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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과 유혹

"넌 나를 왜 좋아해?"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변


정기적이지는 않지만, 쿨타임이 차면 꼬박꼬박 듣는 질문이 있다. "자기는 나를 왜 좋아해?" 그러면 나는 곧장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털어놓는다. "저번에 얘기해줬잖아..." 하지만 그녀는 얄궂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한다. "또 듣고 싶으니까 그렇지~" 대답을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똑같은 레퍼토리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난감함.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이유를 말한다. "일단, 예쁘니까." 그러면 눈동자를 반짝이며 재촉하기 시작한다. "또~?"


그렇게 매번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주지만, 사실 그 모든 이유는 거짓말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런 이유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무슨 이유로? 굳이 대라면 100개도 댈 수 있다. 그 덕분에 얄궂은 질문에 매번 대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핑계 같은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게 된 진짜 이유는... 그냥 좋아하게 되어서라고 생각한다.



"왜 이혼했는데요?"


"내내 싸움만 했어. 아침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악을 쓰고 욕지거리를 해대고 그 인간은 폭력도 휘둘렀어. 하기야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그럼, 결혼은 왜?"


"사랑했으니까. 홀딱 빠졌더랬어."

-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113~114p


좋아하는데, 사랑하는데, 홀딱 빠져버리는데 과연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자주 환희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얼굴에서 빛이 났다느니, 무채색이 컬러로 바뀌었다느니 하는 찬란한 감각이라고 말한다. 느끼는 것, 감성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하지만 이유라는 단어는 어떤가? 생각하는 것, 따져보는 것, 이성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이성을 이성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쓰곤 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어딘가 안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꺼이 100가지 이유를 대지만, 솔직히 진짜 이유는 없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뿐이다.


"홍시입니다."


"방금 뭐라 했느냐?"


"설당이 아니고 홍시옵니다."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 드라마 <대장금>, 5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의 주인공, 아오이가 사귀는 남자는 마빈이라는 미국인이다. 뭐랄까... 이 마빈이라는 사내는 비현실적으로 완벽하다. 돈도 많고, 몸도 좋고(남자는 허벅지), 아마 얼굴도 잘생겼겠지. 매너도 좋고, 성격도 좋고,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아오이는 마빈을 사랑할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되뇐다. 그때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오이가 마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오이는 과거의 남자 쥰세이를 그리워한다. (마빈을 두고? 진짜 못됐...) 마빈과 같은 집에 머물고,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도, 아오이는 쥰세이의 흔적 속에서 살았다. (개못됐...) 하지만 어째서 아오이가 쥰세이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서일까? 성격이 섬세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소설은 쥰세이와의 만남을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아오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쥰세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어.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이야."

- 영화 <캐롤>


맥스 슐만의 소설 제목대로 사랑은 오류다. 비이성적이다. 이것저것 따져보는 그런 게 아니다. (결혼은 그럴 필요가 있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다.) 바라고,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아닌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고, 누가 봐도 완벽한 상대에게 시큰둥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저런 놈들도 커플인데, 나는 왜...'라는 푸념은 하지 말자. 남의 연애 상대를 두고 '왜 저런 애를?'이라고 말하지 말자. 지가 좋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조금 험악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뇌절이다. 그게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될 사랑까지 저지르겠는가? 당사자도 그게 나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냥 빠져들었단다. 홀딱...


그럼에도 사람은 사랑의 이유를 찾는다. 운으로 벌어진 일도 인과관계를 찾는데, 사랑처럼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냥 벌어졌다는 사실을 곱게 인정할리가 없다. 그렇게 이유를 듣고 나면 그제서야 안심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도 기꺼이 난감한 표정과 함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단 예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