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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곡성> - 어찌 현혹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 글은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맥거핀으로 수 놓은 기담(奇談)

  <곡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치명적인 스포일러는 바로 장르다. 장르 자체가 곧 반전이자 맥거핀이다. 반대로 맥거핀이 곧 장르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은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농촌 수사물이다. 첫 사건 현장에서 카메라는 종구(곽도원)의 뒤를 쫓는다. 풀이 우거진 언덕을 내려가는 시선은 발밑이 보이지 않아 위태롭다. 불안한 롱테이크 끝에서 마침내 드러난 참상은 긴장의 끈을 더욱 조여온다. 나홍진의 긴장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추격자>나 <황해>처럼 긴장감으로 관객을 질식시키려 들지 않는다. 대신에 웃음을 적절히 섞어 긴장의 완급을 조절한다. 겁 많고 어설픈 종구의 성격이 엉뚱한 웃음을 유발한다. 때로는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고, 때로는 <거북이 달린다>가 떠올랐다. 호러가 가미된 점에서 <챠우>가 떠오르기도 했다. <곡성>이 코미디 영화라는 나홍진 감독의 발언은 농담이 아니었다. 

  전반부에 수사물을 따르던 영화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오컬트로 변주한다. 탐문을 통해 왜인(쿠니무라 준)의 집에 다가갈수록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마을 주민은 벼락을 맞고, 용의자는 발작에 몸이 뒤틀려 죽는다. 조금씩 비현실의 전조를 내비친다. 수사물은 왜인의 집을 몰래 방문하는 시퀀스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전까지 종구의 파트너가 동료 형사(성복, 손강국)였다면, 이후로는 부제(이삼, 김도윤)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장르 변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있다. 바로 종구의 의상이다. 전환점 이전까지 종구는 주로 경찰복을 입었다. 이후에는 사복 차림이다. 

  일광(황정민)이 등장하면서 <곡성>은 본격적으로 오컬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일광은 휘파람을 불며 종구의 집을 훑는다. 카메라는 사건 현장을 찾은 종구의 뒤를 쫓듯이, 마당을 살피는 일광의 뒤를 쫓는다. 일광의 휘파람은 주문이 되어 일상적 공간을 오컬트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귀신들린 딸의 행동은 엑소시즘 영화의 클리셰를 재현한다. 무당이 등장하고, 굿판이 벌어진다. 한국형 <엑소시스트>다. 장르는 변주할지언정 긴장감은 여전하다. 오히려 오컬트로 바뀌고 나서 긴장감이 강해졌다. 불가사의한 종교적 신비주의가 더해지면서 오컬트 장르 특유의 공포감도 형성한다. 클라이막스는 살굿이었다. 교차편집을 통해 왜인과 일광의 굿판이 살벌한 싸움처럼 펼쳐진다. 촬영, 편집, 연기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며 뿜어내는 힘이 대단하다. 압도적인 장면이었다.

  오컬트의 정점을 찍은 영화는 다시 종잡을 수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종구는 친구들을 모아 왜인 사냥에 나선다. (이때 깨알같이 등장하는 뼈다귀. <황해>의 패러디이자 어쩌면 나홍진의 시그니쳐) 왜인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분간할 수 없음에도, 종구는 진실보다 피를 갈구한다. 딸을 향한 부정과 공포가 뒤섞인 광기. 그 광기가 집단을 이뤄 폭력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느닷없이 언데드가 등장한다. (영화의 내용상 '좀비'보다는 '언데드' 혹은 '레이즈 데드'라고 명명하는 것이 좋을 듯) 언데드와의 코믹 잔혹극을 마치자 추격신이 펼쳐진다. 하지만 종구 일행은 왜인을 놓지고 허망한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더니 별안간 왜인이 트럭 위로 추락한다. 왜인의 시체를 처리하고 돌아오자 건강을 되찾은 딸이 종구를 맞이한다. 이게 뭐지? 영화가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것은 예측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황당함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마저도 맥거핀이었다. 집단 광기도, 왜인의 죽음도, 행복한 결말도 속임수였다. 영화의 결말에서 <곡성>은 다시 오컬트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엑소시스트>가 아니라 <오멘>이었다. 무명(천우희)은 수호신이었고, 왜인은 악마였다. (벌레로 일광을 되돌린 것은 왜인인 듯하다. 벌레를 다루는 악마라면... 벨제붑?) 왜인의 섬뜩한 손톱과 시뻘건 눈동자는 이 영화의 장르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곡성>은 현실을 초월한 오컬트 판타지였다. 

