없지만, 고민도 없고, 자존감은 바닥이다. 






  [벤]은 그런 해미를 착취하고 유린하는 기득권이다. 사실 벤의 배역을 문성근 씨가 맡았어도 위화감이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벤은 젊었고 늙은 꼰대보다 훨씬 영악했다. 변호사는 종수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훈계를 늘어놓지만, 벤은 훈계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대신 위로한다. '해미는 특별한 사람이야.' 같은 말을 하며 바닥난 자존감을 치켜세워준다. 상대를 힐링한다. 여기에 자존감이 떨어진 청년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에 발린 소리일 뿐 실제로는 상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품만 할 뿐이다. 게다가 도덕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 아예 도덕을 제멋대로 정의하기도 한다. 상처 입은 상대에게 입김 한 번 호... 불어주고 영혼까지 빼먹으려 하는 잔악한 존재다. 


  벤을 보며 어느 정치인이 떠오른다면 과한 해석일까? 한때 힐링 열풍을 몰고 다녔고, 입으로는 혁신을 외쳤으나, 실상 구태의 끝판왕이었던 어느 정치인 말이다. 


  이런 벤을 생각하고 있으니 해미가 가엽게 다가온다. 세상의 어른 중에는 선의를 가지고 해미의 자존감을 치켜세워줄 사람이 없는 걸까?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외침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이 없는 걸까? 어째서 벤 같은 승냥이만 존재하는가? 






  [종수]는 청춘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 말하지만, 작가라는 꿈은 간직하고 있다. 물론 내세울 것도 없고, 완성한 작품도 없고, 작가가 맞는지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종수에게서도 위축된 청춘의 현실을 볼 수 있다. 그는 벤의 으리으리한 집과 포르셰를 보며 움츠러든다. 그러나 자존심은 바닥일지언정 자존감은 굳건했다. 사실 자존심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 남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휘둘리지 않는 뚝심이 있다. 개떡 같은 입사 면접에서 쿨하게 뛰쳐나올 줄 안다. 벤은 그런 종수에게도 해미에게 하듯 거짓 힐링을 시도한다. '가슴을 울리는 베이스' 같은 사탕발림을 날리지만, 종수는 이에 넘어가지 않는다.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 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대신 명확한 욕망이 있다. '나는 시발 해미를 사랑한다고'라고 말할 줄 안다. 


  다만 어리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해미가 실종되었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만, 그런 상식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자기가 다 해결하려 한다. 해미의 어머니까지 찾아가서는 실종 사실을 논의하지 않는다. 마치 빵꾸 내고는 혼자 처리하려고 버둥대다 일을 더 크게 만드는 신입사원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만의 해답을 찾는다. 받자마자 끊기던 전화는 마지막에 집 나간 어머니와 연결된다. 16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염치없게도 500만 원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말한다. 이걸 보면 아마 그동안 걸려온 전화는 어머니였거나 어머니를 쫓는 빚쟁이였을 듯하다. 종수는 시계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고양이로부터 해미 실종의 답도 얻는다. 범인이 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실상 냉철한 추리라기보다는 성급한 단정에 가깝다. 만약 종수가 셜록 홈스였다면 이리 지저분하게 떡밥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평범한 청춘이었다. 어리다. 어설프다. 하지만 어설프더라도 종수는 행동하는 사람이 됐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복수를 감행한다. 종수에게 뜬구름은 없다. 행동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창동이 <버닝>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끔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들먹거리며 훈계하는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간절하게 다가온다. '제발 정신 차리고 종수처럼 벤을 무찔러줘!'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처음 영화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 '청춘을 위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꼰대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꼰대짓 하는 영화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왔다. 진심으로 걱정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주변에도 해미 같은 애들이 있었다. 열정 같은 소리를 하며 행동은 않고 뜬구름 쫓는 청춘들. <버닝>은 그들에게 날리는 진심어린 죽간 스매싱 같은 영화가 아닐까? 






Written by 충달 https://www.youtube.com/channel/UCAxaLsT_FkWqr-3SfxQTj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