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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현상학과 심리학 - 자기계발서는 왜 쓸모없는가?


  0. 들어가면서

  인터넷 여론은 자기계발서가 냄비받침이나 불쏘시개 정도의 가치 밖에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아직도 SNS와 블로그에서 자기계발서 찬양이 멈추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상에 대해 깊이 고찰하면 뭔가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면적 발전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면의 발전을 이루는 매커니즘은 그 사상 자체와는 거의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구약처럼 설화를 모아놓은 책에서도 깨달음은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결국 과학적,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그 글은 개인적 깨달음, 즉 '수필'이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자기개발 '이론'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글은 인간 심리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기계발서의 부당함을 근본에서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 바탕이 되는 철학 사조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진짜 자기계발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자 한다.





  1. 인간에게 의지란 존재하는가?

  자기계발서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있다. 정신력, 노력, 의지력 따위가 그것이다. 힐링, 응원, 자신감, 자존감 따위의 것들도 맥락상 앞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위로를 통해 의지력을 고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언급한 가치들을 전부 포괄하는 자기계발서 최고의 명문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신력 드립과 의지 드립이 난무하자, 대중은 그 내용의 부당함에 많은 비판을 해왔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덮어씌우거나, 그저 열심히 노력하라고만 말하는 것이(1만 시간 드립 등) 대표적인 비판 타깃이다.1) 하지만 의지드립은 내용의 부당함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부분부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경학의 발달은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에 대해 실험적인 근거를 확보해주었다. 18세기에는 정신이 대뇌의 물질 작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설에 힘을 주는 과학적 발견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빗 헉슬리는 '뇌가 손상을 받으면 인식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인식이라는 것은 혹시 신경계를 타고 다니는 어떤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19세기에는 뇌의 일부인 척수 신경의 동작 원리가 인간과 하등 동물 사이에서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면술이나 몽유병 환자의 관찰을 통해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침내 토마스 헉슬리 등의 과학자들로부터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우리가 의식이나 자아라고 믿는 것은 뇌가 만든 log file*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토마타 : 입력과 출력만을 고려한 가상의 기계)
  *log file : 컴퓨터 시스템의 모든 사용내역을 기록하고 있는 파일)

  이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관찰은 2007년의 헤인즈의 연구결과이다.11)12) 그는 인간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순간보다 뇌의 실제 동작이 최대 10초나 빠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측정하였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뱀을 맞닥뜨린 상황을 가정해 보자.

  전통적인 자유의지 개념은 뱀을 맞닥뜨린 순간 공포를 느끼고 그로인해 동공 확대, 식은땀, 심장박동증가 등의 반응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정서유발 요소(뱀)} → {의식적 생각(공포)} → {무의식적 신경 활동(동공 확대 등)}


  하지만 헤인즈의 실험을 적용하면 이 순서는 반대가 된다. 동공 확대, 식은땀, 심장박동이 선행하고 이를 파악하여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정서유발 요소(뱀)} → {무의식적 신경 활동(동공 확대 등)} → {의식적 생각(공포)}


  캐시모어 논문은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2)

  이 같은 실험결과는 의학적 발견을 넘어 자아 또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뒤엎어버린다. 의지가 없으니 영혼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이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시각이 틀렸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험결과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 철학은 없는걸까? 이에 대한 답으로 나는 메를로-퐁티를 소개하고자 한다.






  2. 몸의 현상학 -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03.14 ~ 1961.05.04)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프랑스 철학자로 고등사범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때 장 폴 사르트르와 만나, 이후 실존주의 및 현상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1930년, 22세의 나이로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_-).  1945년 리옹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저인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을 발표하여 일약 현상학과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가 된다. 원래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으나, 사르트르가 한국전쟁에서 북한/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자 이에 환멸을 느껴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를 끊고 사르트르와 결별하게 된다. (그럼 사르트르는 빨갱이??) 이후 소르본느 대학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를 역임하다, 1961년, 5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그의 철학 사상은 당시까지의 관념론과 실재론의 전제를 모두 배격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인식 도구로서의 '지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철학적인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3)

  저걸로는 무슨 소리인지 나도 모르겠으니,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플라톤, 사르트르, 그리고 메를로-퐁티를 비교해보자.

