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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내 안의 너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시작을 따지자면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집 대문에 새로 오픈한 피자집 전단이 붙어있었다. 오픈 기념. 피자를 시키면 치킨이 공짜. 나는 뭐에 홀렸었나 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네. 만 팔천 원입니다. 아뿔싸. 돈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비자금에서 한 장. 내 비상금에서 한 장. 그렇게 혼자서 피자 한 판과 치킨 한 마리를 꿀꺽했다.


  지독한 장염에 걸렸다. 초등 6년 개근상에 빛나던 내가 생애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아픔은 문제가 아니었다. 오분이 멀다고 설사가 나오느라 문밖으로 다섯 걸음도 나설 수 없었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변기 위로 달려가 뿌지지지쪼로로록퍝촵 기묘한 관악기를 연주해야 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고 계속 변기에 앉아있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병원에 가려고 했다. 팬티에만 찔끔 지리고 집에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이틀을 변기에 붙어 지내고 겨우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의사는 약을 지어 줄 테이 한동안 죽만 먹으라 했다. 그러나 처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침부터 밤까지 가게를 하셨다. 혼자 남은 아이를 감시할 사람이 없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죽을 끓여 주셨지만, 원래 애들은 부모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아이는 귀찮다며 학교에 죽을 싸가지 않았고, 급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설사가 도졌다. 다시 이틀 동안 우렁찬 트럼펫 특훈을 마치고 겨우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최후통첩을 날렸다. 장염이 우스워요? 말 안 들으면 너 죽을 수도 있어요. 나는 약도 잘 챙겨 먹고, 죽도 군말 없이 먹었다. 그러나 장은 예전처럼 튼튼할 수 없었다. 긴장하면 설사하고, 술 마시면 설사하고, 매운 거 먹어도 설사하고... 이게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2주 전이었다. 면접 결과를 기다리느라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기였다. 액정에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떠올랐다. 이민경. 왜 너의 이름은 매번 깜빡이도 없이 내 삶으로 끼어드는 걸까?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받아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받자니 껄끄럽고 안 받자니 구차했다. 벨 소리는 그런 나를 재촉하듯 삘릴리리리 후음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 울렸다. 나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여보세요?"


  "지후야 안녕?"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발랄하고 친근하게 안녕이라 말하면 내 가슴이 무너지는데.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걸까?


  "글쎄. 안녕하고 있는 거... 랄까?"


  "크크크 그게 뭐야. 너 여전하구나?"


  그녀의 재잘거리는 웃음에 가슴은 또 무너졌다.


  "무슨 일이냐?"


  나는 의연한 척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은 아니고.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너에게 가는 길은 결코 없을 줄 알았다. 네가 나를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를 만나기 위해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태원에서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덥수룩한 머리를 깔끔히 자르고 파마도 했다. 옷이 문제였다. 정장을 입자니 부담스럽고 캐주얼을 입자니 없어 보였다. 적당한 세미 정장을 한 벌 샀다. 그나마 멀쩡한 코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활비 빼고 근근이 모아 온 알바비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저 너를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그냥 얼굴만 보면 되는데 뭐하러 이런 데까지 왔어."


  민경이는 부담스럽다는 듯 손사래 쳤다. 그러나 차림새는 말과 달랐다. 목둘레선을 따라 훤히 드러난 쇄골은 관능적이었고, 선 끝에서 어깨를 감싸 쥔 자태는 단아했다. 허리를 따라 떨어지는 맵시는 우아했고, 그 아래 펼쳐진 스커트는 발랄했다. 완벽한 블랙 미니 원피스. 그리고 이를 완벽히 소화하는 너. 코트를 받아 든 웨이터도 넋이 나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만반의 준비를 한 걸까? 예감이 좋았다.


  내가 민경이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잘 먹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남자가 봐도 대식가였다. 나도 어디서 꿇리지 않는 편이라 둘이 만나면 4인분은 거뜬히 먹었다. 오늘도 우리는 썰어라 부어라 지화자 맛좋고 얼씨구 신나게 음식을 흡입했다. 웨이터는 이번에도 넋이 나가 보였다.


  식사를 마칠 때가 되자 우리는 서로를 응시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와인을 머금고 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글래스에 담긴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새하얀 목선이 드러났다. 그대로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지금 내 가슴 훔쳐봤지?"


  글래스를 내려놓은 그녀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어? 뭐?"


  나는 당황한 나머지 응시할 수 있는 먼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 돌리는 거 봐라. 맞나 보네? 너 애가 왜 이렇게 엉큼하냐?"


  "아니야. 가슴 아니고 목선 봤어. 진짜야."


  "그거나, 그거나 엉큼하긴 매한가지 같은데?"


  "아니... 그게... 저..."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술기운이 귀밑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는 깔깔깔 아줌마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저리도 해맑을까. 벌써 서른을 넘긴 지가 몇 해인데.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용기가 솟았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다시 말하자. 나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나 결혼해."


  들이쉰 숨을 뱉지 못해 숨이 턱 막혀버렸다.


