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옥자>,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봉준호의 세계는 이질적이었다
봉준호의 세계는 이질적이었다. 이에 관하여 봉 감독은 <뉴스룸>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석희 : 봉 감독의 영화에는 이질적인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더>에서 모성과 범죄가 합쳐져 있고, <괴물>은 가족과 괴수, <옥자>는 소녀와 거대 동물이 그러합니다. 모두 의도한 겁니까?
봉준호 : 의도도 의도지만, 저의 취향이 그런 쪽으로 흘러갑니다. 안 어울리는 것들, 어색한 것들을 억지로 한 화면에 욱여넣으면 저는 쾌감을 느낍니다. <옥자> 같은 경우는 '옥자'라는 이름부터 이질적 결합이었습니다. 옥자라는 생명체는 거대회사 첨단기술로 탄생하였는데, 이름은 무척 촌스럽죠. 이것이 <옥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질적 결합을 선호하는 봉준호의 취향은 작품을 거듭할수록 짙어졌다. <살인의 추억>만 하더라도 이질적 결합은 소극적으로 등장했다. '공사장 인부의 레이스 팬티'나 '연쇄살인범의 부드러운 손'은 분명 이질적 결합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 표현의 목적이 되기보다 수단에 그쳤다. 형사물이라는 장르에서 단서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괴물>부터는 이질적 결합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아빠와 노랑머리라는 이질적 결합은 강두(송강호)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묘사했다. 한강이라는 일상적 공간과 괴물이라는 크리쳐의 만남은 공포를 강화했다. 헤드폰 처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괴물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이질적 결합의 공포가 압축된 명장면이었다. <마더>는 이질적 결합이 핵심이었다. 엄마(김혜자)라는 최상의 자애로움이 살인이라는 최악의 범죄로 이어질 때 보는 이의 마음은 갈대밭의 춤사위처럼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국열차>는 그 존재 자체가 이질적 결합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각각의 세계가 열차로 이어져 있었다. <옥자>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 옥자라는 이름, 금발과 한복, 돼지와 전화... 이질적 결합을 향한 봉준호의 사랑은 여전했다.
이질적 결합은 비현실적이다. 판타지다. 연결할 수 없는 것을 이어붙이고 그 사이에서 맥락을 넣는다. 그 맥락에 수긍한다면 관객은 기존에 볼 수 없던 서사를 읽게 된다.
▲ 블라디미르 쿠쉬의 <아프리카 소나타>
위 그림은 코끼리와 튜바를 결합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조합이다. 그러나 관객은 이 그림으로부터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시각의 이질적 조합으로부터 청각의 공감각을 끌어낸다. 그래서 그저 비현실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초현실적이라 말한다. 봉준호의 이질적 결합도 마찬가지다. 봉준호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이어 붙이며 그사이에 유머(돼지와 전화), 인물의 성격(노랑머리와 아빠), 주제(모성애와 살인)를 심어 놓았다. 결국, 숨겨진 감성이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반전으로 두드려맞은 듯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봉준호의 힘이었다.
옥자의 세계는 양면적이다
이질적 결합은 생경하다. 그에 반해 옥자의 많은 요소는 생경하기보다는 뻔해 보인다. 옥자(이정은)와 미자(안서현)의 강원도 생활은 흡사 <이웃집 토토로>나 <웰컴 투 동막골>을 연상케 했다. 루시 미란도의 프레젠테이션은 잡스와 판박이였고, 동물해방전선(Animal Liberation Front, 이하 ALF)은 전형적인 과격환경단체이며, 낸시 미란도의 황금만능주의는 자본주의 비판 클리셰를 답습했다.
