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컨택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컨택트>는 외계인이 중심인 영화처럼 보인다. 예고편과 포스터는 물론이고, 심지어 개봉명마저 <콘택트(1997)>를 따라 <컨택트>라 지었으니 말 다했다. (<컨택트>의 원제목은 <Arrival>)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면 이 영화에서 외계인이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엄마와 딸의 운명을 중요하게 다룬다.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딸을 낳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을 서정적인 화면과 애달픈 연기로 전달한다. 이런 점은 <인터스텔라>와 비슷하다. 우주와 밀접한 사건으로 시작하지만, 결말에서는 가족애를 내세운다. 묘하게 그 대상도 둘 다 딸이다. 하긴 칙칙한 아들보다는 귀여운 딸이 낫다. 딸 바보는 들어봤어도 아들 바보는 못 들어봤다. 딸을 향한 부모의 절절한 모습을 보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에 공감한다면 끝내 눈물을 펑펑 쏟아낼 테고, 아니라면 눈물샘을 쥐어짜려는 망령의 손길을 느낄 것이다. 신파라는 이름의 망령이다. 현재 <컨택트>에 대한 호불호 논란의 쟁점은 여기에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성이 애달픈가? 아니면 촌스러운가? 이에 관해서라면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취향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오글거림을 견디는 정도도 다른 법이다. 하지만 신파냐 아니냐는 따져볼 수 있다. 신파는 개연성의 부재나 표현 방식 등 객관적인 요소를 통해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자. 그 전에 따져봐야 하는 것은 <컨택트>가 과연 SF냐는 점이다.
<컨택트>는 SF인가?
Science Fiction의 엄밀한 의미는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픽션"이다. 과학 이론이 등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어야 SF라고 부를 수 있다. 간혹 이러한 명제를 오해해서 과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면 SF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상상의 영역을 과학적 오류라 지적하는 것은 픽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다. 혹시 모른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먼 미래에는 당연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은 그렇게 발전해왔다. 생각해보라. 물질은 파동이라 벽을 넘을 수 있으며, 시간은 상대적이라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200년 전의 사람이라면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럼 SF에서 무엇이 과학적인가? 바로 상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도 과학 이론이나 과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한다면 SF라 부를 수 있다. 로봇과 사람을 분간하기 위한 방법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 마키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SF다. 튜링 테스트*라는 과학 용어가 등장했다고 SF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용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해당 내용을 과학적 사고로 파고들었다면 SF가 된다.
*튜링 테스트 :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기계에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테스트. 1950년에 앨런 튜링이 제안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접촉에서 과학적 접근을 보여줬을까? 아니다. 외계인이 어떻게 왔고, 어떻게 접촉하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과학은커녕 허무맹랑한 설명조차 없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외계인과의 조우에 관하여 높은 과학적 핍진성을 보여주었던 <콘택트(1997)>와 비교하면 아주 엉성하다. 그나마 외계인과 소통을 시도하는 모습에서는 연구적 자세가 보인다. 하지만 이마저도 맛보기만 보여주고 연구의 핵심은 이안(제레미 레너)의 나레이션으로 퉁쳤다.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의 이론에 따라 외계 언어 연구는 급물살을 탔다." 이 한 마디로 끝난다. 언어를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막혀버렸다. 후반에 이르면 외계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여타 외국어와 다를 바 없어진다. 단지 비싸 보이는 번역기를 사용할 뿐이다.
대신 영화는 외계인의 등장으로부터 파생하는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주목한다. 혼란으로 치닫는 국제 정세, 어디에나 존재하며 무지와 폭력을 자랑하는 급진주의자, 그리고 엄마와 딸의 이야기... 그럼 외계인은? 외계인이라는 SF적 요소는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쓰이고 버려졌다. 그럼 과학은? 물리학자 이안은 하는 일이 없다. 변사*마냥 나레이션이나 읊더니 끝내는 정액 제공자로 전락했다. 학구적인 냄새를 풍겼던 언어학도 따지고 보면 문과의 영역이다. 아아... <컨택트>에서 SF는 소모품이었다. 노른자는 전부 문과 감성 아닌가. 이러니 <미지와의 조우>나 <콘택트(1997)>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관객은 한숨이 푹푹 나온다. 외계인도 쩌리, 과학도 쩌리다. 이게 무슨 SF인가?
