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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어째서 우리는 폭군에 끌리는가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라는 드라마를 아는가? 넷플릭스에서 독점 공개한 정치 드라마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발언에 따르면 실제 워싱턴 정치와 거의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수작 중의 수작이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미국 하원을 하우스(Hous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제목은 그 실체가 마치 카드 게임처럼 속임수와 권모술수가 판치는 음모의 공간임을 의미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우스 오브 카드>는 '미국 정치가 얼마나 시궁창인가?'를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프랭크 언더우드는 전형적인 독재자이다. 백악관이 약속했던 국무장관직을 다른 인물에게 넘기자 이에 앙심을 품고 모든 권력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는 대통령과 그 측근을 속여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언론을 조종해 여론을 조작하며, 필요하다면 암살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옹호할 수 없고, 사탄도 한 수 배우고 가야 할 것 같은 악랄한 지혜로 똘똘 뭉친 악당이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상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프랭크 언더우드는 음모의 달인이지만, 그의 계획은 그다지 철저하지 못하다. 거짓의 장막은 언제라도 진실의 바람 앞에 날아갈 것처럼 불안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정적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뒤에서는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들이 사냥개처럼 쫓아오고 있다. 프랭크 언더우드는 이 모든 위기를 임기응변과 거짓말로 모면한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임기응변은 더 큰 위기를 불러온다. 그 위기를 하나하나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내가 왜 저런 악당을 응원하고 있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악당을 증오하면서 동시에 사랑한다. 훌륭한 영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매력적인 악당이 함께 등장할 때 이야기는 걸작으로 남는다. 어째서 우리는 악당에 매료되는가? 폭군이 지배자에 오르는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가? 



스티븐 그린블랫의 저서 <폭군>은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퓰리처상과 홀베르그상(인문학의 노벨상)의 수상자이자 세계적인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다름 아닌 폭군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왜 다수의 사람이 다 알면서도 독재자의 뻔한 거짓말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어떻게 리처드 3세나 맥베스 같은 인물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가?

- <폭군>, 9p


악당에 매료되는 것은 최근에 나타난 유행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4세기 전에도 여전히 악당은 매력적이어야 했다. (하긴 나쁜 남자가 인기가 많지...) 그리고 그 악당이 펼치는 권모술수는 400년 후에 등장한 <하우스 오브 카드>와 놀랍게도 유사한 점이 많다. 넷플릭스에 프랭크 언더우드가 있다면, 글로브 극장*에는 리처드 3세가 있었다. 이 둘의 행보는 평행이론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소름 돋는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1598년에 런던에 지어진 극장.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초연된 극장으로 알려졌다.


- <폭군>, 86p


셰익스피어가 묘사하는 리처드 3세의 성격은 판박이처럼 프랭크 언더우드와 겹쳐진다. 두 사람은 모두 타고난 거짓말쟁이에, 성적으로 문란했으며, 무엇보다도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아마 이런 사람이 실제로 주변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멀리하거나 반대로 싸워야 할 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나서야 때늦은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관객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매료되는 걸까?


그런데 아주 괴상하게도 이 악당이 여러 세대의 배우, 연극 관람자, 독자들을 매혹해 왔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뭔가가 그가 왕좌에 오르는 저 끔찍한 과정을 매 순간 즐기고 있는 것이다.

- <폭군>, 115p


독재자가 권좌에 오른다는 것은 재앙이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약간의 코미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운명이 섬뜩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남들보다 한 수 위의 술수를 보이고 거세게 몰아치고 음모를 꾸미고 배신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도덕적 휴가를 즐기게 된다. 

- <폭군>, 119p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리처드 3세


<폭군>의 저자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러한 심리를 '도덕적 휴가'라고 말한다. 리처드 3세의 악행은 관객의 심중에 어떤 공모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속에 숨길 수밖에 없는 공격성을 대신 배출해주는 즐거움,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통쾌함,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그렇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폭군이라는 이름의 반(反)자아가 존재한다. 평소에는 이성의 힘으로 꾹꾹 누르고 있지만,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순간, 폭군은 그 틈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폭군의 해방을 대리만족하며 기꺼이 악행이 성공하길 바라게 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폭군>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독재자가 세상을 지배하는지 고발한다. 그 와중에 대중이 폭군에 매료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누구도 권력의 심연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만약 심연에 잡아먹힌다면? 나도 당신도 폭군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많은 폭군이 존재한다. 가부장적인 남편, 부하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상사, 대학원생을 착취하는 교수... 아무리 작더라도 권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든 폭군이 고개를 내밀 여지가 존재한다. 


어째서 우리는 폭군에 매료되는가? 그것이 우리의 본성 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폭군을 보며 해방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가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폭군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폭군이란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떻게 탄생하는지 알아야 한다. 권력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이를 실제로 체험하듯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책 <폭군>은 그 생생함 속에 담긴 교훈을 치밀하고 날카로운 비평으로 풀어낸다. 이를 통해 문학적 소양과 내적 성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간만에 읽고나서 제대로 공부했다는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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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