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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기담] 정전

  버스 막차는 전혀 한산하지 않았다. 다들 뭐가 그리 다망한지 빈자리 하나 없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박 차장이 물고 늘어졌다. 이 대리 한 잔만 하고 가자. 딱 맥주 한 잔만. 외면하기 어려웠다. 정 과장은 아내가 만삭이고, 나머지 사원은 전부 여자다. 그렇다고 박 차장이 부장님께 엉겨 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만한 게 나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갔어야 했다. 왜 일찍 가야 하는데? 박 차장이 다그쳤을 때 나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다. 뺑기 부리지 말고 가자. 그렇게 딱 한 잔만 하자던 술자리는 3,000cc 세 피처를 채우고야 말았다. 더 주문하려는 박 차장을 겨우 말려낸 구실이 바로 이 버스 막차였다.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동네에 버스가 당도했다. 씹던 껌이 뱉어지듯 뒷문으로 퉁겨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파트 단지가 휑뎅그렁했다. 불 꺼진 집이 태반이었다. 싸구려 구두의 딸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단지 내로 울려 퍼졌다. 딸꺽 딸꺽. 또각 또각. 응? 또각?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다시 앞을 바라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새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걷고 있었다. 또각 소리는 원피스와 깔 맞춘 파란 하이힐이 내는 소리였다. 늘씬한 몸매가 원피스 위로 드러나 보였다. 우리 동네에 저런 미인이 있었구나. 물론 나완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걸음이 느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거의 따라잡았다. 마치 내가 뒤쫓는 모양새였다. 변태 스토커로 몰리기는 싫었다. 이럴 때 잽싸게 앞질러가는 게 매너라 했다. 일부러 발을 힘차게 굴러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내 걸음 소리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가 보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좁은 보도블록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 나는 민망한 기분이 들어 더 힘차게 발을 굴렀다. 

  또각 또각.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하이힐 소리는 여전히 나를 맴돌았다. 한산한 단지를 울리는 소리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각 또각. 코너를 지나고 건물을 지나도 구두 소리가 귓바퀴를 물고 늘어졌다. 마치 나를 쫓는 것처럼. 늦은 밤 뒤를 쫓긴다는 건 섬뜩한 일이었다. 내가 남잔데 별일이야 있을까 싶다가도, 칼이라도 들고 덤비면 어쩌나 모골이 송연했다. 또각 또각. 여자는 걸음이 느렸다. 느렸는데 어째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거친 숨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벌어진 입 사이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상하다. 비릿한 맛이었다. 등줄기를 가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순간 구두 소리가 빨라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멀찍이 떨어져 걷고 있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내가 돌아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머쓱한 마음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파트 출입문에 '공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나머지는 찢겨 나가고 그저 '공지' 두 글자만 덜렁덜렁 달려있다. 도어락 키패드에 호수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잘못된 번호입니다. 술 때문인가? 손이 미끄러졌나? 이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번호를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삐빅. 잘못된 번호입니다. 아직 번호를 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오류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으아니! 어차피 동네 배달통들이 번호를 다 꿰고 있을 텐데, 입구에 도어락은 뭐하러 만들어 놓은 거야! 잠시 고개를 들어 긴 호흡을 뱉었다. 정신 차리자. 요란하게 눈을 껌뻑이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데. 또각 또각. 저 멀리 여자가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긴장해서 키패드를 누르는 손끝이 떨려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안심이 되었다. 나는 턱밑을 타고 내려오는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21, 20... 꼭 내가 탈 때는 한참 위에서부터 내려오더라. 3, 2, 1. 딩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엄청난 두께의 문이 잘도 부드럽게 열렸다. 안에는 후덕한 풍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사내가 내리지 않았다. 
  "안 내리세요?"
  사내는 '네가 뭔 상관인데?'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는 게 매너 아니던가?
  "내리실 거면 먼저 내리세요."
  사내는 콧김을 훅하고 뱉더니 입을 열었다. 
  "지갑을 두고 와서요. 다시 올라갈 겁니다."
  그냥 다음 걸 탈까? 께름칙했다. 하지만 피로한 팔다리가 몸을 이끌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12층을 눌렀다. 무늬 없이 맨질맨질한 철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땅딸보가 서 있었다. 술 좀 줄여야겠다. 운동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육중한 문이 스르륵 움직였다. 그런데 사내가 갑자기 열림 버튼을 눌렀다. 이 자식이 장난하나? 싶은 순간. 또각 또각. 그 여자다. 파란 원피스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왜 나를 쫓아오는 거지? 그러나 여자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들어서자마자 입구로 몸을 돌리고는 7층을 눌렀다. 같은 동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도 이런 미인을 모르고 살았다. 동네 인심이란 진심 옛말이 되어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하자 관성력이 몸을 짓눌렀다. 오늘따라 그 무게가 버겁다. 역시 술을 끊고 운동을 해야... 덜컹! 한 평짜리 천지가 요동치더니 불이 나가버렸다. 황급히 전화를 꺼내 플래시를 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봤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아... 정전이네."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플래시를 비추자 사내의 넓고 불룩한 가슴이 보였다. 여자는? 여자는 어디있지? 나는 플래시를 이리저리 돌리다 여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무슨 짓이에요. 눈부셔요."
  "죄송합니다."
  손으로 플래시를 가렸다. 잠깐 봤을 뿐이지만, 여자는 얼굴도 이뻤다. 엘리베이터에 둘만 갇혔으면 어땠을까? 로맨틱한 전개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사내놈만 없었어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하... 술 냄새. 짜증 나..."
  여자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음성은 좁은 공간을 돌아 내 고막을 울렸다. 안 될 놈은 안 된다. 나까짓 게 무슨 로맨스냐, 로맨스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인터폰 버튼을 찾아 눌렀다.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여보세요?"
  버튼을 누른 상태로 이야기해야 하나?
  "여보세요? 경비실에 아무도 없어요?"
  뒤에서 사내가 한마디 하기 전까지는 내가 얼마나 등신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전됐는데 인터폰이 작동하겠어요? 열 내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봅시다. 경비실에서 뭔가 조치하겠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경비 아저씨가 깜빡 졸기라도 하면 아침까지 여기 갇혀있어야 했다. 뭔가 해야만 했다. 플래시로 조작패널을 꼼꼼히 비춰보았다. 있다! 제조사 긴급 전화번호.
  "그렇지!"
  반가운 마음에 그만 탄성을 질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전화를 걸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세강엘리베이터입니다. 이 번호는 긴급 전화입니다. 엘리베이터 설치 및 운용에 관한 문의는 공이 삼팔사에 이칠팔오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세강엘리베이터입니다. 이 번호는 긴급 전화입니다. 엘리베이터 설치 및 운용에 관한 문의는..."
  안내 멘트만 지겹게 이어졌다. 말만 긴급 전화고 당직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번호가 아니면 어디 연락할 곳도 없었다. 