  플라톤은 만물의 본질로서 이데아를 상정하고, 현실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원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정확한 도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완벽한 원은 그릴 수 없다.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어딘가 찌그러져 있음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원을 알고 있다. 이 완벽한 원이 '원의 이데아'이고, 우리가 그리는 원은 '원의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이번에는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는 의자(현상)는 '앉기'라는 '의자의 이데아'(본질)를 모방하여 되도록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본질과 현상이 구분되는 이원론적 관념이며, 이후 서양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플라톤

(의자의 이데아 = 본질) → 모방 → (의자 = 현상)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고 도구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사상과 거의 동일하다. 다시 의자로 예를 들어보자.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따라서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의자가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의자의 형태를 벗어나 있더라도 앉을 수 있고, 앉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의자인 것이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도구의 형태(현상)와 상관없이 목적에 따라 의자인지 아닌지(본질)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자와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결정되지 않은데다 고정된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본질)판단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현상)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기존의 이원론적 관념의 순서를 역전하는 사상을 보여준다.4)


사르트르

도구 : (본질) → (현상)

인간 : {실존(현상)} → (본질)


  사르트르가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역전시켰다면 메를로-퐁티는 현상이 본질을 유도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몸'이다. 또 다시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그 모양이 대부분 비슷하다. 등받이 의자의 경우라면 소문자 h 모양으로 생겼을 것이고, 등받이가 없다면 윗면이 넓은 원통형의 꼴을 유지한다. 중심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물건을 의자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다. (앉으면 피똥싼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김새 때문이다. 인간은 다리가 길고, 척추를 가지고 있으며, 엉덩이가 넓적하다.(그 가운데 항문이 있다...) 따라서 엉덩이를 받쳐줄 평평한 널판지와 다리를 굽힐 수 있는 일정 수준의 높이가 필요하다. 척추를 지탱해 줄 등받이까지 있다면 더욱 좋다. 의자의 목적은 '앉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의자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 몸의 생김새를 근거로 상정했을 때만이 의자라는 도구의 본질을 보다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즉, 인간의 몸(현상)이 의자인지 아닌지(본질)를 구분하는 근거가 된다. 현상이 본질을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유도된 본질은 사르트르의 논리대로 의자의 형태라는 현상을 유도한다. 이처럼 메를로-퐁티는 본질과 현상을 상응하는 관계로 놓아 이원론적 관념을 극복하고자 했다. 


메를로-퐁티

{몸(현상)} ↔ (본질)


  위의 설명처럼 메를로-퐁티는 철학의 근원을 '몸'으로 상정한다. 그에게 몸이란 현상이자 본질이며, 또한 판단의 근거였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몸이야 말로 모든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몸은 세상과 자신의 경계, 즉 존재의 경계가 된다. 그리고 그 안은 비어있지 않고 생명으로 꽉 차있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는 의식이 텅 비어있다고 하였다.) '선과 악' 같은 가치 판단의 발현은 바로 이 생명의 발현인 셈이다. 따라서 몸과 생명에 이로운 것은 선이고, 해로운 것은 악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둔다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는 애국주의나 전체주의는 악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은 '설탕 한 줌'과는 다르게 사유와 반성을 한다. 인간의 이러한 정신적 행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정신-사유-반성'의 기능은 본래의 상태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기능들이 발생하는 원천을 그러한 기능이 아직 발현되지 않고 '녹아 있는 상태의 몸'이라고 보았다. 정신이 몸과 구분되어 몸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의 몸에 정신적인 힘 또는 의식적인 힘이 배어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메를로-퐁티는 ‘체화된 의식(conscience incarnée)’이라 하였다. 단어는 '의식'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 의식을 행하는 몸을 뜻하는 말이다. 

  경기 중에 공을 드리블하는 메시를 생각해보자. 그가 '지금 오른발의 아웃프런트로, 이 정도의 힘과 속도로 드리블 하면 공과 나 사이의 거리는 4걸음이 나올거야.'라고 생각하며 드리블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순간순간 몸 자체가 전체 상황에 맞추어 미처 생각도 하기전에 공을 치고 달리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 악기를 연주할 때, 자전거를 탈 때, 수영을 할 때 우리는 매순간 '어떻게 해야지'하고 반성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 내용을 몸에 명령하지 않는다. 몸이 이미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의식은 아무생각이 없지만, '몸이 하는 생각'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체화된 의식’ 즉, 몸이 하는 생각을 이미 한 것이다.5) 

  메를로-퐁티의 ‘체화된 의식’ 은 신경학에서 말하는 ‘오토마타 인간’ 과 매우 흡사하다. 아니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토마타 인간'이 인간 정신에 대한 믿음을 앗아가는 혼란을 가져 올 때,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그러한 '오토마타 인간'이 곧 본질이며 또한 자아라는 설득을 한다. 이쯤 되면 인간의 의지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기대고 있는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그 기획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라 봐야한다. 이것이 시작에서 언급한 자기계발서가 근본부터 가지고 있는 부당함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기계발의 기회는 정녕 없는 것일까? 나에겐 의지도 없고, 나의 본질이 단백질 덩어리 몸뚱아리라면, 우리의 정신(메를로-퐁티에 의하면 몸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기능)은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 것일까? 그럼 이제 진짜 자기개발의 방법을 고민해보자.

