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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너의 이름은.> - 심장을 덜컥이게 하는 감성 직격탄

※ 이 글은 영화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형식적 개연성


  혼동하는 경우가 잦으나 개연성은 현실성*과 무관하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 세계관이 전제하는 설정 안에서 납득이 가는 묘사라면 개연성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면 개연성은 확보된다. 즉, 개연성이란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에서도 개연성을 찾을 수 있다.
*개연성과 대비되는 현실성은 핍진성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판타지는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디테일한 규약을 만든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제시하되, 제한을 두며, 이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판을 벌이기 전에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룰 북을 만드는 셈이다. 관객은 이러한 규약을 전제로써 받아들인다. <데스노트>의 데스노트나 사신의 존재,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좀비 바이러스, 광선검, 포스... 따지고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관객은 규약의 테두리 안이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결코, 만화라서, 판타지라서, SF라서, 그냥 그렇게 하기로 정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규약이 철저하게 지켜져야만 황당한 설정이라도 개연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규약을 무시하는 설정이 등장한다면 개연성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설정 가지고 장난질 치거나, 밸런스가 붕괴된 작품은 개연성으로도 까인다.

  <너의 이름은.>은 판타지다. 남녀의 몸이 바뀌고, 시간을 초월하며, 미래 혹은 과거를 바꾼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정에 디테일한 규약을 만들었을까? 아니다. <너의 이름은.>의 설정에는 제약이 없다. 몸이 바뀌는 조건, 미래가 바뀌는 방식, 기억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 등 추가할 수 있는 세밀한 조건이 있음에도 이를 다루지 않았다. 이런 판국이니 설정을 응용하는 판타지의 기본적인 전개도 보이지 않는다. <너의 이름은.>의 설정은 그저 던져졌을 뿐이다. 이를 전제로써 받아들이기에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에는 개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없는 걸까?

  개연성을 확보하는 보다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장치가 있다. 바로 복선이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서사적 장치를 말한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었다."라는 전개를 예로 들자면,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라는 행동이 복선이 되어 교통사고로 이어지는 셈이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복선이 제시된다면 관객은 다가올 사건이 우연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플롯 간에 아귀가 맞아들어가며 관객에게 스토리를 잇는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플롯과 스토리 : 스토리는 순서에 따른 사건의 서술을 말한다. 플롯은 인과관계에 따른 사건의 배열을 말한다. 목걸이로 비유하자면 각각의 사건은 구슬이고, 플롯은 구슬을 엮은 순서와 방법이며, 스토리는 완성된 한 줄이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스토리와 플롯을 따로 구분하여 보지 않는다. 관객들이 보는 것은 '플롯'이지만, 이로부터 자기 나름대로 '스토리를 재구성'한다.

  <너의 이름은.>의 설정에는 디테일은 없으나 복선은 있다. 감독 편의대로 설정을 지었지만, 이에 관한 근거는 제공한다. 몸이 뒤바뀌는 설정은 무녀 집안인 미야미즈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일종의 신기로 언급된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소녀 시절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현상은 언제부터 이어졌을까? 아쉽게도 확실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200년 전 마유고로 대 화제로 신사와 고문서가 모두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유는 모른 채 형식만 남아 축제와 의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츠하의 몸에 빙의한 타키는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미야미즈 가문의 꿈은 재난을 피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추론한다. 이토모리 마을이 1,000년 전에 운석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점, 사당에 그려진 혜성의 그림, 정확히 신사에 떨어지는 운석 등이 타키의 추론을 뒷받침한다. 요약하자면 몸이 뒤바뀌는 설정은 1,000년 전 미야미즈 가문의 무녀로부터 시작된 일종의 예언인 셈이다. 타키에게는 우연일 수 있으나, 미츠하에게는 분명히 필연이었다.

  이름을 까먹는 설정에 대해서는 '꿈은 쉽게 잊힌다.'는 점을 근거로 둔다.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깨고 나서 금세 잊어버리는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상기시키기 위해 <너의 이름은.>은 오프닝에서 미츠하와 타키의 독백을 통해 꿈의 망각을 이야기한다. 꿈은 잊히고 아련함만이 남는 기묘한 '감각'을 복선으로 제시한다. 대사나 이야기가 아니다. '감각'이 복선이 된다. 아침 햇살이 빵 굽는 냄새처럼 창문을 넘어오는데. 아련한 꿈을 꾸다 깨어나 눈물을 훔치다가. 무슨 꿈이었는지 잊게 되어. 다시 또 아련해지는 감각. 이 느낌이 이름을 까먹는 설정에 대한 복선이 되는 것이다.

