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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남자들이 다 그렇진 않아

우리동네에는 프린터 as를 하시는 사장님이 계신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고장나면 내가 직접 고치면 되기 때문에 이 분께 수리를 맡긴적은 없지만, 잉크 충전도 하시기 때문에 종종 찾아뵙는 분이다. 때문에 내 휴대전화에는 '잉크사장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가 저장되어있다. 혹시나 출장중일수도 있으니 찾아가기 전에 전화를 드리기 위함이다.

검정잉크가 떨어진지 꽤 되었지만 귀차니즘에 차일피일 미루다 인쇄할 일이 많아져 충전하러 가야겠다는 크나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리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네~ 지금 찾아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신다. 평소에는 이런 방문은 당연히 혼자서 하겠지만, 오늘은 여친과 동행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어서오세요."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으신다. 

잉크 충전은 시간이 오래걸리는 작업은 아니지만 담소를 나눌 정도의 시간은 충분한 일이다.
"사장님 덕에 잉크충전 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물론 멀리 안 나갈 수 있어서라는 말은 뺀다.
"프린터 회사 카트리지 상술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다니까요."
그러자 상당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과자만 하겠어요? 과자를 파는 건지, 포장지를 파는 건지..."
'창렬'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기업들이 국민을 호구로 안다니깐. 그런데도 정부는 법인세는 절대 안 건드릴려고 한다니깐요. 법인세도 높은 게 아니에요. 실질세율은 10%대 밖에 안 되거든."
나이 많으신 어르신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의외였다.
"그런 식으로 세금 거둬다가 엄한데나 쓰고, 자원외교 한다고 돈 버리고, 강 바닥에 버리고 언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요? 이게 다 이명박 때 이렇게 된 거거든. 그런데 지금 정권은 또 그때 여당이잖아. 그러니깐 젊은 사람들도 정치 관심 갖고 꼭 투표하고 그래야되요."
사장님 시선을 보니 내가 아니라 여친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친과 함께 오니 관심이 가시는가 보다. 오늘따라 말씀을 많이 하신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안주하지 말아야 돼요. 나 봐. 환갑먹었어도 지금도 공부하고 있잖아. 기사자격증 공부한다니깐요. 나 자격증들 전부 한번에 땄어요. 이번에는 전기기사 1차 붙고, 2차 준비중이거든. 이것도 한 번에 딸거야."
그제서야 바라본 사장님 책상에는 두꺼운책과 그 아래 손바닥만한 수첩에 빼곡한 필기가 적혀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 처럼 공부 안해요. 보통 남자들 돈 생기면 말이죠, 술마시고 여자끼고 놀고 이런데다 돈 다 써버린다니깐."
"사장님. 저는 절대 안 그래요."
"에이 모르지 그건. 취직하고 돈 벌고 그러면 딴 생각하게 되어있다니깐. 여자분 명심해요. 남자들은 다 똑같애. 다 짐승이라니깐. 유흥업소 안 다니는 남자는 하나도 없어요."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의 방향이 위험해졌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

"자! 다 됐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셨다는 생각이 없으신듯,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신다. 가게를 나오자 여자친구가 말했다.
"사장님 참 좋은 분인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좋은 말도 해주시고. 존경스러운데?"
"그치? 저 사장님 참 좋은 분이야. 카트리지도 잘 봐주시고. 그치만 난 그런 유흥같은 거 안해;;;"
"사장님은 아니라던데? 크크"
아... 뭔가 말린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정말 남자들은 다 그런걸까? 하긴 우리나라의 밤문화는 생각보다 보편화되어있다. 근래 1~2년 사이 취업한 후배들이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를 서스럼없이 하는 걸 보며 많이 놀랐던 게 사실이다. 입대전에는 북창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놀랐던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쁘고 몸매 좋은 여자가 정말 많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하룻밤에 유흥비로 쓰는 돈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이런 퇴폐적인 밤문화가 만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들이 다 짐승이라 그런걸까? 물론 그런 곳을 즐겨찾는 남자들의 도덕성에도 문제는 있겠지만, 그런 곳 말고는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있다. 대학시절 한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 수업받는 녀석들, 특히 남자놈들은 나중에 꼭 취미생활을 갖도록 해요. 나중에 취직하고 돈 남아돌면 그거 가지고 술마시고 여자끼고 그런다니깐. 너희가 생각해봐. 내 나이 먹고 여기 수업들을만한 여자애들 끼고 히히덕거리면 그것 만큼 꼴불견이 없어요. 그래서 나도 남는 시간에 악기 배우고, 공부하고 그러는 거야."
70~80시절 대학가는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고 학생운동에 힘써야 했다. 올바른 즐길거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이 사회로 나와 버블호황을 맞이했을때 유흥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x세대 이후 다양한 문화가 꽃피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비록 요즘에는 초식남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여색을 좇기보다 취미생활에 돈을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니 나는 유흥같은 거 안한다 이거야. 대신 취미활동을 하겠지. 그러니깐 걱정 안해도 돼."
결국 이렇게 여친을 안심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 자기는 무슨 취미를 할건데?"
"음... 게임?"
"...."
"아니 왜? 전에도 말했지만 게임만큼 경제적이고 안전한 취미가 없다니깐?"
그러나 여친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하다. 역시 게임하면서 칭찬듣는 것 까지는 좀 무리였나 싶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