▲ 몸이 본질임을 보여준 영화 <그녀에게>






  3.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가 의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체화된 몸의 반응이라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몸의 반응을 강제하여 의식적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앞서 뱀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정서를 의식적으로 깨닫기 전에 몸으로 먼저 반응한다. 


(감정 유발) → (신체 변화) → (감정 인식)


  위와 같은 순서는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그러니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 웃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며, 화가 나서 인상 쓴다기보다는 인상을 쓰고 있어 화가 나는 것이다.

  감정의 유발과 감정의 인지 사이에 이처럼 신체의 변화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 조절을 통해서 감정을 조절할 수도 있다. 널리 알려진 연애학개론 중에 '흔들다리의 착각'이라는 것이 있다. 높은 흔들다리 위에서 고백을 하면 상대는 자신이 높은 곳에 있다는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것인지, 상대방이 고백했기 때문에 두근거리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흔들다리 위에서 고백하면 성공확률이 높다고 한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이긴 하지만 이 이론의 근거는 신경학적으로 완벽히 증명되었다.(-_-;;)

  이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도 존재한다. 간단히 볼펜을 입에 무는 방법에 따라 얼굴 근육에 차이를 줄 수 있다. 한쪽은 입술만으로 볼펜을 물어 입이 삐죽 나온 부정적인 표정을 만들고, 다른 한쪽은 치아로만 볼펜을 물어 웃음 근육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사진을 보게 하면서 사진 속 사람들의 감정 상태에 대해 추측해보도록 실험을 진행했다.  예상대로 막대를 치아로 물고 있던 피험자들은 사진 속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긍정적 정서가 유발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 상태 역시 긍정적일 것으로 예측하는 경향이 높았다. 이러한 결과는 스스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표정에서도 더 많은 행복을 읽고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6)


  또 다른 실험에서는 피험자들에게 추상화 그림을 보여주며 절반은 미대 신입생의 그림이라고 하였고, 절반은 유명작가의 작품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였다. 부정적 정서가 유발된 집단에서는 해외 유명작가의 그림을 훨씬 더 선호하였다. 외부적 권위에 대한 의존도와 순응도가 훨씬 높은 것이다. 반면에 긍정적 정서가 유발된 집단에서는 해외 유명작가와 미대 신입생의 작품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긍정적 정서가 유발되면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의 주관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심지어 전체적인 선호도의 총합도 긍정적 정서가 유발된 쪽이 월등히 높았다.7)

  실험 결과 몸이 변하면 마음도 따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밝은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다. (이 맥락으로 바라보자면 슬픈일이 있는 사람에게 '울어서 풀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울면 더 슬퍼질 뿐이다. 이럴 땐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울게 하느니 차라리 강제로 개콘을 10시간 시청하게 하는 것이 낫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우리가 자기계발을 통해 얻고자 하는 긍정적 정서들, 끈기, 노력, 행복, 자신감 등을 함양하기 위해 정신적인 깨우침보다 몸으로의 체득이 더욱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럼 무엇을 체득하면 정신적 발전을 이룰수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정서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뇌를 긍정적인 뇌로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뇌를 긍정적인 뇌로 바꿀 수 있을까? 그 구체적 방안을 설명하기 전에 뇌가 어떤식으로 학습하고 발전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먼저 이해해보자. (사실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다음에 써야될 것 같...)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배움을 통해 얻어지는 명시적 지식과 익힘을 통해 얻어지는 암묵적 지식이다. 명시적 지식은 머리로 배우는 것이며 암기하는 것이다. 암묵적 지식은 몸으로 익혀야 하며 습관을 들여야 내 것이 된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의 학(學)이 명시적 지식이고, 습(習)은 암묵적 지식의 체화다. 암묵적 지식은 이론을 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악기 다루는 것, 자전거 타는 것 처럼 반복적으로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암묵적 지식은 어떤 방식으로 '몸에 배게' 될까?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배는 것이 아니라 뇌에 새겨지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뇌 신경들 사이에 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신경연결망이 새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신경망이 형성되려면 뉴런의 수상돌기와 축색돌기를 이어주는 시냅스 부분에 새로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 일정한 형태로 '자라야' 한다.8) 그렇기 때문에 훈련과 연습이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2007년에 발표된 한 뇌 영상 연구에 따르면 프로 골프 선수들과 아마추어 사이에는 공을 치는 순간에 뇌를 사용하는 방식과 부위가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9) 아마추어 골퍼들은 스윙할 때 뇌의 다양한 부위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스윙은 여전히 명시적 지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허리를 이용해서...' 등등 배운 내용을 머리속으로 되새기며 공을 친다. 이에 반해 프로 골퍼들은 아주 특정한 부위의 뇌만을 사용한다. 뇌를 훨씬 적게 사용하는 것이다. 무림 고수들이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치려면 스윙이라는 동작이 몸에 완전히 배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뇌에 그러한 동작을 가능하게 하는 신경망 구조가 잘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부단한 훈련으로만 가능한 일이다.10)