  황혼(카타와레토키)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작중 내내 반복하여 언급한다. 수업 내용과 할머니의 대사를 통해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순간임을 암시하며 문학적, 신앙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에 사당이라는 신성한 공간과 미인 주(쿠치카미자케)라는 원시적 종교 아이템이 더해지고 나서야 '황혼의 만남'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 두 사람이 마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다양한 요소가 복선으로 작동한다.

  영화에서 명백한 개연성의 구멍이 있다면, 아버지를 설득하는 미츠하의 모습을 그냥 넘어가 버린 점이다.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미츠하로부터 어머니의 환영을 보게 되어 미츠하의 말을 따른다고 한다. 이런 설정이 부담스러웠다면 엄마를 닮은 딸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정도로 묘사했어도 좋았다. 그러나 감독은 이 부분을 그저 생략해버렸다. 사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요 갈등으로 등장하기보다는, 도시 상경을 꿈꾸는 이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보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다룬 듯하다.

  자. 이렇게 <너의 이름은.>의 복선이 설명되었으니 개연성은 문제없다고 봐도 될까? 하지만 복선이 제시되었다고 만사형통은 아니다. 복선은 매우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복선이 상세하면 셀프 스포일러가 된다. 그렇다고 꼭꼭 숨기면 인과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몇몇 복선은 너무 흔하게 등장하여 작품을 뻔하게 만든다. 예언이나 저주는 현대 소설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으며, 툭하면 나오는 출생의 비밀, 고귀한 혈통, 사망 플래그는 이제 아예 개그 소재가 되어버렸다. 어떤 복선은 제시만 될 뿐 설득력이 없어 도리어 작품의 치명적 구멍이 되기도 한다. 잘못 쓰면 안 쓰니만 못한 것이 복선이다.

  <너의 이름은>이 제공하는 복선은 샤머니즘 판타지다. 판타지의 근거로 다시 판타지를 들이댄 셈이다. 복선을 통해 사건 간의 인과 관계는 성립하였으니 형식적인 개연성은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복선이 구식이다. 요즘 같은 과학 만능 시대에 예언이니 무당이니 그리스 신화나 웅녀 설화 같은 이야기를 끌고 오면 무게감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개의치 않겠지만,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

  복선을 지나치게 숨겨놓은 점도 문제다. 이토모리 마을과 미야미즈 가문의 내력에 관한 플롯은 작중 전반에 걸쳐 파편처럼 흩뿌려 놓았다. 여기에 마유고로 대 화제까지 끼어들어 좀체 스토리로 엮어내기 힘들다. (나도 두 번 보고 나서야 확실히 정리했다) 감각을 복선으로 제공한 점은 참신해 보이지만, 느낌적인 느낌을 제공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차라리 '몸이 바뀌는 꿈은 유난히 빨리 잊힌다. 그래서 일기를 적기로 했다.'라고 명시하거나, 타임 패러독스를 접목하여 '마치 몇 년 지난 꿈을 떠올리는 것처럼 어렵다.', '일어난 적이 없는 일처럼 잊힌다.'라고 묘사했다면 지금보다는 친절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혼의 만남'에 관한 복선이 가장 모범적이었다. 플롯을 흩어놓아 숨겨둔 듯하지만,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으로 보여주었기에 일종의 반복이 되었다. 아마 클라이맥스와 이어지는 암시였기에 이 정도의 컷 투자가 이뤄졌을 것이다. 이러한 친절함을 다른 복선에서도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너의 이름은.>은 복선을 제공하며 형식적인 개연성은 마련했지만, 각 개연성의 세부적인 완성도는 미흡한 편이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며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누군가 불편함을 느꼈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정도가 개연성에 관한 적당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개연성이 완전무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무한 수준은 아닌 정도. 조목조목 해명한다지만, 논리가 유치한 변론을 보는 기분. 판사님. 이 부분은 고양이가 작성했습니다. 딱 이 정도가 어떨까?





  감성을 향한 직격탄

  영화는 개연성이 전부가 아니다. 서사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비서사적 요소도 중요하다. 영화의 감동이 폭발하는 순간은 비서사적 요소가 도드라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소설이나 희곡보다는 시(詩)나 비디오 아트에 가깝다. 내가 자주 주장했던 이야기다. 이는 <너의 이름은.>에서도 다르지 않다.

