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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셰이프 오브 워터> - 물의 형태 : 사랑의 심상

  얼마 전부터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한 단어가 있다.


  '심상(心像)'


  흔히 시(詩)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다. 보통 '이미지'라는 말이 더 통용되지만, 나는 '심상'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외래어를 피하고픈 목적도 있지만, 이미지라는 단어가 사진 혹은 그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심상. 마음에 맺히는 모양. 시에서는 글을 통해 어떤 심상을 이루는가를 중요하게 따진다. 심상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청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 때로는 둘 이상의 감각이 결합하여 공감각적 심상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로 우리는 '형상 상(像)'을 내세웠다. 인간에게 시각은 이렇게나 지배적이다. 


  그럼 시가 아니라 영화에서 심상을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각 예술이다. 유성 영화가 등장해 청각을 흡수했고, 4D가 등장해 촉각까지 섭렵했으나, 그 시작은 '활동사진'이라는 시각적 기술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심상을 추구한다는 건 시보다 어려운 일이 된다. 이미 시각적 감각이 제공되는 와중에 그것을 초월하는 마음의 상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강렬한 심상을 제공한 영화는 <블랙 스완>이다. 이 작품은 무려 촉각적 심상을 제공한다.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팔에 깃털이 돋아나는 장면에서 나는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짜릿한 소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니나의 왜곡된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이 내 살갗을 어루만지는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이 되어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다. 다시 봐도 전율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블랙 스완>






  그러나 심상을 구현했다고 마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비디오 아트의 한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극예술로 분류한다. 따라서 서사가 탄탄하지 못한 채 심상만 강조하는 작품에 대하여 평단은 이런 평가를 내린다.


  '이미지의 나열'


  

▲<배트맨 v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이 장면에는 슈퍼맨을 정의하는 심상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는 멕시코 명절인 망자의 날에 강림한 구원자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구원할 메시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시고, 최후의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그렇게 잭 스나이더는 슈퍼맨에게 예수님의 심상을 부여했다. 마지막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키며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심상을 투영한다. 그러니깐 관객들이 죽었다고 슬퍼하질 않지 최소한 죽은 지 세 편 이후에 부활하셨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잭 스나이더의 성과물은 '이미지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다. 심상은 분명 선명하다. 그러나 심상에 담긴 것이 너무도 초라하다. 구원자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최소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정도의 고뇌라도 담아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에는 그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 히어로'만 있을 뿐이다. 가볍고 빈약하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명백하다. 서사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21세기 가장 황당한 전개와 개연성을 보여주었던 '마사' 덕분에 영화의 모든 심상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아예 대사를 몽땅 빼버리고 싶다. 애초에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게 지금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나열'이라 비판받지만, 차라리 이미지만 나열하는 게 더 좋았으리라. 사실 그것조차 못하는 감독도 부지기수다. 잭 스나이더는? 이 사람은 '이미지의 나열'에 관해서는 장인이 분명하다. 


▲ 잭 스나이더의 단편 <스노우 스팀 아이언>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원제는 'Shape of water'다. 직역하자면 '물의 형태'다. 품위 있으면서도 세련미까지 겸비한 제목이었다. 그런데 수입사는 여기에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를 박아버렸다. 이렇게 촌스러운 작명이 또 있을까. "사랑의 모양이 모양..."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았을 때 나는 부제의 적절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서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인물 대부분이 평면적이다. 커다란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괴생명체(더그 존스)뿐인데, 변화의 방향만 뚜렷하지, 인물의 한계 때문에 양상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를 입체적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영화 내내 일관된 성격을 보여준다. 깔끔하게 닦아낸 구두와 일상이 되어버린 자위에서 그녀의 욕망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욕구가 폭발할 것 같았던 순간 괴생물체가 등장했을 뿐, 엘라이자는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호기심 많고 착한 사람이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감정과 의미를 함축적인 심상에 담아낸다. 구두를 닦는 손짓에는 억눌린 애욕이 담겨있었다. 버스정류장에 등장한 배불뚝이 아저씨와 풍선 그리고 케이크는 이 영화가 판타지라는 정체성을 선언한다. 리처드(마이클 섀넌)의 사탕에는 성공에 집착하는 남성적 욕망이 담겨있고, 욕실을 어항으로 만드는 장면에는 관계 속으로 가라앉고픈 여성적 욕망이 담겨있다. 악인의 썩어 문드러지는 손가락과 선인의 자라나는 머리머리를 대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심상들이 상영시간 내내 등장하며 내 마음속에 각양각색의 모양을 새겼다. 이야기의 단순함? 그런 것은 문제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는 위대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심상은 바로 엘라이자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서 나는 '사랑의 모양'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아...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에 촉촉이 젖은 눈빛. 그 눈빛은 아름답고 도도한 광채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다."


  웨딩피치의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라는 공격이 핵주먹이었다면, 이 눈빛은 짜르 봄버다. 전 세계 솔로 부대를 몰살시킬 정도로 얄미운 행복감이 느껴진다. '그렇군요. 당신은 사랑하고 있군요. 어쩌라고요?' 이렇게 항변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더 처참할 뿐이다.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 눈빛에 담긴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가페적인 희생도 아니고, 얌전 떠는 플라토닉도 아니다. 관능과 품격이 어우러진 것. 집착과 희생이 공존하는 것. 야하면서 경건한... 이와 비슷한 뒤섞임을 나는 이전에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황금색 환희로 뒤덮인 그림이었다. 


▲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두 남녀가 꽃밭 위에 무릎 꿇고, 남자가 여자의 볼에 입 맞추고 있다. 이 그림은 절대 평화롭지 않다. 여인의 볼을 뜨겁게 감싸 쥐는 손길. 그 뜨거움에 몸부림치듯 묘하게 뒤틀린 여성의 손. 하지만 황홀감에 젖어있는 표정. 두 남녀는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려 한다. 하지만 천박하거나 노골적이지 않다. 성적인 매력이 자지가 아니라 마음을 두드린다. 이것이 클림트가 그려낸 '사랑의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을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도 보았다. 


  어째서 사랑은 관능적이어야 할까? 음모까지 노출하는 영화의 표현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관능적이어야 한다. 사람은 친근한 존재일수록 더 가까운 거리에 접근할 것을 허락한다. 친하지도 않은데 가까이 접근하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친하다면 손을 잡고 포옹하며 그 거리가 0이 될 수 있다. 그럼 사랑은? 사랑은 그 거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다. 너의 속으로 내가 들어가며, 나의 속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를 침범하며 혀를 섞고, 몸을 섞어 마침내 한 몸으로 연결되는 일이다.


  그러나 마냥 관능적이어서는 안 된다. 관능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기가 된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맘대로 다룰 수 있는 매력이 된다. 사랑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다. 나를 굴복시키는 일이다. 너를 위해 나를 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관능을 드러내선 안 된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드러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욕망은 천박해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의 양면적 모양을 클림트는 황금색 찬란함 위에 수놓았고, 기예르모 델 토로는 초록빛 물속에 풀어놓았다. 색은 다르지만, 둘은 똑같은 심상을 보여준다. 바로 사랑의 모양이다. 그래서 수입사의 촌스러운 부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내 가슴 속에 또렷하게 사랑의 모양을 새겨넣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기에, 나는 현학적 허세를 발휘하여 좀 더 있어 보이는 부제를 내세우고 싶다. 


  <물의 형태 : 사랑의 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