  명시적 지식으로 깨우침을 알아봤자, 그것이 뇌를 긍정적인 뇌로 변화시켜주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아니면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명언을 정하고 그것이 체화될때까지 꾸준히 반복하고 마음에 되새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이러한 관념이 체화되려면 가시적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3주, 완전히 체득되는 데에는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논어에 나온 공자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론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깨우침만으로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학(學) 뿐만 아니라 습(習)도 필요하다. 아니 습(習)이 더 중요하다.

▲ 니들이 좋아하는 자기계발서 2500년 전에 써놨는데 왜 읽지를 않니...

(공자님. 죄송합니다. 저도 안 읽었어요. 드문드문 읽어서 죄송합니다;;)





  4. 마치며...

  시작은 자기계발서에 대한 도발적 질문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핑계에 가깝다. 이 글의 본질은 자기계발서 비판보다는 현재의 신경학 연구와 이를 뒷받침 하는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소개하는 데 있었다. 나아가 올바른 자기계발 자세 즉, 긍정성을 끌어올리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써야 완성된 글이 되겠지만 너무 길어져 다음 기회를 노려 작성해야 될 것 같다.

  사실 이 글은 3년 전에 썼어야 할 글이다. 글쓴이 본인이야 말로 머리속에 이론만 넣어놓은 채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을 정리하고, 체득해야할 과제를 선정해서 꾸준히 지켰어야 하는데 게을러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최근에 생각을 많이 할 기회가 생겨,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중에 잊고 있었던 메를로-퐁티와 회복탄력성의 개념이 떠올랐다. 배가 고파 밤잠을 설치게 되어, 그 시간을 아끼고자 숙원이었던 글을 써본다. (살빼겠다고 이게 무슨 고생인지 ㅠ,ㅠ)





  5. 참조

1) 리그베다 위키. 자기개발서.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90%EA%B8%B0%EA%B0%9C%EB%B0%9C%EC%84%9C)

2) OrBef. 자유 의지와 영혼과 자아와 뇌. 우리는 기계인가?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43969)

3) 리그베다 위키. 모리스 메를로퐁티.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AA%A8%EB%A6%AC%EC%8A%A4%20%EB%A9%94%EB%A5%BC%EB%A1%9C%ED%90%81%ED%8B%B0)

4) 리그베다 위키. 장 폴 사르트르.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A5%20%ED%8F%B4%20%EC%82%AC%EB%A5%B4%ED%8A%B8%EB%A5%B4)

5) 조광제.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

6) 황유선, 신우열, 김주환. (2010). 너의 표정을 통해 읽는 것은 나의 감정이다 : 감정의 변화가 상대방의 표정 인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커뮤니케이션학 연구』. 18권 1호, 247-271

7) 민지혜, 신우열, 김주환, (2010). 긍정적 정서는 우리의 판단을 자유롭게 한다 : 유발된 정서가 맥락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한국언론학보』. 54권 1호. 293-314

8) Kandel, E. R. (2006). In search of memory : The emergence of new science of mind. New York : Norton.

9) Miltin, J., Solodkin, A., Hlustik, P., & Small, S, L. (2007). The mind of expert motor performance is cool and focused. Neuroimage, 35. 804-813.

10) 김주환. (2011).『회복탄력성』. 위즈덤하우스.

11) Chun Siong Soon, Marcel Brass, Hans-Jochen Heinze & John-Dylan Haynes (2008) Unconscious determinants of free decisions in the human brain
http://www.nature.com/articles/nn.2112.epdf?referrer_access_token=wZWXqhqpr6u61E6yLQmXsNRgN0jAjWel9jnR3ZoTv0PBIwsH4Z4IyKXAf3vYLV6QSVzX7fKjsxhHxC-fTVzYVuoLn3I2tnywXhvWGZu1DHs%3D

12) http://www.nature.com/news/2011/110831/full/477023a.html 





※ 이 글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엄마, 아빠, 여친)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를 추구하기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등장하는 철학 사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더불어 그러한 사안에 대해 댓글로 보완/정정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이 글의 대부분의 내용은 김주환 교수님의 책『회복탄력성』과 그의 수업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