  "놀랐지? 나도 놀랐어. 내가 결혼하게 될 줄이야."


  "추... 축하해."


  감흥 없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 사람이야. 내 신랑."


  그녀의 핸드폰에는 머리가 살짝 벗겨진 못생긴 아저씨가 있었다.


  "이래 봬도 나랑 겨우 두 살 차이야. 머리가 벗어져서 그렇지, 생각보다 젊어."


  "아니, 뭐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도 신기하지? 내가 이런 사람하고 결혼하다니? 나 외모 엄청 따지는 거 너도 알잖아."


  "잘 알지."


  그게 내가 거부당한 이유였으니까.


  "그때는 욕도 많이 먹었지. 너도 알지? 내 별명..."


  나는 차마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욕먹을 만 하지. 내가 학교 다닐 때 사귄 사람이 10명도 넘을걸? 게다가 하나같이 잘생겼으니. 나한테 뺏겼다고 울분을 토한 애들이 한둘이었겠니. 나랑 사귀어 보겠다고 여자친구도 버리고 온 애도 많았고. 내가 저주받았어도 할 말 없지."


  "그게 뭐가 나쁘냐. 네가 양다리 걸친 것도 아니고. 네가 먼저 꼬신 적도 없잖아."


  "얼마나 정당한지는 상관없어. 빼앗기면 화가 나고, 빼앗으면 욕을 먹는 법이야."


  "욕하는 쪽이 뭘 모르니깐 그러는 거지. 널 그딴 식으로 부를 자격은 아무한테도 없었어."


  "그치만 나 사귀었던 애들하고 전부 잤는걸."


  가슴에서 술기운이 울컥하고 솟았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게 뭐 잘못이야?"


  "잘못이라더라. 하긴 나한테 몹쓸 짓이긴 했지. 병원비 많이 깨졌거든."


  "너 애도 지웠어?"


  "으이그. 너 설마 아직도 모솔이냐? 낙태 아니어도 산부인과 갈 일은 많거든?"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어쩌라고. 도대체 이제 와서


  "왜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거야? 내 심정 몰라? 일부러 그러는 거야?"


  "미안해서 그런다. 미안해서..."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내가 왜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도리 지었다.


  "이 사람 우리 회사 과장이야. 지금은 부서가 다르지만, 작년까지는 내 상급자였어. 뭐랄까... 쑥맥 같은 사람이야. 내가 좀 친한 척이 심하잖아? 그래서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대. 처음 고백받았을 때 진짜 난감하더라. '우리 서로 좋아한다면 사귀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이렇게 말했어. 그래서 '아닌데요?' 하고 차버렸지. 그런데 이 남자 포기를 안 하더라. 별의별 핑계를 대면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거야. 우연히 표를 얻었는데, 이벤트에 당첨됐는데, 아는 사람이 식당을 오픈했는데... 그런 식으로 매주 들이대더라고. 그러다 몇 번은 같이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랬어. 정말 보고 싶은 티켓을 구해오는 데 안 넘어갈 수가 없더라."


  "그래서 왜 그 사람인데?"


  그녀가 목을 쭉 빼고는 중간을 가리켰다. 파묻히고 싶었던 그 자리였다.


  "이거 보여? 주름진 거? 예전에는 나 클럽 가면 줄도 안 섰어. 이제는 아무리 알짱거려도 얄짤없더라. 나도 늙더라고. 너는 남자라 몰라.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렇다고 네가 저런 대머리랑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대머리 아니야. 그이는 내 취향을 나보다 잘 알아. 눈빛만 보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해. 작년 여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 내가 점심을 밖에서 먹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거야. 우산이 없어 발만 구르는데 그이가 우산을 들고 나타난 거야. 처음엔 막 화냈지. 내가 여깄는 거 어찌 알았냐고. 이런 거 스토킹이라고. 그냥 우산만 주고 말없이 가더라. 그래서 점심시간에 뭐했나 알아보니깐. 그냥 평범하게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수다 떨고 그랬더라. 그러다 비 쏟아지니깐 우산 들고 나갔데. 그리고는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낸 거야. 마치 내가 그 식당에 갈 줄 알았다는 듯이."


  "그래서 뭐야. 천생연분이라는 거야?"


  "응. 천생연분인가 봐. 처음에는 두근거리지도 않았는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두근거리더라고. 처음에는 이런 감정도 부정했어. 내가 왜 저딴 대머리 때문에 콩닥대나 싶었거든. 그러다 어느 순간 거울을 봤는데, 이제는 잘생긴 사람보다 통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더라고."


  "잘됐네. 좋은 사람 만나서."


  "그래서 이 사람한테 사귀자고 말하는데. 너무 감격하더라. 나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어."


  나도 그렇게 좋아할 수 있었다. 네가 허락해주었다면.


  "그래서 여차저차 하다 보니깐 결혼하게 됐네. 그런데 청첩장 쓰려고 보니 대학 친구 중에 쓸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 다들 날 죽일 년 취급할 때 너만 날 사람 취급해줬으니깐. 심지어 고백했다 차였으면서도. 그런데 너한테 청첩장 보내기가 너무 미안한 거야. 너도 내가 사귀자고 했으면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을 텐데. 내가 싫다고만 하고. 밀어내기만 하고..."


