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현실적인 연애는 없다
- 씨네 21 김종철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여자친구가 심한 설사를 할 때 남자가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 주는 장면 같은 건 보여 주지 않아요. 그런 게 진짜 사랑인데 말이죠.
- <러브 팩추얼리>, 226p
나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대책 없이 눈물만 짜내려는 신파가 짜증 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지나치게 환상적이다.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들이 너무도 쉽게 사랑에 빠지고는 몇 분도 안 돼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다. 사실 영화라는 매체 특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전개이기도 하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긴 스토리를 2시간 안에 함축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앞뒤 자르고 본론(사랑)으로 돌입할 수밖에... 그런 면에서 포르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눈빛 몇 번 교환하고 섹스에 돌입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말 한두 마디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 일도 거의 없다.
그래서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보면 너무나 반갑다.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 <연애의 온도>,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을 사랑한다. 얼마 전 공개된 <결혼이야기>도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연애를 다룬 작품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언제나 이 작품을 꼽는다. 마크 웹 감독이 연출하고,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이 출연한 <500일의 썸머>다.
※ 이 글에는 영화 <500일의 썸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쩌는 이유
1) 현실적이면서 달달하다
현실적인 연애를 다룬 작품도 단점은 있다.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달달함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개 씁쓸하거나, 또는 찌질함과 열폭이 과해 쩐내가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500일의 썸머>는 달달하다. 영화는 썸머와 사랑에 빠진 톰의 심정을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이라는 환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재밌는 건 이토록 비현실적인 표현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만큼 사랑의 달달함을 포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품이다.
2) 기가 막힌 캐스팅
이러한 달달함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두 주연 배우다. 조셉 고든 레빗(톰 역)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남주가 갖추어야 할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살짝 앳돼 보이는 소년미에 남자가 봐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매력 넘치는 미소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찌질한 연기가 완전 잘 어울리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스위트'한 남자다.
주이 디샤넬(썸머 역) 캐스팅도 신의 한 수였다. 사실 외모만 따지면 더 여신 같아 보이는 배우도 많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외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영화에서는 이를 '썸머 효과'라고 부른다. 그녀가 좋아하는 앨범은 판매량이 급증하고, 그녀가 일하는 아이스크림 매장은 매출이 상승한다. 이 과대 포장된 묘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주이 디샤넬은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통통 튀는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예스맨>과 <500일의 썸머>를 꼭 보길 바란다.
조연으로 등장한 클로이 모레츠도 대박이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하지 말아야 할 짓만 골라서 하는 멍청이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옳은 말만 하며 극의 중심을 잡아 준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딱 맞는 최고의 조연이었다.
3) 뒤죽박죽 전개
<500일의 썸머>는 시간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할 때 이미 두 사람이 결별했다는 결론부터 보여준다. 그리고는 시간을 과거로 되감았다, 앞으로 돌렸다 하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러한 전개는 2가지 측면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첫째, 세월의 존재를 녹여낸다. 앞서 사랑 영화들이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500일 전부를 하나하나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500일의 썸머>는 시간 순서를 뒤섞는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각 에피소드 사이의 공백을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공백을 채워 넣는다. 그 결과 2시간이라는 시간 속에 500일의 세월을 녹여낸다. 이것이 <500일의 썸머>를 금사빠들의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연애 영화로 만들어 준다.
둘째, 감정선의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별한 사람을 보면 가끔 미친놈처럼 보이기도 한다. 좋았던 시절을 반추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도, 헤어졌다는 사실에 절망 어린 한숨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괜찮아 괜찮아 되네면서 억지로 웃을 때도 있다. (미친놈 맞잖아!!!) <500일의 썸머>는 편집을 통해 이런 감정선을 묘사한다. 행복에 겨워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절망에 빠진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알콩달콩 함께 영화 보는 장면이 나왔다가, 홀로 우울함에 짓눌려 극장 좌석에 무너져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간 순서대로라면 절대 붙어 있을 수 없는 두 장면이 컷 바이 컷으로 이어지면서 이별의 감성을 극대화한다. 아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편집이었다.
4) 공감할 수밖에 없는 찌질함
영화는 톰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그에게서 보이는 찌질함에 완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쪼잔한 모습이 완전 내 얘기 같다. 본인은 안 그렇다고? 에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남한테 훈수 둘 때는 누구나 카사노바가 되겠지만, 정작 본인 일로 닥치면 누구나 톰이 되지 않던가. 대부분의 연애는 찌질함의 역사다. <500일의 썸머>는 이를 섬세하고 유쾌하게 담아냈다.
