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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계륵


  탁자에는 큼지막한 닭이 잘 삶아져 놓여 있다. 국물은 뽀얗고 맑았으며 파와 마늘의 향이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닭 껍질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커다란 다리를 그대로 떼어 소금을 찍어 입안 가득 베어 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위왕은 입맛이 없었다. 골치가 아팠다. 그의 한숨이 백숙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흩트려놓았다.


  출정할 때만 해도 그의 기분은 상쾌했다. 얼마만의 전장인가! 수도에서 격무와 아첨에 시달리던 위왕은 전선이 그리웠다. 창과 검에서 풍기는 쇠 냄새를 맡고 싶었다. 피가 튀기고 뇌수와 장기가 쏟아지는 참혹한 광경이 보고팠다. 묘재의 죽음은 그저 핑계였다. 유능한 부하를 잃은 슬픔보다 직접 나설 명분이 반가운 위왕이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뻐근해지는 동작대를 벗어나자 해방감을 느끼는 위왕이었다. 그를 괴롭히던 오랜 두통도 출정과 함께 씻은 듯이 사라졌다. 

  게다가 그 상대가 무려 유비였다. 유비를 쳐부술 생각에 위왕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두근거렸다. 위왕이 유비를 높이 산 것은 아니다. 사실 위왕이 인정하는 인물은 관우 한 사람뿐이었다. 기다란 수염에 붉은 얼굴을 하고 커다란 언월도를 휘두르던 모습을 위왕은 진심으로 존경했다. 아니 부러워했다. 지금이 세월이 되고, 세월이 역사가 되었을 때 자신이 결코 차지할 수 없는 광명을 누릴 그가 부러웠다. 그러나 유비는... 유비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량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그저 하나의 가치를 내세웠을 뿐이다. 반(反) 조조. 그러나 이 가치를 내세웠다는 것만으로 유비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조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사랑했다. 그렇게 유비는 조조의 그림자를 양분 삼아 거물이 되었다. 조조가 빛이라면 유비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세상은 유비를 빛이라 하고 조조를 그림자 취급했다. 그래서 더더욱 유비를 꺾고 싶었다. 반 조조의 가치를 격퇴하고 싶었다. 조조의 사상이 파격을 넘어 정의가 되기 위해서는 유비라는 존재를 넘어야 했다. 그 결전의 장소가 서쪽의 한중에 있었다. 위왕은 이 대결을 몹시 기대하는 나머지 행군 도중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전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미 한 번 정복한 곳이라고 방심했던 탓일까? 아니다. 이곳은 한 번 정복한 한중이 아니었다. 장로의 한중과 유비의 한중은 전혀 달랐다. 묘재의 목숨을 앗아간 적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각지에서 패배의 소식만 들려왔다. 보급마저 약탈당했다. 한중의 코앞까지 진격했던 위군은 양평관으로 퇴각했고, 그마저도 포위당해 야곡산까지 밀려났다.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유비를 꺾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면 반 조조의 가치도 인정하게 된다. 역적을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셈이다. 위왕은 골치가 아팠다. 입맛이 없었다. 먹음직스런 닭백숙도 깨작거릴 뿐이었다.

