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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위대한 실패를 위하여

  어렸을 적 부모님은 호프집을 하셨습니다. 가게를 마감하는 시간이 새벽 3~4시다 보니, 그때부터 저는 많은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밥과 반찬을 만들어주셨지만, 동생과 함께 그것을 차려 먹기만 하는 것도 초등학생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동생 도시락도 싸보고, 청소며, 빨래며... 저는 반 주부가 다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영화는 원 없이 봤습니다. 매주 주말이면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 가운데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즐거운 고민을 했었죠. 누구의 방해도 없이 어린 나이부터 야하건, 잔인하건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 그 수많은 명작들... 꼬꼬마가 뭘 알고 봤을 리는 없겠지만 작은 브라운관에서 뿜어지는 영상에 매료되었던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중학교 때 특별활동 시간에는 '영화감상반'을 들었습니다. 뭐 당시 대한민국 특별활동 수준이야 별거 없었죠. 교실에 비치된 TV로 선생님이 틀어주시는 비디오를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수업시간도 1시간밖에 안되다 보니 영화를 온전히 관람할 수도 없었죠. 그래도 담당 선생님이 어떤 사명감이 있으셨기 때문일까요? 흔하게 볼 수 없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중 한 영화 덕분에 저는 영화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였습니다. 당시에는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작품이었죠. 1시간의 특별활동 시간 동안 절반도 안 되는 분량만 보았지만 저는 이 영화에 매료되었습니다. 단순히 재밌다는 감상을 넘어 그 구성과 전개방식과 표현방식에 넋을 잃고 말았죠.

  이 감동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지만, 당시의 특별활동 수준에서 감상에 대한 토론 같은 것을 기대할 순 없었습니다. 영화감상반에서 영화는 안 보고 수다 떨고 잠자는 아이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읽지 못하는 것을 저는 읽을 수 있었거든요. 그 사실은 어린 소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영화가 더욱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험생이 됩니다. 영화를 좋아했던가 않았던가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저도 공부하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꽤 잘 돌아가는 기계였습니다. 내신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모의고사 성적은 더 좋았죠. 공부를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잘하니깐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힘들었습니다. 부모님과 늘상 싸워야 했고,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게 느껴졌죠. 그래도 잘한 덕분에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뒤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반 주부였던 애어른이 성인의 자유를 맛보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2번의 학고를 받고 이 상태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자 군대에 갔습니다. 그리고 전역 후에는 어떻게든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학교에 다녔죠. 그 시절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수험생활은 새 발의 피라고 생각될 정도로 힘들었죠. 저는 어찌어찌 평점 3점을 넘기고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비록 흥청망청 살았다곤 하지만 20대의 망아지 시절을 후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후회가 되더군요. 10년을 거의 채워 졸업하고 나자 사회가 갑갑해져 있었습니다. 취업문은 좁아졌고, 저는 나이가 많았죠. 1년째, 2년째 취업의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떨어지고 나니 명문대 졸업생은 30살이 넘은 백수 아저씨가 되어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 일 없는 백수가 되자 하고 싶은 것이 떠오릅니다. '나는 영화를 참 좋아했었지.' 그래서 감상문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형편없더라고요. 대학 시절에도 글 쓰는 실력이 좋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 실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다 쓴 글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정리되지 않은 생각 더미처럼 보였죠. 그래서 베끼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형식을 따와 글을 써보고자 했죠. 당시에 Eternity님의 깔끔한 글솜씨가 몹시도 부러웠기에 쪽지를 보냈었습니다. 'Eternity님의 형식을 빌어와서 글을 써도 될까요?' Eternity님은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그때부터 그 형식으로 감상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형식만 빌어왔음에도 글은 훨씬 보기 좋아졌고, 스스로 보기에도 글 쓰는 실력이 차츰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그저 꿈이었던, 좋아하기만 했던 영역에 맨손으로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도전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는 대부분 실패였습니다. 나의 노력은 자기만족에 머무를 뿐 다른 이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넣어보자는 생각으로 공모전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그 결과가 실패라는 것은 결과를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글은 제가 보기에도 아직 부족하니까요. 글로 돈을 버는 프로들과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을 초라하게 만드는 명문들이 인터넷에도 넘쳐납니다. 그런 글을 볼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청춘을 위한 강연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은 꿈에 도전하라고 말합니다. 꿈을 꿈으로 두지 말고 현실로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 도전하라는 걸까요? 꿈이 현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 꿈은 영화평론가인데, 그 꿈에 부딪히는 순간 내 어깨가 얼마나 부실하고, 현실의 벽이 얼마나 단단한지 깨달을 뿐입니다. 어린 시절 내가 갖고 있었던 작은 재능이 사회에서 얼마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인지 깨달을 뿐입니다.

  도전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좀 힘들다거나 짜증 나는 수준이 아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데 짜증만 나겠습니까? 도전은 멘탈이 부서지는 실패로 이어집니다. 그 좌절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도전하라고 부추기지 못할 겁니다. "도전하십시오."라는 말은 "좌절하십시오."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계속 도전합니다. 매주 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시지프스마냥 다다를 수 없어 보이는 산꼭대기를 향해 오늘도 바위를 밀어 올립니다. 그리고는 굴러떨어집니다. 그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은 형벌이었습니다. 시지프스는 굴러떨어지기 위해 바위를 밀어 올린 셈입니다. 저도 누군가 무엇을 위해 도전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실패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실패한다고 모두 잃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 발자국 정도 더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자기만족일 뿐이지만 그 작은 전진 덕분에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성공하기만을 바라며 도전한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성공은 하늘의 뜻에 맡겨두고, 대신 더 높은 곳에서 실패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