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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스포) 왜 <코코>는 갓무비가 되지 못했나?

※ 이 글은 영화 <코코>, <주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코>에는 의미심장한 비유가 등장한다. 망자의 땅과 생자(生者)의 땅 경계에 서 있는 출입국 사무소다. 망자들이 생자의 땅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출입국 사무소에서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 자격이란, 생자가 망자를 추억하는 사진을 진열해놔야 한다는 것.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점. 왜 영화는 이 과정을 출입국 사무소처럼 표현했을까?


  <코코>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멕시코의 문화를 다루는 멕시코의 영화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것은 미국 회사와 미국인 감독이다. 현재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멕시코 밀입국자를 배척하기 위해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공약을 실현 중이다. 결국, 출입국 사무소는 멕시코 문화와 미국 문화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함축적으로 비유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걸까? 음악을 거부하는 가족의 모습은 트럼프 정권의 배타주의와 비슷하다. (특히 할머니의 외모나 표정은 누구와 몹시 닮은 기분이다) 그들은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기타를 부수는 폭력까지 저지르며 억압하기만 한다. 끝내 구석에 몰린 주인공은 범죄자가 된다. 망자의 물건을 훔쳐 망자의 땅에 강제로 소환된다. 이 서사는 배척당한 이민자가 자연스레 범죄자가 되는 사회의 악순환을 보여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축복이라는 이름의 이해와 화합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진정한 축복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축복을 받고 생자의 땅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축복 속 조건이 저주가 되어 다시 망자의 땅으로 소환된다. 주인공은 조건 없는 축복을 요구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른 축복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다시 축복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아무 조건 없이. 그제서야 온전히 생자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정한 이해와 화합도 마찬가지다. 조건이 없어야 한다. 물론 현실 외교는 명분과 득실을 치밀하게 따져야 하는 날카로운 세계다. 조건 없는 화합은 말 그대로 꿈 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코코>가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개성적이고 독특한 멕시코 문화로부터 보편적인 주제를 끌어내는 훌륭한 시나리오의 정석이다. 게다가 그 주제가 올바른 정치성과 시의성을 가졌다는 점도 훌륭하다.


  하지만 나는 <코코>를 고평가할 지언정 갓무비 반열에 올릴 수는 없었다.


  수능 공부하던 시절 사회 과목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말이 있다.

  "정답이 뭔지 모르겠으면 보기 중에 중용, 이해, 화합 이 말이 들어간 거 골라라. 거의 맞는다."

  이해와 화합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세 살짜리 애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든 살 먹은 노인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왜냐면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간과한다면 수능 공부처럼 공허한 지식으로 남을 뿐이다.


  내가 인터넷 커뮤니티 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 인터넷으로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고,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증거가 있으며, 이를 풀어내는 탄탄한 논리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상대가 "응 그건 네 생각." 한 마디 던지면 그만이다. 올바름은 이해와 화합에 있어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과 사랑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노력하면 반드시 바뀐다. 인터넷에서 그런 노력이 가능하겠는가? 밥 한번 같이 먹은 적도 없는 사람을 댓글 몇 자로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코코>가 진정한 이해와 화합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 과정에서 사랑과 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영화에는 이것이 가족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논리가 등장해야 한다. 바로 에르네스토의 성공을 향한 욕망이다. 이 두 개의 가치가 있는 그대로 부딪혔다면 나는 <코코>를 기꺼이 갓무비 반열에 올렸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우회한다. 여기에 흥미를 위한 극적 장치를 끼얹는다. 바로 반전이다.


  극의 흐름을 일순간 바꾸는 반전은 관객의 흥미를 돋우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디즈니-픽사가 리얼리즘 예술 영화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흥미 유발 요소는 주요 소비층을 고려했을 때 되레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디즈니-픽사는 반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배신이나 숨겨진 정체를 통해 이해하기 쉬운 선악 구도로 치환한다. 나는 이것을 최선이라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층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게다가 디즈니-픽사는 이 와중에도 의미를 넣기 위해 고민한다.


  <주토피아>의 반전은 부시장 벨웨더가 악당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작은 동물이 받는 차별적 시선을 역 이용하여 본인의 정체를 숨겼다. 누가 이렇게 작은 동물이 만악의 근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반전은 극적 장치에 머물지 않았다. 이전까지 끌고 온 상황을 역으로 제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주제를 곱씹게 만든다. 극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주제를 강화하는 놀라운 설정이었다. 이 정도는 돼야 갓무비라 불릴 만 하다.


  그런데 <코코>의 반전은 다소 엉성하다. 진짜 고조부가 에르네스토가 아니라 헥토라는 지점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에르네스토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무리수다. 에르네스토는 성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한다. 술에 독을 타 친구를 죽인다. 과연 이 서사에서 무슨 의미를 읽을 수 있나? 에르네스토가 무지하게 나쁜 놈이란 것은 분명히 알겠다. 아주 쳐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다. 사실 이미 사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나쁜 놈이라는 것 이외의 의미가 없다. 독살 장면 이후 에르네스토는 성공을 향한 욕망의 주체에서 악당이라는 극적 객체로 몰락한다.


  대립하는 반동 가치가 죽어버리니 가족이라는 주동 가치도 힘을 잃는다. 결론에서 이멜다가 조건 없는 축복을 선사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인물의 심리가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부르짖는 가족애가 공허하게 다가온다. 결국, 이해와 화합은 보여주지만, 그 과정은 얼렁뚱땅 지나친 셈이다. 그 대신 남는 것은 악당을 물리치는 통쾌한 모험담이었다.


  이것이 내가 <코코>를 갓무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