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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9.11테러, 히어로 무비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 이 글은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뱃 v 슈>'), <어벤져스>, <아이언맨3>,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이하 '<윈터솔져>'),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글에서 논의하는 대상은 마블과 DC코믹스 원작이 아닌, 이를 바탕으로 개봉한 실사 영화에 한합니다.





  9.11테러와 히어로 무비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 2대가 그대로 충돌하는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곧이어 미국 국방성 펜타곤에도 비행기 충돌 사고가 이어졌다. 미국 본토의 핵심인 뉴욕과 국방성이 공격받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미국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는다. 전 세계에 전쟁의 공포를 각인시킨 2차 세계대전 때도 본토만큼은 침략당하지 않았던 미국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할리우드가 '9.11테러'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슬픔이 채 수그러들지 않았고 9.11테러와 관련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9.11테러를 다루는 일은 다소 조심스럽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대게의 관련 작품은 다큐멘터리이거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선으로만 그려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9.11테러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장르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정치 스릴러가 아니라 히어로 무비이다. 히어로 무비는 근본적으로 판타지이니만큼 9.11테러를 직접 다루지 않고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이미지만 차용했다. 덕분에 희생자에 대한 배려 문제나 정치적 해석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르와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이렇게 조우하게 된다. 20세기 007시리즈와 냉전의 만남이 숙명이었듯이 21세기 히어로 무비와 9.11테러의 만남도 당연한 숙명이었다. 





  마블의 9.11테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는 9.11테러를 꾸준하게 다루고 있다. <어벤져스>에서 외계 종족 치타우리의 뉴욕 침공 장면은 노골적으로 9.11테러를 상기시킨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외계인의 침공으로 보이지만, 전투 사이사이에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경찰과 소방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점이 여타 외계인 침공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이는 9.11테러 당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뉴욕 경찰과 소방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자 당시를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현실에 9.11테러가 있다면 MCU에는 치타우리 침공이 있다. <어벤져스> 이후 치타우리의 침공은 여러 캐릭터에게 트라우마로 남으며 향후 전개되는 첨예한 갈등의 씨앗이 된다.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뉴욕시 소방관

이들의 유니폼은 이제 상징이 되었다.

  차기작 <아이언맨3>에서는 9.11테러가 야기하는 강박적 공포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치타우리 공습 이후 외계의 습격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주변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아이언맨 슈트 개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짝퉁 빌런 만다린의 모습은 9.11테러 주동자 오사마 빈 라덴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상징과 비유는 9.11테러 이후 미국인을 괴롭힌 테러로부터의 공포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강한 군사력과 통제력을 추구하는 강박적 모습도 보여준다. 극의 결말에서 토니 스타크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고 위기를 극복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안보를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미국인의 심정을 대변한다. 

▲<아이언맨3>의 만다린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대중을 선동하고 테러 위협을 하는 모습은 오사마 빈 라덴을 연상시킨다.

  1년 후에 개봉한 <윈터 솔져>에는 토니 스타크와 대립하는 입장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지나친 통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영화에서 쉴드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프로젝트 인사이트'를 추진한다. 이는 헬리캐리어를 이용한 광범위한 공중 요격이었다. 캡틴은 이 시점부터 프로젝트 인사이트가 안보가 아닌 공포라고 말한다. 후에 드러난 프로젝트 인사이트의 실체는 이보다 충격적이었다. 실상은 프로그램 알고리즘으로 각종 정보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해 위협적인 대상을 사전에 요격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인사이트의 실체는 9.11테러 이후 부시 정권이 선포한 애국자법을 상징한다. 국내 버전 테러방지법. 이 법안은 영장 없이 전화, 이메일을 도청하는 행위를 허용하고 있으며 당연히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범죄가 예측되는 대상에 대해 자유를 침해하는 징벌적 수사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는 프로젝트 인사이트가 미래를 예측하여 위협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점과 통한다. 결국, 영화에서 캡틴은 프로젝트 인사이트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끝내 쉴드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앞선 <아이언맨3>가 안보를 강화하는 입장을 보여줬다면 <윈터 솔져>는 이러한 태도가 선을 넘었을 때 초래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준다. 이는 안보보다 개인의 권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리버럴)의 입장을 대변한다. 

▲프로젝트 인사이트를 바라보는 캡틴 아메리카(좌)와 닉 퓨리(우)

"이렇게 자유가 죽어가는군요. 우레 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 <스타워즈 EP3>에서 파드메 아미달라의 대사

  이 둘의 입장 차이는 <어벤져스2>에서도 계속된다. 토니 스타크는 안보를 위한 새로운 힘을 추구하다 인공지능 빌런 '울트론'을 탄생시키고 만다. 토니 스타크는 울트론을 막기해 또 다른 인공지능 '비전'을 만들려 하고 캡틴 아메리카는 이를 저지하려 한다. 당시의 갈등은 비전의 극적인 탄생으로 임시 봉합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 둘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이는 차기작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로 이어질 예정이다.