  <곡성>에 등장하는 리얼리즘은 모두 맥거핀이다. 악마라는 판타지가 등장하는 순간 피부병이나 살해 동기 같은 현실적 단서는 아무 상관 없어진다. 그럼에도 결말 직전에 다시 한 번 환각 버섯을 등장시킨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오컬트라는 정체를 리얼리즘 뒤에 감추려한다. 치밀하고 집요한 낚시질이었다. <곡성>의 포스터에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고 적혀있다. 이렇게 도발적인 문구였을 줄이야. 정작 관객을 현혹하는 것은 <곡성> 그 자체가 아닌가. 제대로 낚였다는 쾌감이 자르르 흐르는 영화였다.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듯한...

  <곡성>은 독특한 방식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플롯을 짜임새 있게 엮지 않는다. 대신에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관객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오컬트적 면모가 이러한 성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벼락을 맞고, 발작에 몸이 뒤틀리고, 심지어 언데드까지 튀어나온다. 무슨 일이 벌어져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 가늠할 수 없으니 관객은 평범한 개 한 마리에도 움찔움찔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플롯의 유기성이 떨어진다. 전후 플롯 간 인과 관계가 명확하게 성립하지 않는다. 때로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 방식으로 플롯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대신에 부족한 유기성을 결말로 보완한다. 오컬트와 맥거핀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나고 나서야 플롯들이 스토리로 엮어진다. 플롯을 갖고 노는 신선한 방식이다. <펄프 픽션>처럼 순서를 뒤섞는 방식과는 다른 맛이다. 리얼리즘이라는 위장막은 이러한 방식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든다. 황당한 전개를 예측 불가능한 긴장감으로 끌어올린다. 장르 자체가 맥거핀이었기에 가능한 서스펜스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곡성>의 전개는 그야말로 최고다. <곡성>은 <살인의 추억>으로 시작해서, <엑소시스트>를 거쳐, <오멘>으로 끝난다. 이처럼 기막힌 오컬트 무비가 또 어딨겠는가? 나는 <곡성>처럼 흥미진진한 오컬트 무비는 외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전대미문의 영화다.

▲ <곡성> 전개 방식을 요약하자면 이 영상과 같다.
종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플롯을 반전 한 방으로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맥거핀의 결론이 오컬트라는 점은 분명 약점이다. 황당함을 서스펜스로 위장했는데, 그것이 거짓으로 판별났고, 진실은 판타지였다. 판타지라는 결말에 황당함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2시간 동안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관람했는데, 결말은 "왜?"라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악마가 사람을 괴롭히는데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초월적 존재가 모든 의문을 해결하지도 못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일광의 존재다. 왜인과 한패라는 일광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던 살굿의 존재가 모호해진다. 살굿은 그저 맥거핀으로 소모될 뿐이었다. 관객을 속이는 데 집착하다 보니 개연성의 아귀가 어긋난다. 원래 맥거핀이 허무한 장치이긴 하지만, 이를 인정한다고 답답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낚였다는 황당함과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불만을 표시할 관객이 많을 것이다. 오컬트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문제다. <검은 사제들>을 보며 유치하고, 만화 같아서 별로였다는 사람이라면, <곡성>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곡성>은 기가 막힌 장르물이지만, 장르물의 저변을 넓히는 파급력은 얻지 못할 것 같다.





  불신 지옥

  <곡성> 최고의 장면으로 결말에서 종구(곽도원)와 무명(천우희)이 마주한 장면을 꼽고싶다. 종구는 무명의 말을 따라 가만히 있느냐, 일광의 말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악마의 실체가 밝혀지고 모든 것이 맥거핀이었음이 드러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믿음을 종용한다. 속절없이 울리는 닭 울음소리는 종구를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기실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장면이었다. 시골 골목길에 두 남녀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긴장감이 장난 아니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종구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이런 식으로 바짝 조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결국, 종구는 구원을 불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필연적인 비극이었다. 하지만 나였더라도 무명을 믿지 못했으리라. "가만있으라."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가만있을 수 있을까? 재앙 앞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은 악마의 형상보다도 섬뜩하다.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굳이 지옥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곧 지옥인 셈이다.





  ※ 황정민은 여전히 그대로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색다른 연기 변신은 없어요. 그런데 지겹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역시 배우 연기도 연출과 시나리오 나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