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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이해의 종말






  이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3.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사리, 분별, 해석, 깨달음, 사정, 헤아림. 정의를 보자면 이해는 이성적 활동이다. 머리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례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멍청이 취급한다. "어떻게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죠? 난독이시네요.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 텅텅 빈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고 요리조리 돌려 말한다.

  하지만 이해는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전적 정의에도 쓰여있다.
  "너그러이 받아들임."
  이성적 활동이 이해의 시작이라면, 이해의 끝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감성적 활동이다. 가슴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머리로 헤아려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해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짜 멍청이는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이를 두고 난독이니, 공부하라느니 빈정대는 사람이야말로 이해가 뭔지 모르는 바보인 셈이다.

  이해는 이성으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시작은 쉽다. 이해를 위한 논리의 계단을 제시하면 세 살 아이도 차곡차곡 밟아 따를 수 있다. 문제는 그 끝에 이해를 향한 신뢰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자아의 경계AT 필드 안으로 외부가 침식하는 일이다. 그로 인해 내 생각, 신념, 태도, 인생까지 달라진다. 결국, 이해란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자아를 일부 잃고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이해의 본질이다. 일부일 뿐이라도 자신을 버리기는 어렵다. 의사가 더 튼튼한 다리를 줄 테니 헌 다리를 자르라 하면 당신은 얼씨구나 다리를 자를 수 있을까? 나라면 손톱만 바꾸자고 해도 주저할 것이다. 이해는 이렇게나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는 너무 쉽게 여긴다. 인터넷 댓글 몇 자로 상대를 이해시키려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지 뱃속으로 낳아 20년 동안 옆구리에 끼고 살아온 자식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 30년 넘게 한 이불 덮고 살아온 배우자와도 툭 하면 싸운다. 감성은 변덕쟁이다.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렸다가도 잠깐 방심하면 굳게 닫히기 일쑤다. 가족끼리도 이럴진대 얼굴도 모르는 상대는 오죽할까. 심지어 아예 모르는 상대도 아니다. 댓글로 찐하게 부딪혀 마음을 꽁꽁 걸어 잠근 사람이다. 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이해의 신이 와도 불가능하다. 결국, 남는 것은 비꼼, 찍어누르기, 정신 승리뿐이다. 그래도 이기는 등신이 낫다더라.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다행히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열린 문. 꾸준한 애정과 노력만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 그리하야 나를 버려도 된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 이해는 그제서야 이루어진다.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사랑을 가득 담아 간절히 염원해야 한다. 친절한 논리로 설명하고 달콤한 표현으로 꼬셔야 한다. 이를 지극정성으로 들이대도 될까 말까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현실은 키보드 배틀그라운드다. 핀잔과 조롱으로 공격하기 바쁘다. 논리적 정합성을 내세우며 찍어누르기 급급하다. 싸움이 목적이 아니라면 친절하고 달콤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데 비수를 찔러서야 되겠는가. 물론 날카로운 일침으로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 충격이 이해의 전반부, 이성의 영역을 단숨에 오르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뒤에는 감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도발했더라도 끝에서는 애정과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이걸 모른다. 그런 주제에 논리적 정합성에 취해 자신이 똑똑한 줄 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사람을 헛똑똑이라고 부르신다.

  헛똑똑이는 본래 배척당한다.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집단에서 도태되고 외톨이가 된다. (그렇다고 왕따시키고 괴롭혀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때 헛똑똑이는 깨닫는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해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득의 필수요소가 무엇인지. 헛똑똑이라도 근본은 똑똑하다 보니 대개 이 정도는 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안 된다.

  이게 다 인터넷 때문이다. 인터넷이 이해의 폭을 넓혀주리라는 환상은 이미 깨졌다. 우리는 더 많이 소통하게 되었지만, 몰이해의 골짜기는 갈수록 깊어졌다. 갈등은 심해지고 사회는 양극화한다. 거시적으로는 그렇다. 심각한 사회문제다. 그러나 미시적으로는 반대다. 인터넷은 개개인을 몰이해의 고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극단적 강경론이라도 동조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인터넷은 그들이 끼리끼리 모이도록 도와주었다. 대한민국 0.01%만 모아도 5천 명이다. 이제 헛똑똑이는 외롭지 않다.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자기주장에 동조할 사람 수천 명을 모으는 게 어렵지 않다. 생각과 태도를 반성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끼리끼리 구역 밖에서는 여전히 헛똑똑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구역 밖의 사람들이야말로 바보라고 정신 승리하면 된다. SNS 덕에 숨어있던 바보가 세상에 드러났다고 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SNS 때문에 정신 차릴 사람마저 바보가 되고 있다.

