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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여성 없는 천만 영화" 기사를 보고

  여성 신문은 "여성 없는 '천만 영화'"라는 제목의 카드 뉴스를 발행했다. (링크) 언론사가 '알탕'이라는 혐오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그저 무시할 내용만 적힌 것은 아니다. 이 기사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이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글을 쓴다.






  모순이거나, 오판이거나


  혐오 용어를 단순히 참조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위 기사는 언론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언론의 자질조차 없어 보인다. 이 짧은 카드 뉴스 안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성 없는 '천만 영화'" 中


참조 : 통계청 블로그 "좀비부터 옹주까지, 극장행 이끄는 한국 영화


  내가 알기로 국내에서 극장가 큰 손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흥행하려면 20대 여성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10년 넘게 들었다. 실제 통계도 다르지 않다. CGV 리서치센터의 빅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16년 여름에도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20대 여성이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천만 영화가 "남성 관객의 구미에 맞는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사 말미에는 여성을 "적극적인 문화 향유층"이라고 말한다. 결국, 남성 취향의 영화가 대부분인 현실을 만든 것은 여성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왜 남성 탓을 하고, 남성 혐오 용어를 사용하는 걸까? "이제 여성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요?"라는 마무리가 허무하게 다가온다. '알탕'이야말로 여성의 선택이자 여성의 목소리이지 않나.


  그나마 위 기사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려면 "여성 취향의 영화가 재미없다"고 여기는 주체에 제작자뿐 아니라 관객도 포함되어야 한다. 범사회적 미소지니가 여성 취향을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남성 취향의 영화만 나온다고 말하면 최소한 논리적 모순은 없다. 남성 취향을 선택하는 여성 또한 그러한 관습에 물들었다 말하면 된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셈이다.


  우선, 대중을 개돼지로 보는 발언이다. 도대체 한국 관객은 얼마나 우매한 걸까? 얼마나 우매하면 재미있다, 재미없다 주관적 판단도 못 하고 취향조차 관습에 끌려가는가? 그렇지 않다.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흥행하는 영화는 흥행하는 이유가 있다. 500만 정도면 배급사의 몰아주기와 무자비한 마케팅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만은? 천만은 재미없으면 불가능하다. 설령 재미의 근간이 국뽕이니, 신파니 수준 낮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관객의 감성을 자극했을 때야 천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만이 상징적인 것이다. 계산기 두드리듯 흥행 요소를 골라 담는다고 천만이 떡하니 찍히면 영화사가 무슨 걱정이 있겠나. 예) <군함도>


  또한 여성 취향 흥행작도 존재한다. 천만 영화 중에도 <왕의 남자>나 <겨울 왕국>은 여성 취향이 강한 편이다. <암살>의 주인공은 여성이었다. <도둑들>에서도 여성의 비중은 컸다. 비록 천만은 아니지만, <써니> 같은 흥행작도 존재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처럼 노골적인 여성향 영화도 흥행했다. 이런 예시는 쏙 빼놓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례만 가져와 여성 취향의 영화가 인기 없다고 오판하면 곤란하다.


  모순이거나, 오판이거나. 어느 쪽으로 봐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제발 생각을 하고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






  알탕 영화?


  기자가 생각이 없기도 하겠지만, 횡설수설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나는 '알탕 영화'라는 말을 꼽고 싶다. 신조어라 그런지 용어의 의미가 중구난방이다. 도대체 '알탕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평론가 듀나는 "알탕영화는 남자들만 부글거리는 영화란 뜻"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같은 영화도 알탕 영화일까? 또한 알탕 영화는 여성 혐오적 묘사나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카드 뉴스 첫 장에 떡하고 박아넣은 천만 영화들에 과연 여성 혐오적 묘사나 캐릭터가 존재하나? 십분 양보해서 <실미도>나 <베테랑>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왕의 남자>, <명량>, <택시운전사>는 무슨 죄인가?