하지만 감독이 봉준호 아니던가. 그는 절대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무엇도 뻔하게 그리지 않는다. <옥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옥자>는 전형적이지만, 동시에 양면적이다. 봉준호는 ALF를 선으로도 악으로도 묘사하지 않았다. ALF는 환경보호라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규율을 무시하는 테러리스트다. 통역은 신성한 것이라 말할 정도로 정의감에 휩싸여 있으면서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양아치이기도 하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풀 한 포기조차 먹지 못하고 건강을 해치는 모습은 이들의 도덕적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자본주의를 다루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양면적이다. 루시 미란도와 낸시 미란도(틸다 스윈튼)가 쌍둥이라는 설정은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루시는 우리가 광고를 통해 접하는 기업의 화사한 면을 상징한다. 고객을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낸시 미란도가 존재한다. 그들의 친절은 오직 돈을 목적으로 삼을 뿐이다.
도살 공장은 잔인한 도축장면과 피가 낭자한 모습을 통해 육식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대부분 히스패닉이다. 미국 사회의 약자들이다. 옥자를 구하기 위해 공장을 마비시켰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는 육식을 거부할 정도로 끔찍한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근로와 생존의 공간인 셈이다.
루시의 프레젠테이션을 생각하면 애플의 폭스콘 인권 문제가 떠오르기도 한다. 화려한 마케팅 뒤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갤럭시와 아이폰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봉준호는 자본주의를 무조건 나쁘게만 그렸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옥자를 구해낸 것은 정의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었다. 바로 황금이다. 육류 가공 산업의 야만성과 이를 부추기는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던 영화는 구원의 수단으로 황금을 내세웠다. 내가 열혈 스무 살이었다면 이러한 결말에 침을 뱉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황금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라며 목소리 높여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른이 넘고 보니 돈이 킹왕짱이더라. 나에게는 미자와 낸시의 거래가 쿨하고 깔끔하게 다가왔다. 돈은 옥자를 죽이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옥자를 살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돈의 양면성을 짚어낸 봉준호의 시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질적 결합이 초현실적이라면, 양면성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옥자>는 SF이고, 각종 소동은 유치할 정도로 낭만적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현실적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No good. No evil. Only love.
<옥자>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ALF는 정의로우면서도 유치하다. 미란도는 잔혹하면서도 깔끔하다. 이것들은 이질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함께 맞닿아 있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누구를 악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구를 선역이라 정할 수 있을까? 박문도 과장은 악당이라서 똥을 뒤집어썼을까? 아니다. 그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었다. 단지 시스템이었다. 무언가 바꿀 수 없이 그저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세상이었다.
만약 미자가 미란도 코퍼레이션을 전복했다거나, ALF 가 모든 동물을 해방했다면 나는 <옥자>를 허망하게 봤을 것이다. 옥자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면 염세주의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봉준호는 대신 현실을 택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 그 현실에서 작은 기적을 보여줬다.
그 기적을 이루기 위해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한 소녀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무언가 전복할 수도 없다. 사랑은 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이유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옥자와 미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에 공감한다. 미자는 악당을 무찌르고 영웅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그저 옥자의 가족으로 남았다. 나는 그런 미자가 미래소년 코난이나 캡틴 아메리카보다 더 멋있었다.
나는 영웅이 되어 저 하늘의 별이 되는 것보다는, 땅을 기어서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업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이라면 <옥자>가 사랑 영화라는 말에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옥자>의 리뷰는 아닙니다. 봉준호의 변화를 짚어내고자 한 글입니다. 요약하자면 이전의 봉준호가 이질적 결합을 추구했다면, <옥자>의 봉준호는 대상의 양면성을 부각하였습니다.
※ 옥자를 리뷰한다면 작품성 4.0, 비주얼 4.0, 오락성 3.5, 연기 3.5, 스토리 3.0을 주겠습니다. 스릴은 있으나 서스펜스는 없고, 메시지는 명확하나 이야기는 뻔했으니까요. 한국 특유의 완만한 산등성이를 담은 풍광이나 옥자의 CG 등 영상이 좋았습니다.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연 캐릭터는 단편적이었습니다. 특히 제이크 질렌할은 소모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네요. 그나마 폴 다노가 외국 배우 중에서는 가장 "쏼아있는" 연기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변희봉, 안서현, 윤제문 등 국내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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