  물론 바보는 자신을 바보라 칭하는 작자를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천하 만민이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 바보의 전염을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진정한 이해다. 꾸준한 애정과 노력이다... 그게 되겠는가.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아직 인터넷에 실망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해를 위해 부단히 애썼다. 장문의 댓글도 마다치 않고 성실하게 키배를 벌였다. 그 와중에 친절하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다. 나는 진실로 이해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한계가 있었다. 애정과 노력이 불가능했다. 함께 밥을 먹고, 호흡하고, 머리를 맞댈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댓글 다는 게 전부였다. 고작 댓글 따위로 마음의 문을 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깨닫고 나는 바뀌었다. 더는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존중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맞고 네가 틀렸지만.

  이해는 포기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네 생각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세상에 완벽한 논리는 없다. 각각의 논리는 내적 정합성을 갖출 수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처지가 다르다. 상류층의 정의는 하류층의 모순이 되고, 남성의 이상은 여성의 현실에 막히며, 아버지의 향수는 아들의 적폐가 된다. 그래서 정치가 탄생했다. 서로의 입장을 조율한다.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경계를 구분한다. 정치는 소극적 이해인 셈이다. 이를 위해 경계를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 애정과 노력은 여전히 필요하다. 친절한 설명과 달콤한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인터넷 세상은 내 바람과 점점 멀어졌다. 친절은커녕 증오가 판친다. 내 처지를 이해해달라며 상대를 증오한다. 그 바보짓을 끼리끼리 모여 정의라 미화한다. 조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팔로워가 많은지 다투고 다툴 뿐이다. 어쩌면 인터넷은 잘못된 도구였을 지도 모른다. 모니터 뒤에는 사람이 있지만, 그에게 사랑을 전할 수는 없었다. 말 몇 마디로 사랑을 전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단 한 마디로 증오를 전하기는 쉽다. 일베가 난리 칠 때, 메갈이 탄생했을 때 지식인들은 증오의 이유를 찾고자 했다. 억압, 불평등, 사회 구조적 모순. 이유야 뻔하다. 반만년 유사 이래 만인은 만인과 갈등을 부비며 문명을 이룩했다. 오늘의 증오도 반복되는 갈등이 새로운 계층에 의해 표출한 것뿐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다. 과정이다. 인터넷처럼 증오를 증폭하는 장치는 없었다. 쉽고 빠르게 증오를 퍼뜨린다. 메시지가 아니라 미디어를 봐야 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폭주하는지 봐야 한다. (무려 15년 전 출간한 알버트 바라바시의 저서 <링크>에 이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만연한 증오는 저급하게 표출한다. 온라인에서는 어렵지 않게 쌍욕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욕을 듣는 순간. 무서웠다. 누군가 나를 그토록 증오할 줄이야. 두려웠다. 내가 분노에 잡아먹힐까 봐. 나는 무뎌지기로 했다. 논란에도 말을 아끼기로 했다. 촛불 들고 나선지 1년도 안 됐는데, 이러다가 정치 혐오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 무섭다. 그사이에 증폭하는 증오가 괴롭다. 마지막에 돌아올 쌍욕이 아프다. 관심은 두되 침묵하자. 떠들면 귀찮으니까. 이게 요즘의 나다. 덕분에 숲속 친구는 면했다. PROFIT!

  미워하고 증오하는 나선 위에서 나는 이제 내려가고 싶다. 증오에 맞서 애정과 노력을 기울이기에 나는 너무 지쳤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오른뺨을 맞고 왼뺨마저 내밀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팠다. 나를 모욕하는 상대에게 친절하고 싶지 않다. 차근차근 설명하기 귀찮다. 감성이 닫히면 이성은 정지한다.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현자들이 말하길 악플은 무시가 답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무시해야 한다. 무심(無心)해야 한다.

  하지만 억울하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가. 무뢰한은 실컷 욕이나 뱉고 속 시원히 발 뻗고 잘 텐데. 왜 내가 눈 막고 귀 막고 생불이 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한마디 하련다. 분노를 속으로 삭여야만 할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억울하게 욕먹는 누군가를 위해. 그들을 대표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말을 외친다.


  이해해요. 학창시절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렇다고 당신에게 동료 직원을 말똥 취급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에요. 알아요. 우리는 당신을 비웃었죠. 서랍에 젤리 도넛 쌓아 놓은 것도 알아요. 하지만 이건 알아줘요.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굴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신을 안쓰럽게 생각했을 거예요. 난 진심으로 당신을 안쓰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이 사무실 전체를 대표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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