  그녀는 목이 메는지 와인을 따라 쭈욱 들이켰다.


  "염치없이 축의금 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대신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싶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려왔다.


  "아이참. 나쁜 년은 난데 왜 내가 눈물이 나냐."


  그녀는 입을 감싸 쥐고 일어섰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는 나를 돌아보더니 손바닥을 펴 보이고 나가버렸다. 나는 1/3쯤 남은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머리를 쥐어 싸고 있었다.


  "부르르르르륵."


  아랫배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부르럭득버브브븍."


  사람 몸에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장 어딘가에 아공간으로 통하는 포털이 열린 게 아닐까? 나는 기사님께 사정했다. 아저씨 저 급합니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안 그러면 저 싸요. 기사는 식겁한 표정으로 냅다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길 건너에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는 데 100년은 걸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오갔다. 오늘 긴장했나? 과식한 건가? 고작 와인 몇 잔에 이러는 건가? 신호등이 바뀌었지만, 나는 달릴 수 없었다. 잘못했다간 당장이라도 분출할 것 같았다. 호흡으로 간신히 활화산을 제어하며 걷지도 뛰지도 못한 채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 화장실은 잠겨 있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런 외딴곳에 사람이 없을 거라는 치밀한 예상 따위는 없었다. 그저 급했다. 화장실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의 공중화장실은 얼어붙을 정도로 적막했다. 진짜로 얼었는지도 모른다. 요 며칠 극심한 한파로 오밤중에는 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떨어지기가 다반사였다.


  나는 아무 곳으로 들어가 바지를 벗고 양변기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푸드럽첩첩푸다다다다다팥챹타."


  지옥의 구덩이가 있다면 이런 소리가 올라오지 않을까.


  "파라라랏촵쪼르르르르쀼슛."


  기체와 액체와 고체가 서로 경쟁하듯 뿜어나왔다. 크게 쏟아내고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그 상태로 영하 15도에 맨살을 내놓으니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어서 빨리 기묘한 나팔 연주가 끝나기를 바랐다.


  "브루룹뿌뿌르르르삐료로롱."


  5분을 더 쏟아내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그제사 고개를 들어보니. 아뿔싸, 화장지가 없었다. 하긴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누구 없냐고 외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젠장. 여자 화장실이다.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수가 없었다. 구두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양말도 새로 산 거였다. 나는 꼬릿한 냄새가 나는 면 50%, 나이롱 50%짜리 천을 고이 접어 뒤춤으로 향했다.


  덜컥.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덜컥. 덜컥. 이럴 수가. 변기 커버가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아마도 땀이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아니 XX 이게 뭐야. 왜 내 인생은 XX 이렇게 X 같은 거야. 내가 얼마나 더 불쌍해져야 속이 후련하냐 이 개 X 같은 XX야!"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강제로 일어섰다. 한참 동안 나를 붙잡던 변기는 끝내 나의 완력에 굴복했다. 변기가 나를 놓아주자 몸이 튕겨 나갔다. 문은 부서졌고, 나는 그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완력 싸움에서 승리한 엉덩이에는 얼어붙은 변기 커버가 전리품처럼 자랑스레 달려있었다.


  양말의 고귀한 희생 덕에 어찌어찌 뒤는 닦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커버는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팬티조차 입지 못한 채 여자 화장실 정중앙에서 변기 커버를 떼려고 낑낑댔다. 그러나 변기 커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주저앉았다. 조그만 창문으로 얼어붙은 달빛이 쏟아졌다. 그 처연한 은백색 한기를 바라보니 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추위에 눈물샘까지 터지니 콧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너무 서러워 그만 소리 내 울고 말았다.






  그때였다. 끼이익. 화장실 출입문이 음산한 소리를 토했다. 등줄기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안 된다. 제발. 들어오지마.


  "누구 계십니까?"


  안 돼. 여자였다. 하긴 여긴 여자 화장실이니까. 나는 그대로 일어서고 싶었으나, 커버가 타일에 미끄러져 일어설 수 없었다. 급한 대로 몸을 휙 돌아 엎어졌다. 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날카로운 냉기가 고추를 찔러댔다. 고통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대는 그 소릴 듣더니


  "괜찮아요?"


  하고는 손전등을 비추었다. 신음이 아니라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아. 잔인한 사람. 도대체 왜 손전등을?


  "당신 뭐야? 변태야?"


  상대가 코앞까지 오자 경찰임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끝장이구나. 내 인생. 후회는 없었다...


  "대답해. 너, 뭐 하는 놈이야?"






  살다 보면 억울하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다. 나쁜 년이 아닌데 욕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설명해야만 한다. 단지, 당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지금 여자 화장실에서 고추를 내놓고, 변기 커버를 엉덩이에 붙인 채, 바닥에 엎어져 있다. 그러니깐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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