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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이유는 없어, 그냥 좋아!

  여자친구가 카톡으로 보여줄 게 있다고 야단이다. 뭣이 그리 중허길래 이리 호들갑이냐고 물으니 사진을 한 장 보낸다. 초등학교 2학년 사촌 동생 희소가 쓴 그림일기였다. 그림은 괴발개발, 글씨도 삐뚤빼뚤, 별거 없는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다. 이걸 잘 썼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본인이 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제 점수는요."라며 평가하기도 우스웠다. 신나는 목소리로 전화했는데 못 그렸다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뭐라 대답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여자친구는 "봤어? 봤어?" 하며 나를 재촉했다. 이제는 잘 굴러가지도 않는 짱구를 쥐어짜고 나서야, 나는 중립적이면서도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근데 왜?"
  그러자 여자친구는 읽어봤냐고 물었다. 나는 다급하게 지금 읽어보겠다 대답했다. 하지만 사진은 작았고, 핸드폰 화면은 더 작았고, 글씨는 삐뚤빼뚤이었다. 나는 사진 크기를 핑계 대며 잘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여자친구가 말하길 사촌 동생이 일기에 자기를 좋아한다고 썼단다. 특히 그 이유가 너무나 좋단다. 희소는 언니가 아무 이유 없이 좋다고 썼단다. 아이다운 글이었다. 순진하고 예뻤다. 여자친구는 이유 없음이라는 이유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수험생이다. 수험생이지만, 마냥 공부만 할 수는 없다. 불효막심한 자식 때문에 부모님은 아직도 생업에 종사하신다. 대신에 나는 집안일을 도맡았다. 가끔은 장도 보고 부모님 심부름도 한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보고자 이런 일들은 몰아서 처리하는 편이다. 그날도 할 일을 모아 모아 부득이한 외출을 감행했다. 기왕 나선 김에 여자친구 집에 불쑥 찾아갔다. 보고 싶었으니깐. 식료품을 살 것이 아니었기에 여자친구네 동네에서 장을 봐도 별 상관은 없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런 생각으로 여자친구를 찾았다.

  여자친구네 집에 들어서자 애완견 밍키가 나를 맞이가 아니라 경계했다. 이 포메라니안 녀석은 나를 싫어한다. 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밍키가 내 손을 물어뜯으려 점프했다. "콱" 소리가 허공을 가르는 것이 손을 빼지 않았다면 물려서 피가 날 뻔했다. 밍키는 전 주인에게 버림받았었다. 어쩌다 보니 개를 떠안게 됐지만, 여자친구네는 개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유기견 센터에 보낸다는 걸, 그곳에 보내면 안락사시킨다며, 극구 말려서 목숨을 부지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도 내가 쓰다듬으면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는 "Grrrr" 소리를 내는 밍키였다. 오라질 것...

  여자친구와 나는 배은망덕한 밍키를 데리고 장을 보기로 했다. 여자친구가 나갈 채비를 하자 밍키가 깡총깡총 신을 냈다. 목줄까지 매주자 아주 좋아 죽으려 한다. 골목길로 나서자 밍키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댔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열심히 시청한 덕분에, 이제는 밍키가 왜 저렇게 열심히 냄새를 맡는지 안다. 개들은 냄새를 맡고, 냄새를 남기며 의사소통한단다. 개들에게 전봇대는 일종의 게시판인 셈이다. 밍키는 벽이며 전봇대며 여기저기 코를 들이밀었다. 열심히 냄새를 맡았으니 이제 쉬를 싸야 하는데... 오잉? 밍키는 물구나무를 서서 오줌을 쌌다. 보통 개들은 한쪽 다리를 들고 싸지 않았나? 나는 밍키가 이상하다고 놀려댔다. 여자친구는 밍키가 똑똑해서 그렇단다. 하긴 밍키는 참 똑똑한 개다. 밍키가 여자친구 집에 처음 온 날 거실 바닥에 소변을 봤었다. 여자친구는 밍키를 붙잡고, 여기다 쉬 싸면 안 된다고, 딱 한 번 훈계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밍키는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본단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정말 똑똑해서 저런 걸까? 밍키는 보이는 전봇대마다 물구나무를 서서 소변을 봤다. 그때마다 나는 이상한 개라고 놀렸고, 여자친구는 천재 개라고 받아쳤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웠고 우리 둘은 깔깔대고 웃을 수 있었다. 장을 다 보고 돌아올 때가 되자, 하도 쉬를 싸서 그런지, 밍키의 오줌발이 약해졌다. 그제서야 밍키는 한쪽 다리를 들고 정상 개처럼 볼일을 봤다. 그러더니 바닥에 뒷발을 박박 닦아댔다. 아마 물구나무를 섰던 건 소변이 묻는 게 싫어서였나 보다. 요망한 것. 개 주제에 깔끔을 떨다니. 역시 밍키는 천재 개인가 보다. 머리는 좋은데 성격이 드럽다.

