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비쌤 윤PD

흥행과 작품성 사이






  흥행작을 까면 거친 항의를 받는다. 내가 이렇게 재밌게 봤는데. 재밌게 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네까짓 게 뭐길래 천만의 선택을 무시하느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 어깨에 예술 뽕을 얹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아끼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흥행이 작품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상황을 뒤집어 보면 명백해진다. 평단의 호평을 받고, 각종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타고,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고, 세월이 지나 10년 뒤, 20년 뒤에 고전으로 남는 작품 중에 대박 난 영화는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21세기 최고의 영화 목록에 기꺼이 오를 거라 생각하는 <캐롤>의 한국 관객 수는 고작 32만 명이었다.


  그럼 또 이런 말을 듣는다. 영화를 왜 이렇게 피곤하게 보느냐? 그냥 보고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저 즐기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영화 글을 쓰는 이유는 평(評)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나쁘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도 편하게 영화 볼 줄 안다. 완성도랑 상관없이 즐겨보는 장르도 있다.** 다만 글을 쓴다면 피곤할지라도 꼼꼼히 곱씹는다. 그게 평(評)이기 때문이다.

* '설명'이 아니라 '설득'이다. 왜냐하면, 첫째는 나의 평가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평가를 읽는 사람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B급 호러를 즐겨 본다. 특유의 과장된 서스펜스와 충격적인 비주얼을 좋아한다. 하지만, 솔직히 작품성이 후잡한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평론가를 흥행 판별기로 활용한다. 뭐, 활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목적과 생산자의 목적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비평에 있어서는 일치해서도 안 된다. 비평은 '비디오 가이드'가 아니다. 물론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은 아니다. 비평의 목적은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 그로부터 의미를 캐내어 독자를 설득하는 데 있다. 비평가는 흥행 애널리스트가 아니다. 흥행 추이 차트를 분석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작품만 본다.


  비평은 흥행을 예언할 능력도 없다. 작품만 바라보는데 흥행할지 말지 어찌 알겠나? 게다가 흥행은 그 자체로도 종잡을 수 없다. 흥행 요소만 골라 담았던 <군함도> 망한 거 봐라. 근데 빵빵한 배급 덕에 600만을 넘긴 게 함정. <도가니>같이 칙칙한 영화도 잘만 흥행한다. 흥행 여부는 삼신 할매도 모르는 일이다.






  반대로 흥행작이라 까는 사람도 있다. 천만 영화라 되레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것도 홍대병*일까?) 이 심정도 이해한다. 소위 천만 영화라 불리는 메가 히트작에는 으레 대중영합주의가 담겨있다. 신파라든가, 뜬금없는 액션이라든가, 무작정 빵빵 터뜨린다거나, 마이클 베이 : 나 불렀어? 맥락 없이 등장하는 불필요한 요소가 눈에 밟힌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 대중적인 콘텐츠를 거부하고 문화적인 우월감을 표시하는 비주류나 마니아 취향을 가진 이들을 멸칭하는 신조어.


  <국제시장>은 신파적 연출과 흑역사를 미화하는 국뽕 서사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부분도 존재했다. 우선 영화의 시작이었던 흥남부두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서 나는 충무로의 진일보를 느꼈다. 기술력의 발달뿐 아니라 CG와 호응하는 촬영, 연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를 완성한 스태프가 기꺼이 자랑스러워 할만하다. 다음은 서사다. 국뽕과 신파로 점철되었지만, 그 와중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을 보듬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산가족 상봉의 경우는 마냥 신파로 볼 수 없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황당한 이야기도 아니다. 주인공이 아득바득 살아온 이유였고, 현대사를 관통하는 비극이었다.


  물론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안 좋은 면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국제시장>이 비판을 면할 수는 없는 게 갱도 붕괴 시퀀스라든가, 월남 파병처럼 빼도 박도 못 하는 신파나 역사 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덮어 놓고 무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영화가 흥행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훌륭한 평론가라면 그 가치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귀여니'에게서 조차 예술적 가치를 읽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귀여니의 미덕이 무엇이냐?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도 그저 삼류로 남아있다. 억지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언제든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나는 <국제시장>으로부터 현대사의 슬픔과 위로를 읽었다. 식자층은 현대사를 분석한다. 그동안 평범한 사람들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것은 아픔이었다. '격랑의 한국 현대사'라고들 한다. 그 속에서 파도에 휘둘리던 사람의 아픔을 어떤 영화가 보듬어 주었는가? 누군가 한 사람쯤 "고생 많았어요." 한마디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국제시장>이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사마의>에서 '십오종군행'이 흘러나오던 순간의 감성과 비슷하달까?)






  이러면 누군가는 모순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앞에서는 흥행이 비평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흥행으로부터 영화의 의미를 끌어내?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장난하냐? 이리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왔다 갔다 하지 않았다. 흥행으로부터 <국제시장>의 가능성을 추측할 뿐, 의미 자체는 온전히 작품에서만 가져왔다.


  잘 만들면 재밌을 확률이 높고, 재밌으면 흥행할 확률도 높다. 그렇다면 역으로 흥행작을 잘 만들었으리라 추측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흥행작을 무조건 대중영합주의라고 매도하지 말자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영화를 천만 명이 봤단다. 5천만 국민 중에 20%에 육박한다. 그 열광을 덮어 놓고 대중영합주의로 매도해서 되겠는가? 그곳에서 예술적 미학적 가치를 찾을 가능성마저 무시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가능성이 곧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천만이나 보았다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무엇을 보여줬길래? 각 잡고 살펴볼까?" 그렇게 영화를 살펴봤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영화는 나에게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을 뿐이다. 그러면 "남들은 잘만 감동하고, 그래서 흥행하는데, 왜 그걸 폄하하느냐." 이리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감동했다고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관적 취향이 객관적 가치로 거듭나려면 전통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기존 작품과 비교하여 나은 면모를 보여줘야 훌륭한 작품이 된다. 그게 쌓이고 쌓여서 비평의 잣대가 된다. 단지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흥행했다고 작품을 고평가할 수는 없다. 그래서 흥행은 추측의 단서일 뿐, 결론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나는 흥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흥행을 비평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행만능론자도 아니고, 흥행무용론자도 아니다. 중간 어디쯤인 것 같다. 문제는 흥행과 작품성에 관한 내 입장을 말하려면 이렇게 긴 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흥행과 작품성은 상관관계일 뿐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내 생각을 요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장 하나로 내 속내를 읽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결국, 흥행만능론자 앞에서 나는 흥행무용론자가 되고, 흥행무용론자 앞에서 나는 흥행만능론자가 된다. 그러다 보면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참... 힘들다...

* 참조 :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강조했다. 공자도 "군자는 중용이고,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라고 하였다. 이게 중간이 최고라는 말은 아니다. 포지션보다는 적절함을 강조하는 말이라 봐야 한다. 흥행을 평가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경시해서도 안 된다. 다만 가능성의 단초로서 적절히 참고할 뿐이다.


  흥행에 관한 관점뿐이랴. 세상만사 모두 중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터넷이 끼리끼리의 매개체가 된 이래 넷 세상은 중용을 잊어버린 듯하다. 어떤 이슈든지 양극화가 심해졌다. 세상 모든 일이 꼭 편을 가르고, 찬반을 나눠야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중용의 미덕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중간에 서 있을 필요도 있다. 그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