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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야하게 쓴 글


  먼저 이 글을 읽을 씽큐베이션 멤버들에게 양해의 말씀을 구한다. 나는 씽큐베이터로서 (우리는 그룹장을 씽큐베이터라고 부른다. 생각을 키워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가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름쯤이야 폼나게 붙여도 되지 않은가?) 이번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부탁했다.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노력할 것인지 적어주세요."


  이러한 주제의 글이라면, 보통 독자는 '보고서' 같은 내용을 예상한다.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어떻게 글쓰기를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그 체계적인 포부를 기대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기대를 조금은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게 다 스티븐 킹 때문이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흥미진진했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유혹하는 글쓰기>는 훌륭한 글쓰기 교재다. 하지만 글쓰기 교재 그 이상의 매력을 품고 있다. 마치 소설을 보는 것처럼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 책을 보는 내 모습은 대학생 형으로부터 첫 경험 이야기를 듣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다 듣고 나면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조차,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스티븐 킹의 글발은 대단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스티븐 킹처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나의 실력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요약정리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씽큐베이터의 '글쓰기 마스터 플랜'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도 배신은 조금만 하려고 한다. 수필처럼 써 내려갈 이 글에서 '글쟁이 윤 PD'의 다짐을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글쓰기 철학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대통령의 글쓰기>, <유혹하는 글쓰기>의 저자 유시민, 강원국, 스티븐 킹을 숲이라고 생각해보자. 유시민은 곧게 뻗은 대나무 숲이다. 강원국의 숲에는 운치있게 휘어진 소나무가 가득하다. 스티븐 킹은? 이 숲에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엔트'(말하고 걸어다니는 거대한 나무 정령)들이 살고 있다. 각 숲을 채우는 나무들은 개성이 넘친다. 구체적인 지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노하우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면 어쩐지 비슷해 보인다. 세 사람 모두 휘황찬란한 느낌은 아니었다. 담백하면서도 강단있는 글을 추구했다. 무엇보다 쉽게 쓰라고 주문한다.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 철학과 완벽히 일치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다. 글쓰기 대회에서 곧잘 상도 탔고, 국어 점수도 언제나 상위권이었다. 사실 모든 과목이 상위권이었다. 나는 공부를 좀 하는 놈이었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글쟁이는 돈을 못 벌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자였다면 돈 생각 안 하고 꿈을 좇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장래 희망에 '작가'를 적어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집은 서러울 정도로 가난하진 않았지만, 창피할 만큼은 가난했다. 나는 돈도 많이 벌고, 취업도 잘 되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이공계로 진학했다. 그즈음에 내 글쓰기 소질은 일종의 보너스일 뿐이었다. 


  나는 좋은 대학에 떡하니 합격한다. 그리고 공부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생각해보면 참 몹쓸 짓이다. 길게는 12년, 짧게는 3년 동안 어린아이에게 수도승 같은 꽉 막힌 생활을 강요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나는 고삐가 풀려버렸고, 흥청망청 대학 생활을 즐겼다. 그 와중에도 글쓰기 소질은 쏠쏠한 보너스를 제공했다. 전공과목에서 쌍권총(F가 2개)을 장만한 1학년 2학기. 나는 글쓰기 과목에서 A+를 받은 덕분에 학사 경고를 면할 수 있었다. 아마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 글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나는 글도 좋아하지만, 영화를 더 좋아한다. <EBS 시네마 천국>이나 <MBC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빠지지 않고 시청했다. 종종 평론가들의 영화 비평도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평론가들은 실존이니 욕망이니 어려운 개념을 즐겨 사용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개념을 더 어렵게 만드는 장황한 문장도 애용했다. 그때는 그런 평론가들이 어딘가 멋있게 느껴졌다. 


  제일 어려운 것은 정신분석학이었다. 서양 철학은 어느 정도 교양서를 찾아보며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융과 라캉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감을 잡은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관련 수업을 들을 수도 없고, 읽을만한 책을 찾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내 식견이 모자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수강한 심리학 수업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은 커녕 과학도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나마 인정할 여지가 있지만, 융이나 라캉은 반증할 수 없는 이론을 주장했기에 과학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학문도 해석보다는 실험과 통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를 읽어보길 바란다) 


  오함마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워너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럴듯한 헛소리를 떠벌린 것에 불과했다. 평론가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이유는 아는 게 많아서가 아니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면 어렵게 쓸 리가 없다. 잘 모르니까 중언부언 헛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완벽히 이해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사실 완벽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논증할 수 없는 이론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처럼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 글쓰기 철학의 시작이었다. 


  "제발 어렵게 좀 쓰지 마라."