*변사 : 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에 맞추어 그 내용을 설명하던 사람
어쩌면 외계인과의 조우를 홀대했기 때문에 할리우드가 <컨택트>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외계인과의 조우는 이미 여러 영화에서 다루었다. <에이리언> 같은 코스믹 호러도 있었고, <미지와의 조우> 같은 미스터리도 있었으며, <콘택트(1997)> 같은 하드 SF도 있었다. 외계인과의 조우는 이미 한물간 소재인 셈이다. 아마 <컨택트>가 외계인과의 조우에 집중했다면 <콘택트(1997)> 아류작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성을 변호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제작자의 사정이 어떻든, 작품은 작품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 <컨택트>에서 외계인과의 조우는 엉성했다. 서사적으로 소모되었을 뿐이며, SF적인 핍진성을 갖추지 못했다. <컨택트>가 보여주는 SF적 요소가 외계인뿐이라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이과 영화가 아니라 문과 영화다. 외계인이 나온다고 다가 아니다. <컨택트>가 정말 SF 영화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컨택트>는 SF다.
그런데 <컨택트>에는 외계인 외에도 중요한 SF 소재가 등장한다. 바로 시간의 동시성이다. 이는 외계인의 방문 목적이기도 하다. 무기와 선물이라는 해석 차이로 인해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이유는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언어와 문자다. 단순히 언어와 문자에 머문 것이 아니다. 여기에 "언어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이 더해진다. 이에 따라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 루이스는 시간의 동시성을 인지하게 된다. 바로 그 인지 능력이 선물이었다.
시간의 동시성이란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시간은 선형적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컨택트>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뒤엎고 시간의 동시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는 작가의 상상이 아니다. 공상 과학(SF)에서 공상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이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상대적이다. 정지한 사람과 이동하는 사람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므로 시간 축 또한 다르다. 단지 지구 규모에서는 그에 따른 차이가 미미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상대성을 직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억 광년쯤 떨어진 우주 규모에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동하는 사람의 '현재'가 정지한 사람의 수백년 전 '과거'나 수백년 후의 '미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모두 인식할 수 있다면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없어지는 셈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 타임워프 中 (14분 40초부터 20분 36초까지)
시간의 동시성에 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외계인과의 조우를 중심으로 작품을 읽어내면 <컨택트>는 졸작이 되어버린다. 핵심인 외계인과의 조우는 엉성하고, 정치 외교 문제는 따로 놀며, 결말의 반전은 뜬금없을 뿐이다. 그래서 신파가 된다. 중심 서사와 유기적 연결을 맺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짜내는 이야기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동시성을 중심에 두면 모든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샹 장군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도 시간의 동시성이다. 감성을 터뜨리는 애달픈 반전도 시간의 동시성 때문에 벌어진다. 따라서 <컨택트>의 서사는 시간의 동시성을 중심으로 읽어내야 한다.
외계인과의 조우를 홀대하는 이유는 그냥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계인은 그저 계기에 불과하다. 막말로 시간의 동시성을 전달해주기만 한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초인공지능, 이(異)세계의 공주님, 고대문명의 유물이 될 수도 있다. 단지 작가의 취향에 따라 좀 더 SF적이고 언어학을 끌어내기 좋은 소재가 쓰였을 뿐이다. 외계인은 그저 던져놓은 데 반해 루이스가 시간의 동시성을 이해하는 근거로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제시한다. 극에서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만약 시간의 동시성이 그저 작가의 상상에 불과했다면, <컨택트>는 SF의 가면을 쓴 문과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동시성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과학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물론 상대성 이론이나 페르마의 원리 같은 과학 용어가 등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이론이 녹아있다. 이것이 <컨택트>가 SF 영화인 이유이다.
<컨택트>는 쩌는 SF다.