  이대로 장만 보고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다. 어차피 오후는 다 날려 먹었다. 이제 와 공부한다고 폼 잡는 것도 우스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요즘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극장을 못 가고 있었다. (아아... 짤평 써야 하는데...) 무슨 영화를 볼까 정하지도 않은 채 일단 홍대로 출발했다. 홍대로 가는 버스 창밖으로 평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나는 장기 얘기를 하다, 바둑 얘기를 하다, 알파고 얘기를 하다, 특이점이 어떻고 저떻고 수다를 떨었다. 여자친구는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내 수다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막상 홍대에 도착하고 보니 시간이 애매했다. <정글북>은 2D 상영관밖에 없었고, 겜알못 여자친구를 데리고 <워크래프트>를 볼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고민하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내가 지금 띵까띵까 영화나 보고 있어도 되나?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이렇게 버려도 되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죄책감은 하늘을 뒤덮은 스모그처럼 내 마음을 짓눌렀다.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고민의 늪에서 허덕이자 여자친구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후회할 것 같으면 안 하는 게 정답이야."
  우리는 영화 보기를 포기했다.

  어느새 시계는 7시를 가리켰고, 불금의 햇님은 퇴근할 생각에 흥분했는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점심을 건너뛰어서 몹시 배가 고팠다. 여자친구는 늦은 점심으로 꽃등심을 먹어서 별로 배고프지 않단다. 혼자만 소고기를 먹었냐며 나는 삐짐삐짐을 시전했다. 결국, 저녁은 가볍게 때우기로 했다. 요전에 여자친구가 맘스터치 싸이버거가 그렇게 맛있다며 칭찬한 기억이 났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홍대 정문 옆 맘스터치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싸이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두툼한 치킨과 달콤짭쪼롬한 소스가 끝내줬다. 내가 너무 맛있게 먹었나보다. 먹을 생각이 없다던 여자친구도 싸이버거를 주문했다. 하긴 내가 먹는 모습이 복스럽긴 하다. 그렇게 우리는 패스트푸드로 저녁을 마쳤다.

  홍대 정문은 오랜만이었다. 홍대를 방문하면 늘 지하철 입구 주변이나 상상마당 근처를 배회했다. 대부분의 식당이나 유흥업소는 그 주변에 있다. 홍대를 기준으로 반대편에는 미술학원과 공방이 늘어서 있다. 하긴 이러니 별로 오질 않았지. 영화를 보지 못해 못내 아쉬운 나는 터벅터벅 걸음만 걸었다. 그때 여자친구가 어딘가 가리켰다. '도토리숲'이라는 지브리 스튜디오 캐릭터 샵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꿈동산에 온 것 같았다. 손수건, 액세서리, 팬시류를 보면서 옛 추억에 빠졌다. 가게 안쪽에는 보드라운 고양이 버스도 있었다. 가게를 둘러보니 피규어나 캐릭터 상품을 모으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저 지브리라는 이유만으로 매력적이었다. 입구에는 잠자는 토토로 인형이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커다란 배가 숨 쉬듯 부풀어 올랐다. 여자친구는 저리되면 안 된다며 내 배를 쓰다듬었다.

  공방 거리를 지나 큰길로 나오는 골목에는 옷가게가 즐비했다. 홍대를 자주 왔건만 이런 거리가 있는 줄 몰랐다. 이번에는 여자친구가 신났다. 이거 예쁘다, 저거 어울리겠다, 구경만 하면서도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대게 남자들은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쇼핑이란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이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일은 그저 고역일 뿐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아이 쇼핑만 해도 이렇게 즐거운데! 오늘 영화 안 보길 잘했지?"
  여자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눈꼽만치 남았을지도 모를 근심마저 날려버렸다. 그러게, 영화를 봤으면 괜한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우리는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었다.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우리가 사귄 지 1,000일이 넘었다. 여자친구는 나 같은 게 뭐가 좋아서 1,000일이나 만나고 있으려나? 그럼 나는 왜 여자친구를 1,000일이나 좋아하고 있을까? 처음에는 이유가 많았다. 예쁘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먹성이 좋다거나, 피부가 좋다거나, 몸매가 좋다거나... 전에는 그런 때도 있었다. 여자친구는 왜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대답했다. 그 많은 이유가 진짜 이유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는 무슨 이유로 좋아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치만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나도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는가 보다.

  그날의 데이트는 데이트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강아지를 산책시켰고,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아이 쇼핑을 했다. 늘씬한 세단을 타고 드라이브하거나,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칼질하거나, 백화점에서 명품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좋았다. 참 좋았다. 뭐가 그리 좋았으려나? 생각해보면 별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마 그날도 그냥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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