  어쩌다 보니 유시민, 강원국, 스티븐 킹의 글쓰기 철학과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자를 배려해야 한다거나, 명료한 글쓰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멋들어진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는 철학이 자리 잡고 나서 갖다 붙였다. 내가 쉽게 쓰자는 철학을 갖게 된 이유는 지극히 감정적이었다. 바로 배신에 대한 분노였다.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쉽게 써야 한다는 철학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 책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었다. 내 생각이 개똥철학은 아니라서 어느 정도 안심했다. 그리고 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도 알게 되었다. 어려운 단어는 쉬운 단어로 바꿔라. 복문은 되도록 쓰지 마라. 군더더기를 제거하라...


  하지만 내용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배우는 것(學)도 중요하지만, 익히는 것(習)도 중요하다. 운이 좋게도 이즈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배운 내용을 곧장 글에 적용했다. 글을 다 쓰면 퇴고를 거쳤다. 쉬운 단어로 대체하고, 단문으로 바꾸고, 군더더기를 제거했다. 이 작업을 꾸준히 하다보니 나중에는 따로 퇴고하지 않아도 쓰면서 다듬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실력은 나아지고 있는 걸까? 이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블로그를 써볼 생각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 며칠이 지나도 조회수가 0이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서 자주 찾는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pgr21이라는 조금은 이상한 사이트였다. 이곳은 엄격한 예의를 요구한다. 초성체도 사용할 수 없다. (ㅋㅋㅋ 대신 크크크라고 적는다) 그리고 새 글이 천천히 올라온다. 보통 커뮤니티라면 1시간에 수십 개의 글이 올라오고, 조금만 지나면 2페이지로 넘어가 게시물이 묻히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pgr21에서는 오랜 시간 첫 페이지에 머물 수 있다. 아무리 볼품 없는 글이라도 최소 수백의 조회 수를 찍을 수 있다. 여기에 추천 버튼도 존재한다. 내가 쓴 글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추천 수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일부러 그런 커뮤니티를 찾아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우연히 즐겨 찾는 커뮤니티가 글쓰기 점검에 최적화되었을 뿐이다. 그곳에서 추천과 댓글을 보며 글쓰기 실력을 가늠했다. 그리고 더 많은 추천과 댓글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의 방향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었다. 만약 책에서 알려준 대로 글을 썼는데 오히려 반응이 나빠졌다면, 펜을 꺾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책의 내용을 충실히 따를수록 반응이 좋아졌다. 그렇게 글쓰기 근육을 키울 수 있었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영성 작가님이 나와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그 덕분에 체인지그라운드에 입사했다.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입사하고 1년 동안 300여편의 글을 썼다. 혼자서 5년 동안 썼던 글과 맘먹는 분량이다. 그 모든 활동이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훈련이기도 했다. 다행히 회사가 원하는 글쓰기와 내가 추구하는 철학은 충돌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존에 가졌던 글쓰기 버릇을 완전히 버리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절대 쉽지 않았지만,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다. 매일매일 실력이 자라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현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행운을 넘어 축복이다. 익히기 위한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는 데다, 돈까지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직장인이 그러하듯 시간이 부족하다. 배우지 않고 익히기만 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예전에는 습(習)을 걱정했다면, 이제는 학(學)을 걱정해야 한다.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더 나은 글쓰기를 체득하기 위한 당면 과제이다. 




  잘 팔리는 글쓰기를 향하여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고는 하나, 부족한 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안 팔린다는 점이다. 내 글을 유심히 봐주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좋아요'를 누르게 만들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애당초 봐주질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글쓰기 교재는 없다. 대부분 못 쓰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유시민, 강원국도 다르지 않았다. 워낙에 잘 팔리는 분들이다보니 이런 쪽으로는 별 걱정이 없나보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잘 팔리는 글쓰기를 언급한다. 세 사람 중에 제일 많은 책을 팔아치운 사람이다. 바로 스티븐 킹이다. 그는 친숙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했고, 모방을 장려하며,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인 이야기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문장이었다. 스티븐 킹의 문장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한 문장을 읽으면 다음 문장을 읽고 싶어 참을 수 없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사람의 아들> 이후, 이토록 독자를 유혹하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그렇다. 잘 팔려면 독자를 유혹해야 한다. 제목만 보면 클릭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 내용을 보고 싶어 안달 나게 해야 한다. 스티븐 킹의 문장에는 그런 힘이 담겨 있었다. 


  글쓰기 교재는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모든 작가는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쓴다. 혼자만 보기 위해 쓴다면 '작가'라고 부를 수 없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사람도 있다. 그게 심해서 독자가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는 게 좋다. 나무에게 미안한 일은 하지 말자. 대기 오염이 심각하다. 일단 세상에 글을 내놓기로 작정했다면,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설득이라는 말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성보다 감성을 자극해야 설득이 이뤄진다. 머리로 알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다 감성적인 단어가 필요하다. '유혹'이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했다. 독자를 설득하기보다는 유혹해야 한다.


  그런데 유혹이라는 단어도 한자어라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부족하다. 그래서 더 친근한 단어를 골라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독자를 꼬시기 위해서."


  이것이 내가 이루고 싶은 '잘 팔리는 글쓰기', 다르게 표현하자면 '야한 글쓰기'다. 이 글도 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