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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어린왕자가 말했다. "꿈을 잊지 말아요."

  지난해 말 나에게 트로피가 하나 배송되었다.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자랑스러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백수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수상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다. 트로피가 배송되고 나서야 이런 상을 받았다고 짧게 말씀드릴 뿐이었다. 다행히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트로피를 보여드리면서도 뭐하는 짓이냐는 꾸지람을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자랑스러워할 일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은 나 자신을 자괴감에 빠뜨렸다. 나는 지난 1년간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PGR인이라면 게임중독에 대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게임에 중독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게임에 옹호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게임중독이란 현실도피의 수단 중 하나라고 말한다. 게임은 현실에 비해 빠르고 분명하게 노력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삶일수록 보상과 칭찬이 더욱 그리운 법이다. 나는 게임에 과몰입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쩌면 나는 게임이 아니라 PGR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백수. 이제는 입사지원서를 넣는 것조차 의미 없을 나이. 기약 없는 합격을 바라며 골방에 박혀 시험공부 하는 30대. 그런 나에게 PGR은 아주 매력적인 현실 도피처이다. 이곳에선 사람들이 나의 글을 봐준다. 게다가 잘했다고 칭찬도 해준다. 추천을 받고, 추천 게시판에 오른다. 현실의 나는 한심한 놈이지만, PGR에서 나는 꽤 쓸모있는 사람 같았다. 그럴수록 현실은 두려운 곳이 되어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PGR에 침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처럼...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자 만사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처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트로피 사진과 함께 감사한다는 글을 쓰려 했지만, 막상 트로피를 받을 때쯤에는 그것조차 두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우울함이 더욱 심해져 매주 한 편씩 보던 영화마저 보지 않았다. 글쓰기도 자연스레 내려놓았다. 다행히 새해가 되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타란티노와 이냐리투의 신작이 개봉한 덕에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도 개운치 않았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내가 글을 올리고, 독자를 갖고자 하는 이 모든 행위가 그저 현실 도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트로피는 그 현실 도피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진열해둔 트로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트로피는 내 잉여로움의 부산물이자 1년간의 도피 생활을 자랑스럽게 뽐내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오늘 애니메이션을 한 편 보았다. 먼저 영화를 보자고 한 적이 없었던 여자친구가 새삼스레 같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며 나를 극장으로 불러내었다. 그 작품은 바로 <어린왕자>였다. 몇 달 전부터 보러 가겠다고 계획한 작품이었으나 막상 개봉했을 때는 자괴감에 빠져 외면했던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주요 개봉관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여자친구도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기에 마지막 기회를 함께하고자 나를 불렀다고 했다. 


  개봉 전에는 몹시 기대하던 작품이었지만, 개봉 후 여기저기서 보이는 날카로운 비판을 보며 속으로 내심 '그래, 안 보길 잘한 거여.' 라며 위안을 삼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난 <어린왕자>는 꽤 좋은 작품이었다. 비록 아동층에 특화된 측면이 있지만, 성인이 보기에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여자친구에게, 우리 둘에게 의미 있는 반향을 불러온 아주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불러온 반향을 적어보려 한다. 작품 속에는 가슴을 울리는 대사가 많이 있었지만, 나를 사로잡았던 대사는 바로 이것이었다.

▲ "어른이 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어린 시절을 잊는 게 문제지."


  어린 시절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꿈을 잊지 않는다는 말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생각이 들었던 순간 내가 1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지난 1년간 현실 도피를 해왔던 게 아니었다. 나는 꿈을 좇았던 것이다. 비록 꿈이 현실로 바뀌면서 내 영향력의 한계와 보잘것없는 능력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은 나를 좌절시키진 않았다. 부족한 것은 노력으로 채우고 극복하면 된다. 그런 게 꿈을 좇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해서 징징대다가 그만 꿈을 현실 도피로 왜곡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중2병 걸린 것처럼 자괴감에 빠져 골골댔다. '올해의 PGR인 트로피'는 현실 도피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1년 동안 내 꿈을 열심히 좇았다는 증거이자 그 일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는 훈장이었다.

  처음 글을 쓸 때의 초심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때는 그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던 것뿐이었다. 아마 나는 초심을 잃었던 것 같다. 현실의 음울함에 더 많은 보상, 현실적인 보상 따위를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밥벌이도 못 하는 주제에 욕심에 눈만 먼 어른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어린왕자> 덕분에 초심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내 꿈을 좇고 있다. 그 수준이 하찮을지언정 그 행위 자체는 어떤 것보다 고결할 것이다. 

  꿈을 못 이룬 사람이라도 다 같지는 않다. 꿈을 포기한 사람과 여전히 꿈을 좇는 사람이 있다. 
  꿈을 잊지 말자. 내가 무엇이 되건 혹은 무엇이 못 되건 꿈을 잊지 말자.






※ 이 글을 빌어 저를 뽑아주신 많은 분들과 PGR 운영진 여러분 그리고 모든 PGR 유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트로피는 제가 꿈을 좇고 있음을 알려주는 자랑스럽고 소중한 증거로 여기겠습니다. 제가 꿈을 향해 저를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저를 격려하고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