  기다리다 지쳤다. 전화기를 쥔 손을 내려놓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암흑처럼 고요한 엘리베이터에서 안내 멘트만이 속삭였다. 슬슬 내일 출근이 걱정됐다. 오밤중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고 말하면 부장님이 믿어주실까?
  "꺅. 어딜 만져요?"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다급히 플래시를 비추었다. 
  "왜 그래요?"
  "저 남자가 지금 제 허벅지를 만졌어요."
  "아니,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벽을 짚으려다가 실수로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고의가 아니에요."
  "그 말을 무슨 수로 믿어요? 완전 노리고 더듬었잖아요.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신고? 아 맞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래요! 신고하면 되겠네요. 엘리베이터 회사 말고 119에 신고하면 돼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죠?"
  나는 전화를 끊고 119를 찍었다. 막 통화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인터폰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경비실입니다. 지금 정전이라 엘리베이터가 멈췄습니다. 곧 조치할 테니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저 119에 신고하려고 했는데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신고하면 되레 귀찮으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정상작동할 겁니다."

  다행이었다. 그나마 출근 걱정은 면했다. 그러나 방금 벌어진 사태가 문제였다. 플래시로 두 사람을 비춰보았다. 사내는 뒷벽에 바싹 붙어 앉았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왼쪽 구석에 서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사람 당장 묶어주세요."
  여자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저 사람 또 이상한 짓 할지 모르니깐 당장 묶어 달라고요."
  "제가요?"
  "그럼 거기 말고 여기 누가 또 있어요?"
  "아니 제가 무슨 경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함부로 묶어요. 그리고 묶을 것도 없어요."
  "넥타이 있잖아요. 넥타이로 손을 뒤로 묶어요."
  잠자코 듣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 미치겠네. 제가 미안합니다. 정말 실수였어요. 자, 이렇게 뒷짐 지고 있을 테니깐. 나갈 때까지 가만히 좀 있읍시다."
  "불도 다 꺼졌는데 댁이 뒷짐을 졌는지 알게 뭐예요."
  내가 뭐라도 해야 했다. 
  "제가 계속 플래시로 비추고 있을게요. 그러니 좀만 참죠."