그런데 시간의 동시성이라는 과학 개념이 등장한다고 무조건 좋은 SF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SF라면 이를 관객에게 직관적이며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페르마의 원리가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빛은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경로로 이동한다. 매질에 따른 빛의 굴절이나, 빛의 반사도 이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이 최소 시간으로 이동하려면, 출발할 때 어디에 도착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즉, 빛은 미래의 목적지를 미리 알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원작은 시간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페르마의 원리를 통해 설명한다. 상당히 깔끔하고, 인상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에서 시간의 동시성을 페르마의 원리로 설명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영화 속 상황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 인물이 놓인 공간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긴 시간 동안 서술한다면 영화적으로 실패라 할 수 있다. <컨택트>에 페르마의 원리가 등장한다면 루이스의 캥거루 일화처럼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페르마의 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목적지의 역설까지 끌어내야 한다. 굉장히 길고 지루한 나레이션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해를 돕고자 그림 자료를 제공한다면 PPT 동영상과 다를 바 없어진다. 결국, 영화에서 페르마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지루하거나, 촌스럽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컨택트>는 시간의 동시성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바로 논제로섬게임 장면이다. 미래의 루이스는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는 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현재의 루이스가 군사회의 도중 논제로섬게임이란 단어를 듣자, 미래의 루이스가 막 생각난 것처럼 딸에게 단어를 알려준다. 현재의 정보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 셈이다. 루이스에게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며 시간의 동시성을 직관적으로 묘사한다. 이 장면은 소설보다 영화에 더 어울린다. 바로 교차 편집* 때문이다. 덕분에 시간의 '동시성'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긴 대사도, 촌스러운 인포그래픽도, 화려한 CG도 쓰지 않았다. 영화에서 시간의 동시성을 설명하기 데 필요했던 것은 카메라와 편집뿐이었다. 간단하고, 세련되었다. 드니 빌뇌브의 미니멀한 스타일과 잘 어울린다.
*교차 편집 : 서로 독립된 장면을 엇갈리게 보여주는 편집 기술.
논제로섬게임 상황을 거꾸로 뒤집으면 샹 장군 아내의 유언이 된다. 현재의 루이스는 샹 장군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미래의 루이스가 샹 장군으로부터 당시에 한 말이 무엇인지 듣게 된다. 현재의 루이스는 그 말을 실시간으로 따라 한다. 미래의 정보가 현재의 상황을 결정한다. 역시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컨택트>가 시간의 동시성을 묘사하는 방법은 서사적 연출에 국한하지 않는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시각적 쾌감을 제공해야 한다. 이 말은 시간의 동시성을 시각적으로 잘 묘사해야만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헵타포드의 문자는 그러한 측면을 제대로 충족시켰다. 원작에서 오묘하게 묘사했던 글자를 명확한 원형으로 각색하였다.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원형의 문자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는 시간의 동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화하면서도 의미를 잃지 않았다. 창의적이고 기발하며 또한 멋있다. 이보다 훌륭한 시각화가 있을까?
영화 초반 우주선에 진입하는 장면도 훌륭한 시각화다. 이 장면은 외계인과의 조우에서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리는 감성을 전달하는 마술적 체험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경이로움에 그치지 않는다.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헵타포드의 우주선은 원형의 문자와 마찬가지로 선형적 관점을 거부한다. 그저 감탄하기 바빴던 체험 속에도 영화는 주제의식을 녹여놓았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서사 구조를 살펴보자. 결말을 보고 나면 오프닝이 낚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화는 대부분의 서사를 시간순으로 진행하며, 미래를 보는 장면은 환영으로 처리한다. 이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순서대로다. 다만 오프닝만 예외다. 이 장면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뒤에 오는 이야기를 맨 앞에 붙여놓은 것이다. 오프닝도 환영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 루이스는 아직 외계인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런데 환영을 보았다면 개연성의 모순이 된다. 결론적으로 <컨택트>의 오프닝은 환영과 상관없이 감독의 의도적으로 배열한 플롯으로 봐야 한다.
만약 그 의도가 반전의 묘미를 살리는 것에 국한한다면 정말 낚시에 머물 것이다. 그것도 노골적이고, 단순한 낚시다. 만약 추리물이었다면 치사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오프닝에는 반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오프닝의 내용은 시간 순서상 가장 뒤에 일어난 일이다. 끝을 시작에 두었다. 즉, <컨택트>의 서사 구조는 헵타포드의 문자처럼 시작과 끝이 닿아있다. 전체 이야기 구조가 시간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인 셈이다.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설정이다. (물론 이것은 원작의 힘이다)
마치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감성이 촌스러운가?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없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다른 법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신파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컨택트>의 핵심은 시간의 동시성이다. 그리고 루이스의 애달픈 사연은 시간의 동시성으로 인해 벌어진다. 뜬금없이 툭 튀어나와 눈물샘을 쥐어짜는 신파가 아니다.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훌륭한 이야기다.
<컨택트>는 이과 영화가 아니라 문과 영화라는 평이 종종 보인다. SF가 아니라 드라마라는 말도 있다. 물론 <컨택트>가 담고 있는 감성은 너무나 촉촉해서 딱딱한 공돌이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과학이 존재한다. 작품의 모든 이야기는 이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SF다. 외계인이 등장하고, 우주선이 등장해서 SF인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 과학이 존재하기 때문에 SF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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