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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징어 게임에서 본 '타인의 친절'

※ 이 글에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흔히 '데스 게임', '배틀로얄' 장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tvN에서 방영한 리얼리티 예능 《더 지니어스》의 살벌한 버전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보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게임'이 너무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등장인물의 두뇌 플레이를 강조하는 '데스 게임' 장르라면, 어떤 게임을 설계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게임은 까놓고 말해 그냥 어린 시절 놀이에 불과하죠. 뛰어난 계산이나 날카로운 통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운이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오징어 게임》의 핵심이 게임 플레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게임 바깥, 정확히는 게임과 게임 사이에 있습니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요소가 바로 주인공 성기훈입니다. 성기훈은 절대로 '데스 게임' 장르에 어울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작은 단점에 불과합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딱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성기훈은 그런 참가자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착하다는 점입니다.

 

성기훈은 너무 착합니다. 호구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착하죠. 실제로 몇몇 게임에서 그 착해빠진 성격 때문에 위기를 겪기도 하죠. 하지만 극이 후반으로 전개될수록 그의 착한 성격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오징어 게임》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다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픽션이고, 이러한 전개는 다분히 작가의 의도와 연결됩니다.

 

작가의 의도를 좀 더 쉽게 파악하고 싶다면 애덤 그랜트의 저서 『기브앤테이크』에 나오는 개념을 알아두면 좋습니다. 『기브앤테이크』에서는 사람을 3가지 종류로 분류합니다.

 

1) 기버 : 많이 베푸는 사람

2) 매처 : 받는 만큼 베푸는 사람

3) 테이커 : 받기만 하는 사람

 

자, 그럼 이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애덤 그랜트에 따르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 (똑똑한)기버

2) 매처

3) 테이커

4) (멍청한)기버

 

재밌게도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위 4가지 종류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알리는 《오징어 게임》에서 제일 먼저 '선행'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즉, 그는 기본적으로 기버입니다. 하지만 구슬치기에서 게임의 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기버였지만, 멍청한 기버였던 셈이죠.

 

장덕수는 전형적인 테이커입니다. 베푸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인물이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배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죠. 하지만 그러한 성향 때문에 결국 탈락하게 됩니다. 배신의 결과가 복수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합니다.

 

조상우는 매처입니다. 테이커처럼 무작정 이득만 취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당히 돕습니다. 하지만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는 배신할 줄도 압니다. 우승자에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는 따로 있었죠.

 

우승자는 바로 성기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서 말한 대로 호구 소리가 어울릴 정도의 기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리와 달랐죠. 그는 게임의 룰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또한 상대의 악의를 파악할 줄 아는 눈치도 있었죠. 그럼에도 그의 선행은 대부분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착한 마음씨 덕분에 그는 최종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기훈은 조상우를 제압한 후 게임 포기를 선택합니다. 사실상 패배와 다름없는 무승부를 선택하죠. 하지만 그 순간 조상우가 스스로 패배를 선택하면서 성기훈을 승자로 만듭니다. 어째서 조상우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성기훈의 선함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기훈이 우승해서 거액의 상금을 얻는다면 분명 자신의 어머니도 도와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죠. 즉, 자신이 먼저 우승이라는 혜택을 베풀어서 상대의 보답을 바라는 호혜적인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 『타인의 친절』에는 기버가 승리하는 방식을 수학적으로 보여주는 게임 이론 전략이 등장합니다. 바로 팃포탯(tit-for-tat)입니다. 팃포탯은 게임 이론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보여주는 전략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상호 협력 상태로 시작하며, 상대가 협력하면 자신도 협력하여 윈-윈 관계를 만들고, 상대가 배반하면 자신도 배반하여 상대가 더는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배반한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흔쾌히 협력하여 윈-윈 상태를 만듭니다. 

 

하지만 무적으로 보였던 팃포탯을 능가하는 전략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너그러운 버전의 팃포탯이었죠. 팃포탯은 매처입니다.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죠. 반면, 너그러운 팃포탯은 기버입니다. 상대의 배반을 이따금 용서하는 관용을 보여줍니다. 너그러운 팃포탯이 오리지널 팃포탯보다 강력하다는 결론은 매처보다 기버가 더 크게 성공한다는 애덤 그랜트의 결론과도 연결되죠.

 

(이를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다음 링크를 참고하세요 : https://osori.github.io/trust-ko)

 

『타인의 친절』은 한발 더 나아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평판'의 역할도 강조합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르면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매우 큰 친절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가치 체감의 비대칭이 선행을 자원적으로 유리한 행동으로 만들죠.

 

또한 사람들은 평판을 고려합니다. 좋은 평판을 가지면 나중에 도움을 되돌려받을 수 있으니(호혜주의) 사람들은 평판을 생각해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따라서 너그러움이 전염병처럼 사회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그렇게 인간은 타인에게 기꺼이 친절함을 베푸는 존재로 진화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즉, 우리는 본능적으로 친절한 존재인 셈이죠.

 

저는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호구라고 생각하는 선행들이 사실은 우리를 최후의 순간에 승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징어 게임》에서 개별 게임의 플레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여러 게임을 연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팃포탯 전략이 적용되려면 '반복 게임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게임 자체가 아니라 게임과 게임 사이에서 인물들 간에 오가는 협력과 배신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태도는 바로 친절함입니다.

 

친절하세요. 단, 똑똑하게 친절하세요. 그것이 외딴 섬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게임보다 더 잔혹해지기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입니다. 마지막으로 친절함에 관하여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대사를 하나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을 만날 때면 저는 항상 이 대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올바름과 친절함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하라."

- 영화 《원더》 중에서

 

덧. 강새벽은 《오징어 게임》에서 거의 유일했던 입체적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인물들이 (주인공 포함) 원래 성격에서 큰 변화가 없는 평면적인 인물이었던 데 반해, 강새벽은 처음에 테이커로 시작해서 마지막엔 기버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녀를 기버로 이끈 데는 지영과의 만남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고요.

 

덧2. 성기훈과 오일남의 마지막 대화도 작품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평생 사람을 믿지 않았던 오일남과 끝까지 사람을 믿었던 성기훈. 결국 마지막 승부의 승자도 성기훈이었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결국 친절하니까요.

 

이기적인 인간은

어떻게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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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드라마 《오징어 게임》

 

※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