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랑은 거부당하고 있다. 25세까지 동정이라면 마법을 쓸 수 있다며, 마법사와 마녀를 양성하던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비하 농담은 애교처럼 보인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초식남과 건어물녀가 등장했다. 이들은 단순한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면서도 결혼이라는 관습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다. 초식남과 건어물녀는 사랑 자체를 거부한다. 결혼 포기를 넘어 연애마저 포기한다.
이러한 경향이 등장한 이유로 대부분 힘든 경제 사정을 꼽는다. 사실 결혼과 연애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삶에 여유가 없으니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한다. 사랑도 그중의 하나인 셈이다... 정말 그럴까? 솔직히 21세기에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소한 스스로 초식남과 건어물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그들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포기한 게 아니다. 자발적으로 사랑을 거부하고 있다.
그럼 이들은 왜 사랑을 포기하는가? 사랑이 즐겁지 않고 괴롭기 때문이다. 막상 연애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보자. 어디든 나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기왕이면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 하니 싸구려 술집보다 지적인 모임을 찾게 된다. 벌써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모임에 참가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안에서 또 괜찮은 사람을 찾기 위한 치열한 탐색전이 시작된다. 운 좋게도 괜찮은 사람을 발견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를 노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연애 시장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한다. 간택을 위한 치열한 눈치 싸움이 이어진다. 생각만 해도 토 나올 것 같다.
시장 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교환 형식과 동일하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기껏해야 '공정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상품과 용역 그리고 감정의 교환에서 사기와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것에 머문다.
<사랑의 기술> 중에서
어쩌다 사랑은 생각만 해도 토 나오는 일이 되었을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잘못된 개념을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러한 오해를 불러온 3가지 관념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2가지 관념을 더하고자 한다. 다음 5가지 관념이 우리의 사랑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1) 사랑을 '사랑하는' 능동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수동의 문제로 생각한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게 아니다. 시장형 성격의 사람은 받기 위해서만 준다. 사랑은 주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 주는 것은 곧 능력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처벌하는 자보다 관용을 베푸는 자의 권위가 더 크다.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즐겁다.
2)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의문사는 무엇일까? 보통 '누구(대상)'를 꼽는다. 하지만 대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럴까?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의 극단이 바로 운명의 짝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운명의 짝이 있고, 보자마자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반대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본질이 '착한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사람이 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친구를 배신한다면? 그래도 이 사람의 본질은 '착한 사람'일까? 아니다. 친구를 배신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나쁜 사람'이 된다. 배신이라는 현상, 즉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본질을 결정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운명의 짝이라는 본질은 정해지지 않았다. 전혀 운명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랑하면 운명의 짝이 된다. 반대로 운명의 짝이라고 생각했으나 바람 피우다 걸리면 개새끼가 된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서 중요한 의문사는 '어떻게'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운명이 된다. 평강공주는 바보랑 결혼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가장 운명적인 설화가 되었다.
3)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한다
시작은 격렬하게 빠져드는 로맨틱한 사랑일 수 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하려면 동반자적 사랑으로 변해야 한다. (사랑은 변하는 거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어쩔 수 없이 권태가 찾아온다. 처음처럼 불꽃 튀기는 감정만 바란다면 그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은 없다.
4) '오직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로맨스 소설 작가들이 기가 막힌 흥행 요소를 발견한다. 바로 기독교다. '오직 주님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나이다.' 이를 사랑에 적용하자 당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남자가 바람 피우는 게 자랑인 시절이었으니...)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20세기에 이르러 각종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 이어진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드비어스... 너 인마! 너!) 요즘 들어서는 이런 생각이 식은 것 같다. 하긴 유행치고는 참으로 긴 유행이었다.
5) 사랑은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럴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번, 3번, 4번 오해를 합치면 이 관념이 나온다. 물론 사랑은 고귀하고 신성한 감정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어찌 고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고귀함을 다른 요소에도 강요하면? 사랑이 썩기 시작한다. 그래서 '운명의 짝'이 나오고,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와 '오직 너만을 영원히'가 탄생했다. 사랑은 고귀하지만, 그 마음만 고귀하면 충분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귀할 필요도 없고, 사랑하는 방식이 고귀할 필요도 없다. 사랑에 자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사랑할 자격이 있다.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쫄지 말고 들이대~)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인이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 것이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합일을 이룬다. 이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이러한 능동성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의 요소를 포함한다.
<사랑의 기술> 중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분리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이루는 합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자기애에 관한 설명이다.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나도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다만, 주장에 맞는 적절한 근거가 없다는 점은 아쉽게 다가왔다.
다행히 심리학과 뇌과학의 발달로 오늘날 우리는 사랑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신경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와 비슷하게 경험한다고 한다. 이러한 뇌의 시스템을 거울 신경계(mirror neuron)라 부른다. 뇌가 경험을 거울처럼 반사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인간의 뇌는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비슷하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뇌는 본래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뇌가 공감의 근원이며 우리가 소통하고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고통에는 강하게 반응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라면 무심하게 넘어갈 수 있다. 때로는 공감의 정도를 통해 몰랐던 친밀감을 깨닫기도 한다. 이처럼 친밀감과 공감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아서 아론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자아확장이론'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란 '상대방을 나의 자아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나'라는 범주를 확장하여 상대방이 그 안에 포함될 때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아론은 사랑을 '자아의 확장'이라고 정의한다. (에리히 프롬의 '합일'은 '자아 확장'의 부분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아확장론은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가장 완벽한 해답을 제공한다. 자아확장론에 따르면 확장된 자아는 서로의 자아 성장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상대의 꿈을 알고, 그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는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돈독해진 사랑은 다시 자아 성장을 북돋는 동기부여가 된다.
"당신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선순환에 들어가는 순간 사랑은 식지 않는다. 성장이라는 긍정적 효과도 덤으로 얻는다. 진정한 동반자적 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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