  그때 밖에서 내관이 외쳤다.
  "전하, 하후돈 장군이 왔습니다."
  "들라 하라."
  "전하,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자시(子時, 23:00~01:00)가 다 되었습니다. 새로운 암구호를 정해야 합니다."
  "원양, 그대는 이 전투를 어찌 생각하는가?"
  "장수는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게 장수입니다."
  "한중 땅이 위국에 필요하다 보는가?"
  "그런 것은 잘 모르옵니다. 정치는 글쟁이들에게 물으시지요."
  "그럼 그대는 무엇을 위해 이 싸움을 하는가?"
  "묘재의 원한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묘재를 기리기 위해 저 많은 병사를 죽여도 되는가?"
  "그건 아니옵니다. 묘재의 목숨은 위왕 전하를 위한 것입니다. 묘재를 기리자고 나라를 위험하게 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한중을 차지해야 한단 말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촉은 전화에 휩싸였던 적이 없습니다. 중원이 피폐해져 갈 때 풍요로움을 착실하게 쌓아온 곳입니다. 적군의 손에 헐값에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정치는 잘 모른다더니, 웬만한 글쟁이들보다 낫구려."
  "그저 흘려 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촉은 험준한 곳이네. 아무리 풍요롭다 한들 중원에 비할 바가 못 되지. 길어야 30년일세. 30년이 지나면 촉의 풍요로움은 중원의 풍요로움을 따라올 수 없을 걸세."
  "30년이라니요. 천하 통일의 위업을 후대에 넘기려고 하십니까?"
  "나는 한(漢)의 신하다. 천하 통일은 내가 이뤄야 할 업적이 아니네. 이 말을 다시 꺼내게 하지 말도록."
  "그렇다면... 촉을 그냥 놔두면 되지 않습니까?"
  "땅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그 땅의 사람이겠지..."
  "..."
  "이 전투의 목적은 촉이 아니네. 노려야 할 것은 유비의 목이지."
  "유비의 목에 20만 병사의 값어치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
  "..."
  "허허. 역시 웬만한 글쟁이보다 낫구려."
  "송구하옵니다. 신이 입을 함부로 놀렸사옵니다."
  위왕은 백숙을 뒤적이다 나지막이 혼잣말을 되뇌었다.
  "... 계륵... 계륵인가..."
  이 말을 들은 하후돈은 눈썹을 찌푸렸다.
  "전하..."
  "지금 나눈 대화는 잊게."
  "...알겠사옵니다. 그럼 암구호는 뭐라 하시겠습니까?"
  "계륵. 이 외에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위왕의 천막을 나선 하후돈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묘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전하께서는 뭐라 하시던가요?"
  불쑥 양수가 하후돈의 상념을 끊었다. 
  "별 말씀 없으셨소."
  "긴 시간을 함께 하셨던 것 같은데요."
  "아무 말씀 없었다 했소."
  하후돈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를 지켜보던 양수는 똑똑함이 넘쳐흐르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암구호는 뭐로 정하셨습니까?"
  "계륵이라 하셨소. 그럼 이만..."
  속내를 들킨 불쾌함에 하후돈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양수는 하후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계륵이라... 한중은 버릴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셈인가. 가서 짐을 챙겨야겠구먼. 태워야 할 문서도 많고. 전장은 이래저래 귀찮은 곳이야."

  양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막사를 활보했다. 그러나 표정에는 짐짓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전쟁의 규모가 커질수록 계략은 빛을 잃는다. 대신 보급, 군량, 행군 같은 단순한 요소들이 중요해진다. 천으로는 만을 무찌를 수 있지만, 십만으로 백만을 무찌르기는 어렵다. 양수의 지략은 단순한 업무를 보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그는 한중 전투에서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없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양수는 처소까지 가는 동안 장수들의 천막을 기웃거렸다. 고요한 야밤의 야영지에서 양수가 지나는 곳만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퇴각한다."
  다음 날 위왕은 아침 일찍 회의를 열고 퇴각을 명령했다. 이에 반발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반론을 내놓지 않는 점이 위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못내 아쉽다고 생각한 것은 위왕 뿐인 듯하다. 패기 없는 신하들의 모습에 두통이 도지기 시작했다. 위왕은 해산을 명하지도 않고 회의장을 나섰다. 불쾌한 마음에 내관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런데 의아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영지 드문드문 천막이 비어있었다.
  "내관. 저기 천막이 비어있는 곳의 지휘관을 불러라."
  잠시 후 누군지도 모를 장수가 잔뜩 얼어붙은 채 등장했다. 
  "자네 군영은 왜 천막이 걷어져 있지?"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난밤 양수 군사가 이르길 내일 철수할 것이니 미리 준비하라 하였사옵니다."
  위왕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옷이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패배는 인정하는 것보다 들켰을 때 더욱 화가 나는 법이다. 위왕의 눈앞에 양수의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양수를 대령해라."
  퇴각은 잠시 미뤄졌다. 위왕은 야전 단상 위에 앉아 양수를 내려다보았다. 양수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하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무대신들은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하후돈만이 불쾌함과 근심이 섞인 표정으로 양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양수를 노려보던 위왕이 입을 열었다.
  "양수..."
  그러자 양수가 고개를 들어 위왕을 바라보았다. 똑똑함이 양수의 눈동자에 초롱초롱 박혀있었다. 자신의 재능에 자신 있는 자만이 갖는 당당함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위왕은 그 총명함에 더욱 기분이 상했다. 위왕의 표정에 불쾌함이 배어 나왔다. 그러자 위왕을 바라보던 양수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함으로, 다음에는 깨달음으로, 마지막에는 공포가 드리웠다. 그의 뛰어난 두뇌는 이 모든 변화를 찰나의 순간에 얼굴에 펼쳐놓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위왕은 차갑게 외칠 뿐이었다.
  "저자의 목을 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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