  플래시로 사내를 비추었다. 사내가 불빛에 얼굴을 찡그렸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나도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여자 쪽을 쳐다봤다. 뒷벽에 반사된 빛이 희미하게 구석 자리를 비추었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여자 쪽을 비추었다.
  "뭐예요? 저 사람 비춰야죠."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는데, 그 자리에는 짜증 섞인 표정의 미녀가 서 있었다. 나는 다시 사내를 비추었다. 
  "그쪽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요. 혹시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깐 제 옆으로 오실래요?"
  이 소릴 들은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실수했는지도 모르겠다. 추파를 던진 꼴이었다. 그런데. 또각 또각.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뿌듯했다. 어쩌면 나에게도?
  "괜찮으시면 제가 손을 잡고 있어도 될까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싸라비야 콜롬비야.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나는 여자의 손을 덥석 쥐었다. 이상하다. 여자의 손이 차가웠다. 여자는 보통 손이 따뜻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스시를 다루지 못한다고. <올드보이>에 나왔던 대사다. 그런데 이 여자의 손은 한겨울 쇠파이프처럼 차갑고 메말랐다. 
  "손이 차가우시네요. 혹시 회 다루는 일 하시나요? 회 다루는 사람은 손이 차야 한다더라고요."
  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등신 같은 소리였다...

  순간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렸다. 내 손을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실렸다. 한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오래된 미닫이문을 여는 것처럼. 끼릭 끼릭, 삐그덕 삐그덕. 문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플래시를 비추자 잿빛 도끼다시 바닥이 보였다. 인터폰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렸다. 
  "자, 일단 내리세요."
  "저기... 아직 정전인 건가요?"
  "네, 아직 정전입니다. 그러니깐 일단 내려서 계단으로 가세요."
  "아니 집이 12층인데 거기까지 올라가라고요?"
  "뭐 별수 있습니까? 일단 내리세요."
  경비원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뭐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일단 내리세요."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화를 삭였다.
  "일단 내려요."
  여자가 내 손을 이끌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럼 이분도 같이 내려야겠죠?"
  "싫어요. 일단 우리 둘만 내려요. 저 사람은 좀 있다가 나오라고 해요."
  여자는 이미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내 손을 꼭 쥔 채로. 그 손이 너무 차가워 이제는 아플 정도였다. 
  "그럼 안 되죠. 이 분도 같이 내려야죠."
  나는 플래시로 사내를 비추었다. 사내가 '넌 이상하지 않아?'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정전이라면서요?"
  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를 가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정전인데 인터폰이 작동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플래시로 여자를 비추었다. 여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지금 저 사람 말을 믿는 거예요? 저 사람 치한이라고요."
  "아니 근데 좀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게 뭐 있어요. 어서 내려요."
  나는 사내를 비추었다. 
  "저 여자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또라이 같은데..."
  다시 여자를 비추었다. 
  "어서 내려요."
  "자... 잠깐만요."
  내가 머뭇거리자 여자가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어서 내려요. 이 깜깜한 곳에 저만 내버려 둘 건가요?"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내리자. 내리면 여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문밖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 냄새 같은... 아니. 썩은 고기 냄새다.
  "싫어요."
  "네?"
  "나가기 싫어요."
  "어서 내려요."
  여자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 손을 놓으려 했으나 여자의 악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어서 내려요."
  "싫어요."
  "어서 내려!"
   그 순간 겨우 손을 빼낼 수 있었고, 나는 반동으로 나뒹굴었다. 플래시로 엘리베이터 입구를 비추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사내를 비춰보니 기절해있었다. 내가 나뒹굴 때 얼굴을 정통으로 박은 듯했다. 나는 통화 창을 열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고작 십여 분 만에 119가 도착하여 사내와 나를 구조했다. 정신을 차린 사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구급대원은 가벼운 뇌진탕이라며 사내를 안심시켰다. 사내는 지갑이 없어졌다고 소란을 피웠다. 내가 지갑을 두고 왔다고 알려주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는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차가운 손과 이상한 냄새까지. 사내는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쪽도 머리를 다친 거 아니냐고 걱정해주었다. 구급대원은 어두운 곳에 갇혀서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며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뒤편에서 구급대장 같은 사내와 경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혹시 다른 경비원이 있냐고 물었다. 자기 혼자란다. CCTV 좀 보자고 얘기했다. 방금까지 정전이라 작동하지 않았단다. 나는 경비실로 뛰어갔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CCTV용 컴퓨터는 전원조차 꺼져있었다. 경비실 앞 유리에 공지라고 적힌 A4 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명일 자정부터 02시까지 아파트 전력 점검에 따른 정전이 있을 예정이오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이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1) 냉장고에 얼린 물이나 아이스 팩을 넣어두시면 보랭에 도움이 됩니다. 
  2) 해당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3) ..."
  이거였다. 내가 오늘 집에 일찍 들어왔어야 하는 이유. 나는 공고문을 떼어내 씩씩거리며 경비원을 찾아갔다. 
  "아저씨. 이런 일이 있으면 엘리베이터 못 타게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전될 때 들어가서 꼼짝없이 갇혀버렸잖아요."
  "아니 내가 묻고 싶구먼. 거기 어떻게 들어갔어요? 엘리베이터 9시부터 가동 중지했어요. 문도 못 열게 잠갔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요?"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아파트로 향했다. 키패드에 호수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도무지 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난간을 쥐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고, 5kg이 빠졌다. 










※ 부제 : 다이어트의 요정은 하이힐을 신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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