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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극비수사> - 그 시절에서 무엇을 건졌을까?

※ 이 글은 영화 <극비수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비수사>는 1978년 부산에서 실제 일어난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다. 과거의 사건을 통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서 무엇을 고민하게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향취가 느껴지는 영화

  몇 년 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졸업앨범을 펼쳤을 때 나는 냄새. 다락방에 들어서면 은은하게 몸을 감싸는 냄새. 어린 시절 아끼던 장난감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낼 때 나는 냄새. 누렇게 바래버린 사진에서 나는 냄새... <극비수사>에서는 이런 냄새가 난다. 옛 되고 낡은 냄새가 난다. 영화의 첫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전축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전축은 애물단지로 보일 뿐이었다. 테이프, CD, 그리고 디지털 음원까지 음악 매체의 격변을 거쳐온 아이에게 전축은 크기만 크고 음질은 형편없는 물건이었다. 그 애물단지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잃어버린 것들. 전축뿐이랴. 투박한 공중전화, 촌스러운 포스터, 불량식품. 영화는 잃어버린 것들을 세심하게 묘사하며 그 시절의 향취를 불러일으킨다. 소품만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도 예스럽다. 영화의 마지막, 공형사(김윤석)는 작은 승용차에 아이들을 잔뜩 태우고 가다가 교통경찰이 보이자 단속을 피해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라 한다. 불법이긴 하지만 저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그랬다. <극비수사>에서는 그 시절의 냄새가 난다. 

  냄새는 그립다.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냄새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그리움을 불러오는 법이다. <극비수사>에는 1978년의 부산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녹아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냄새가 난다. 옛 시절의 향취가 느껴진다. 

▲ 공중전화-포스터-하드-윤석 아재가 이루는 옛 향취가 인상적이다.






  시대의 부조리마저 그리워하는가?

  공형사는 기동대 경찰이다. 최루탄을 터뜨리며 데모하는 사람들을 잡는 경찰이다. 데모하다 우연히 잡게 된 수배범을 동료 형사에게 돈 받고 넘기는 일도 한다. 늘 해오던 관행이었기에 죄책감도 없다. 그 와중에 검거한 범인에게 매질도 한다. 납치된 아이의 부모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현금 부자다. 그 시대의 부자들이 깨끗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금다발을 금고에 넣는 부자의 손길은 어쩐지 씁쓸해 보인다. 수사가 시작되자 공형사는 그 돈을 쓰자고 한다. 수사를 극비로 진행하기 위해 더러운 돈을 뿌리라고 한다. 그 돈으로 언론사의 입을 막고, 자신의 상관을 매수하라고 한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는다. 돈 있고, 빽 있으면 이럴 때 쓰라는 것일까? 

  과거의 실제 사건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비교될 만하다. 하지만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확연히 다르다. <살인의 추억>은 시대를 고발한다. 진짜 범인은 무능하고, 부패했던 그 시대였음을 박두만(송강호)의 시선을 통해 자백한다. 그에 반해 <극비수사>는 그 시대의 부조리를 힐난하지 않는다. 돈과 빽으로 시작한 수사는 그 마무리도 더럽게 끝난다. 부패를 감추기 위해 무능한 경찰에게 공이 돌아간다. 스승은 명성을 이용해 제자의 업적을 가로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이 부조리에 항거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다. 

  옛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그 시절의 부조리마저 수긍하게 된 것일까? 추억 보정은 이렇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 경찰이 사람을 쥐어패고도 당당한 시절이 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소신

  부조리로 물꼬를 튼 수사는 부조리에 길이 막히고 만다. 공적만 챙기려는 수사팀의 만행에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고 만다. 그러면서 내가 잡네, 네가 잡네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다. 그 와중에 공형사의 외침이 크게 울린다.
  "에라이 더러븐 섀끼들아. 느그 아가 유괴당해도 이따구로 할래!"

  <극비수사>는 그 시대의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시대 속에서도 빛나던 가치를 끄집어낸다. 바로 소신이다. <극비수사>가 진정 그리워한 것은 그 시절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형사와 도사의 소신이었다. <살인의 추억>이 시대를 고발하는 영화라면, <극비수사>는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떤 자세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살다 보면 고개 숙일 때도 있고, 함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목숨처럼 정말 중요한 가치 앞이라면 굽히지 않는 소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어떤 시대인지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시대더라도 잊어선 안 되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대극이 아니라 시절극이다. 1978년 부산은 시공간적 배경일 뿐, 영화가 말하는 가치는 지금 시대에도 간직해야 할 보편적인 자세이다. 

  도사라는 직업은 이 영화의 주제와 한계를 잘 함축하고 있다. 실상 사주로 아이를 찾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김도사(유해진)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한 가지 일에 진심으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기도가 하늘에 닿구유. 다시 그 기도가 감흥이 돼서 돌아오게 돼 있는 거유."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는 소리랑 비슷한 말이지만, 그 순수한 마음은 인정할 만하다. (기도하는 주체가 자신인가 타인인가에 따라 앞의 두 말은 절실함이 담긴 말이 될 수도 있고, 무책임한 말이 될 수도 있다) 미신은 비이성적이라는 면에서 시대의 부조리와 닮아있다. 그러나 그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더라도 소신이 있었기에 김도사는 아이를 찾는 데 일조하게 된다. 소신은 그 시절의 한계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치 중 하나일 것이다.

▲ 공형사의 외침은 크게 울렸다.





  소신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군가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지나자 '고고70'이 펼쳐졌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정의는 눈이 멀어버렸다. (원래 멀었던가... 이게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ㅠ.ㅠ) 이 속에서 내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 앞에 '소신을 가져라'고 말하는 <극비수사>의 주장은 솔깃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신은 무섭다. 이에 대한 개그맨 이경규의 명언이 있다.


  그렇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정말 무섭다. 극단주의자가 되어 사회에 해악만 끼칠 뿐이다. 더구나 그 해악을 파악하지 못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신이 아니라 고집을 뿐이다. 소신에 대해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올바른 소신을 갖는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나의 소신을 지키면서 상대의 소신을 존중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나아가 나의 소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져야 한다. 공형사와 김도사의 모습에 감동하면서도 선뜻 소신을 갖고 살겠다 말하기 망설여진다. 잘못하면 나의 소신이 고집이 되어 나를 몰아세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드니 영화 속 김도사의 외침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공형사를 향해) 맨날 안에서나 밖에서나 고래고래 고함이나 지르구, 독불장군처럼 자기만 잘난 줄 아니깐 사람들한테 시기나 받고, 그렇게 외톨이로 사는 거 아니요!"

  소신이 없으면 정의가 서지 못하고, 정의가 없으면 올바른 소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옛 시절의 이야기를 보며 지금의 시절을 사는 나는 어떤 소신을 가져야 할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소신이라는 것을 가질 깜냥은 될까? 나는 독불장군, 고집불통, 극단주의자가 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다. 한 번 좁아진 시야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법이다. 똑바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깜냥이 안 되면서 거창한 가치를 이야기해봤자 무엇하랴. 누가 봐도 옳은 일에 대해서만 소신을 갖는 것으로 타협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소신이라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우선이다. 일 보다 가족이 중요하다. 돈 때문에 양심을 팔지 말자. 게으르지 말자. 작작 좀 처먹자. 꾸준히 운동하자... ... ... 적다 보니 역시 난 소신을 갖고 살기에 너무 나약한 것 같다. 포기하면 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