  마블은 단순히 9.11테러를 상기시키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9.11테러를 모티프로 파생하는 정치적 대립을 토니 스타크와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이슈가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영화에서 정치적 요소는 결국 조미료에 불과하며 각 작품의 대립은 선과 악의 명확한 대결로 마무리된다. 게다가 영화 속 캐릭터의 입장에 관한 뚜렷한 가치 판단을 하지도 않는다. 토니 스타크의 주장이 나쁘다고 한 적도 없고 캡틴 아메리카의 판단이 옳다고 한 적도 없다. 각자의 입장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줄 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하지 않는다. 이는 히어로 무비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영리한 처신이다. 윤리적, 정치적 올바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락물의 역할에 충실한다. 캐릭터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그로 인해 명확한 갈등구조와 캐릭터의 생동감을 얻는다. 정치적, 철학적 고뇌마저 철저히 오락물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하는 것이다. 마블은 9.11테러라는 정치적 이슈를 히어로 무비에 녹여내는 모범답안을 보여주었다.

▲<시빌 워>의 캡틴 아메리카(좌)와 토니 스타크(우)

마블은 9.11테러를 모티프로 명확한 갈등구조를 확립하였다.





  <뱃 v 슈>의 9.11테러

▲무너지는 빌딩을 바라보는 배트맨

그에게 슈퍼맨의 존재는 9.11테러와 다름없다.

  <뱃 v 슈>는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싸움으로 무너지는 빌딩을 보여주며 9.11테러의 이미지를 끌어온다. 무너지는 건물, 엄청난 먼지 그리고 잔해 속에서 고통받는 시민의 모습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 이를 지켜보는 배트맨은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우려한다. 적이 될 가능성이 1%라도 존재한다면 무한한 힘은 안전이 아니라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배트맨의 논리는 마블의 토니 스타크와 닮았다. 부자들은 서로 통하는건가... 위협의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더 큰 힘을 추구한다. 9.11테러를 바라보는 안보 중심적 사고와 비슷한 만큼 배트맨의 논리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럴 경우 배트맨과 대립하는 슈퍼맨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진다. 배트맨의 논리 안에서 슈퍼맨은 9.11테러를 상징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다른 입장이 되지 못하고 그 자체로 평화를 위협하는 악으로 규정된다. 이에 대해 슈퍼맨은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는 수비적 태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슈퍼맨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어렵다. 9.11테러의 트라우마는 아직 가시지 않았고 지금도 IS의 테러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 위협이 될 수 있는 대상을 선의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령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국민적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상업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결국, 슈퍼맨은 배트맨과 대립할 수 있는 탄탄한 주장을 확보하지 못한다. 각자의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며 격렬하게 부딪히는 MCU의 히어로들에 비하면 갈등구조가 엉성하다. 슈퍼맨이 9.11테러를 상징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될 엉성함이었다.

  슈퍼맨은 그 자체로 <뱃 v 슈> 갈등구조의 딜레마다. 그의 입장을 관객들에게 설득할 수도 없고, 마땅한 설득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뱃 v 슈>는 우회 전략을 취해야 했다. 마블처럼 정치적 대립은 조미료로 제한하고 명백한 선악 구도를 내세워야 했다. 그런데 <뱃 v 슈>에도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고민할 필요 없는 절대 악 렉스 루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렉스 루터가 보다 적극적으로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립을 이간질했다면 어떨까? 렉스 루터는 슈퍼맨을 모함하고 이에 배트맨은 슈퍼맨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며 로이스 레인은 슈퍼맨의 모함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침내 이 넷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극적으로 오해가 풀리고 최후의 적 둠스데이와 격돌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라면 다소 식상할지언정 최소한 황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배트맨과 슈퍼맨의 갈등을 '엄마 이름이 똑같다'는 황당한 계기로 해소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대사였다. 이 대사 한 방으로 슈퍼맨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로이스 레인의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렉스 루터는 서사와 상관없이 헛돌며 그저 미친놈조커 하위 버전으로 전락하고 만다. (렉스 루터는 힘과 권력을 시기하고 조롱하는 존재로 그려졌어야 했다) 무엇보다 슈퍼맨의 입장이 설득력을 잃었다. 전개의 흐름은 끊어졌고, 갈등의 한 축이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결국, 영화 전반에 걸쳐 제대로 된 캐릭터를 쌓아 올린 것은 배트맨뿐이었다. (원더우먼은 갑툭튀라 논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녀가 최고였다는 점이 이 영화의 빈약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뱃 v 슈>의 배트맨(좌)과 슈퍼맨(우)

갈등은 엉성하고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리고 영화사 최악의 대사를 남겼다.





  이대로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뱃 v 슈>는 9.11테러를 끌어왔지만, 이는 여러모로 패착을 낳았다. 히어로에게 9.11테러의 이미지를 부과하여 캐릭터를 수비적이고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이를 적절히 우회하지도 못하고 서브 캐릭터를 병풍으로 전락시켰다. 끝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황당한 한 수를 보여주며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감독 잭 스나이더에게 망작의 책임을 물으며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아쉽다. <뱃 v 슈>는 치명적 단점도 가지고 있지만 매력적인 요소도 있다. 역대 히어로 무비 중 가장 훌륭한 스케일과 비주얼을 선사하지 않았는가? (특히 올해 개봉한 <데드풀>의 저렴한 스케일을 생각하면 더욱 훌륭하게 다가온다) 다음에는 이번 작품의 단점을 보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잭 스나이더의 비주얼은 이대로 썩히기 아깝고 DC 코믹스의 콘텐츠는 버리기엔 너무나 풍성하다. 많은 팬이 DC 코믹스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에 꼭 부응하길 바란다. 그러니 정신 차려라 DC 코믹스, 워너 브라더스 그리고 특히 잭 스나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