5) 진짜 이유
주이 디샤넬 완전 사랑스럽고, 조셉 고든 레빗 완전 달달함. 이것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하다.
톰은 불안형 애착 스타일, 썸머는 회피형 애착 스타일
영화가 시작할 때 톰은 운명론자였다. 그는 운명의 반쪽이 있다고 믿었고, 그게 바로 썸머라고 생각한다. 반면 썸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 빠져본 적은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장면에서부터 두 사람이 잘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팍팍 느껴진다. (사실 이미 깨진 걸 알고 있다;;;)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진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는 어렵다. 혹시나 사랑에 빠지더라도 오래 지속하기는 더 어렵다.
'불안형 애착 스타일'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관계들에 집착한다. 이들은 파트너와 가까워지길 원하고 또 파트너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많아, 애정에 굶주린 사람 또는 집착이 강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이들은 또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시위성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주로 자신이 파트너에게 화가 나거나 좌절감을 느껴 가까이하려 않는 형태(그렇게 해서 파트너의 관심을 끌려는 것임)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 못 해 사소한 외부 위협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 <러브 팩추얼리>, 68p
사랑에 관한 생각은 두 사람의 애착 유형을 드러낸다. 톰은 불안형 애착 스타일이다. 그는 썸머에게 사랑받고 싶고, 연인 사이로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한다. 이것이 틀어졌을 때 접시를 깨부수는 시위성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톰이 불안형 애착 스타일이 된 것은 썸머의 탓일 수도 있다. 그녀가 '회피형 애착 스타일'이라는 점이 톰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피형 애착 스타일'의 사람들 역시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 못 하지만, 그 형태가 아주 달라 그저 자신의 감정에 연결되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까 관계 문제나 거부당하는 일(이들은 주로 자기 쪽에서 거부하는 편임)에 대해 (의식적으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가능한 한 독립적이 되려고 애쓰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거리를 두려 한다. 그래서 대체로 까다롭고 오만하며 용서를 잘 안 한다. 또한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화하거나 오래 지속되지 못할 관계들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 <러브 팩추얼리>, 69p
썸머는 회피형 애착 스타일이다. 애인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는 것이 불편하고, 누군가에게 구속되기 싫다고 한다. 영화는 그녀가 회피형 애착 스타일을 갖게 된 이유로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님의 이혼을 이야기한다. 뭐 원인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회피형 애착 스타일이 톰을 불안형 애착 스타일로 몰아갔고,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불안하게 만든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그럼 썸머가 나쁜 X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라고 좋아서 회피형 애착 스타일이 된 것은 아니다. 사랑에 대한 관점을 강요할 수도 없다. 썸머는 그저 썸머였을 뿐이다. 톰은 그런 썸머를 사랑한 것이다. 어쩌면 회피형 애착 스타일이 매력 포인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밀당의 고수가 되기도 하니까...
사랑은 운명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이처럼 반대되는 사랑관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남과 이별을 거치고 결말에 이르러(처음 장면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다. 톰은 직장을 관두고 꿈을 이루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썸머는 유부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결말에서 두 사람의 사랑관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톰은 이제 운명의 반쪽이나 진정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 건 동화 속에나 나오는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썸머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단지, 자신이 톰의 반쪽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잔인해!!!)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일까? 사랑은 운명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재밌는 점은 <500일의 썸머>를 본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는 점이다. 똑같은 영화를 봤음에도 누구는 '봐봐 운명이 맞지?'라고 말하고, 누구는 '내 이럴 줄 알았다. 운명은 개뿔!'이라고 말한다. (역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
톰이 배운 게 있다면 누구도 위대한 우주의 이치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연!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그보다 위대한 건 없다. 톰은 기적이 없다는 걸 배웠다.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깨달았고 이제 확신이 생겼다.
- <500일의 썸머> 中
썸머와의 마지막 만남 후, 톰은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본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톰이 다음 행동에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기요. 혹시 괜찮으시면 오늘 면접 끝나고 커피 한잔할래요?" 그녀와 약속을 잡고 통성명을 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어텀(가을)이다. 그렇게 그녀는 톰에게 운명이 된다.
<500일의 썸머>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은 우연이어도, 결말에서 운명이 될 수 있다. 시작이 운명이어도, 결말에서 우연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설령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도, 결말을 맞이하기 전에는 그것이 운명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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