  최소한 언론에서 사용할 생각이라면 알탕 영화라는 단어를 정확히 정의하기 바란다. 남성만 등장하는 경우를 지칭하거나, 아니면 여성 혐오적 묘사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지칭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알탕 영화라 부르면서 애꿎은 영화에 여성 혐오의 굴레를 씌워서는 곤란하다. 남성만 등장한다고 해서 여성 혐오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알탕 영화를 여성 혐오적 묘사나 캐릭터가 존재하는 영화로 규정해보자. 나는 이것도 그다지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 작품이 여성 혐오를 장려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고, 피해 장면을 필름에 담았다고 하여 이를 여성 혐오라 보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강간 장면이 등장한다고 강간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맥락 없이 강간 장면을 삽입하거나, 이를 쾌락적이고 관음적인 시선으로 포착했다면 이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포르노나 스너프와 다름없다. 다만, 근래에는 비판의 정도가 지나쳐 보인다. 심지어 이런 장면을 감독이 알아서 자제하라며 '자기 검열'까지 요구한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를 비판하며 훌륭한 자기 검열의 예시로 셰리던 감독의 <윈드 리버>를 들었다. (링크) 그런데 우습게도 <윈드 리버>의 검열은 감독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수입사가 강간 장면이 불편하다고 판단하여 해당 장면을 삭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15세 등급을 받았다. 정말 양심이 불편했던 건지, 지갑 사정이 불편했던 건지 모르겠다) 후에 개봉한, 북미 개봉 버전과 같은, 감독판에는 강간 장면이 담겨 있었다. (링크) 듀나의 논리에 따르면 셰리던 감독도 젠더 감수성 부족한 알탕 영화 감독이 되는 걸까?


  이런 소리를 하면 "네가 젠더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런다.", "여성의 기분을 하나도 생각지 않는다.", "공부 좀 더 해라." 같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여성 혐오를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묘사한 것만으로 여성 혐오가 되는 건가? 이에 대한 좋은 대답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여성 캐릭터 '조이'를 "문자 그대로 꼭두각시에 불과한 성매매 종사자"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감독 드니 빌뇌브는 인터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는 영화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매우 민감합니다. 9편의 감독작 중 6편에서 여성이 주인공이었죠. <블레이드 러너> 1편은 누아르 적인 미학으로 인해 여성에게 꽤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인물에 깊이를 주기 위해 노력했고, 조이의 경우 그녀가 어떻게 진화하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란 무엇일까요? 영화는 사회의 거울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내일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영화를 본다면 오늘의 그림자를 탐구하게 될 겁니다."(링크)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 혐오를 묘사한 것만으로 문제라는 비판이 마냥 정당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조심스럽다. 묘사의 정도에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강간 장면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것은 여성 혐오가 아닙니다."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이는 "이것은 여성 혐오다."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애매한 일이다. 윤리적 판단이지만, 동시에 자의적 판단이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고 구분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작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선의껏 해석하는 게 한계가 아닐까 한다. 모르면 겸손해야 한다. 자기도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면서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자기 검열해라 하는 게 제일 꼰대 짓이다. 라고 나도 꼰대 짓 해본다.






  남탕 영화만 만드는 것은 문제다


  알탕 타령이 부당하다고 해도, 현재 영화판이 남탕이라는 점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일이다. 멀티캐스팅 영화가 쏟아지고 있지만, 그 안에 여배우의 자리는 없다. 남배우들은 1년에 몇 편씩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영화를 찍기도 하지만, 여배우는 작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 영화에는 누아르나 범죄 영화가 많은데, 이런 장르에서 여성 인물을 내세우기란 쉽지 않다. <범죄 도시> 같은 영화에 여성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역사극도 마찬가지다. 근대 이전에는 여성의 입지가 좁았다. 전쟁이라도 다루면 여성은 그저 피해자로 비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상황도 안 좋게 돌아간다. 액션, 누아르 장르에서 여성을 앞장세운 몇몇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현재 상황도 안 좋은데, 앞으로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꼬우면 니네가 만들던지."라고 말할 순 없다. 영화는 거대 산업이다. 허정 감독의 <숨바꼭질(2013)> 제작비가 25억이었는데, 간신히 독립영화 면했다는 소릴 들었다. 25억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잖나. 영화를 만들려면 최소 수십억의 자본이 필요하다. 마음만 먹는다고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꾸준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여성 영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여배우의 입지를 넓히고,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만으로도 여성의 대두가 절실하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지금처럼 한국 영화가 힘을 내고 있을 때 다양한 영화가 등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기존 영화를 알탕 영화로 폄하하는 여성 신문의 기사가 절대 좋아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여성이 설 자리를 잃은 현재 상황을 방관할 수는 없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여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재밌는 영화가 계속 나올 수 있다. 진영과 무관하게 옳은 것은 옳다고 이야기 했으면 한다. 저들이 진영 논리에 빠져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고, 우리마저 진영 논리에 빠질 필요는 없다. 혹여나 진심으로 "여성이 주인공이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바꿨으면 한다.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는 주인공의 성별과는 무관하다. "꼬우면 니네가 만들던가."라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버리길 바란다. 대중과 여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화계마저 진영 논리가 끼어들어 애꿎은 영화만 욕 먹고, 개선은 하나도 없는 이전투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영화계에서 여성의 입지가 넓어지길 희망한다. 그게 옳은 일이고, 그래야 다양하고 재밌는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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