  다른 평론가의 문장을 끌어쓰는 것은 다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너의 이름은.>에 대해 이보다 깔끔하게 정리한 문장을 만들 수 없기에 이동진의 한줄평을 빌려오고자 한다.
  "갈라지는 것들의 파괴력과 이어지는 것들의 치유력.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태반은 끝내 연결하려는 안간힘에서 온다."
  이 문장에서 보듯이 <너의 이름은.>의 주제는 이어지기 위한 안간힘이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단절하는 것과 연결하는 것을 대비한다. 갈라지는 운석, 머리를 자르는 행위, 수신자 불명의 통화, 망각 등은 단절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슬픔, 애잔함, 아련함, 절망, 죽음이 담겨있다. 이에 대비하여 머리끈, 무스비, 기억, 몸이 뒤바뀌는 상황은 연결을 상징한다. 이로부터 사랑, 희망, 생(生)을 보여준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역시 2011년의 대지진이 큰 계기였던 것 같다. 2011년 이전의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는 이대로 계속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 규모도 축소되는 등 사회가 쇠퇴하는 징조는 있었지만, 일상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감각이 있었다. 그때는 내 작품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오고 가는 행동이나, 너무 늦어버린 기차 같은 설정 말이다. 그렇게 사소한 일상에서도 풍부한 의미를 더하려 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보다 첫사랑을 잃고 살아가는 느낌이 더 중요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2011년 이후 그러한 전제는 무너졌다. 마을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마을로 남을 수 없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 극 중에서 타키는 입사 면접에서 "도쿄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그런 감각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그리는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마지막으로 생을 획득하는 것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언젠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단절될 수 있다는 불연속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따라서 감독은 단절과 대비되는 연결의 의미를 시대정신으로 강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단절을 뛰어넘는 연결의 기적을 보여준다. 과거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동일본지진의 피해자들에게, 재난, 죽음, 시간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것의 위로를 전달하려 했다.

  영화 속 모든 요소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작동한다. 소모된다고 봐도 좋다. 심지어 영화의 핵심 플롯인 운석 충돌도 마찬가지다. 미츠하를 구하기 위해 타키는 안간힘을 쓴다. 마을을 구하기 위해 미츠하도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만나는 기적의 순간에 두 사람은 마주한다. 운석 충돌이라는 재난으로부터 미츠하와 마을을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절정의 순간 재난은 사라지고 풋풋한 연애 감성을 들이민다. 재난을 막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만나기 위해 재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클라이맥스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주목한 것은 서사의 흐름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주제 의식이었던 셈이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작법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서사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개를 따른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호소다 마모루는 이러한 정석을 따른다. 다이나믹한 사건 속에서 쌓아온 감정을 절정의 순간에 폭발시킨다. 그에 반해 신카이 마코토는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이 아예 없거나, 때로는 생뚱맞은 장면을 들이댄다. 정석적이지도 않고, 유기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 순간의 연출이 심장을 덜컥이게 한다. 황혼이 끝나고 불연속적인 컷을 지나 허공에서 매직펜이 떨어지는 순간, 보는 이의 가슴은 철렁하게 된다. 그저 불연속(비유기적)에 머물지 않고, 불연속을 통해 마음을 흔든다. 신카이 마코토에게 서사의 유기적 흐름은 구실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순간순간의 감성에 충실한 모습이다.

  뮤직비디오 같은 연출이나, 황홀한 작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서사가 관객의 이성을 자극한다면, 음악과 영상은 감성에 직격한다. 잘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잘 그려낸 영상으로 감동을 전달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전달하는 감동은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마치 <쇼생크 탈출>에서 맥락과 무관하게 튀어나온 <편지의 2중창>이 그 어떤 서사보다도 강렬하게 자유를 느끼도록 만든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연출법은 중2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기억하자. 모든 낭만은 밖에서 보면 중2병일 뿐이다. 색소폰 소리 울리는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며 마담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책없는 짓이다. 중2병이니, 주책이니 핀잔을 주는 것보다는 그 낭만에 함께 취하는 게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마치며...

  학창시절 복선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면 항상 예로 드는 작품이 있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다. 허 생원과 동이는 모두 왼손잡이다. 이것이 복선으로 작동하며 둘 사이가 부자 관계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이 복선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왼손잡이가 유전된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전과는 무관한 환경만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왼손잡이라는 점은 부자 관계를 암시하는 복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글을 읽으며 누가 이런 걸 신경 썼던가? 공감각적인 비유와 유려한 문체에 빠져들면 그깟 설정 오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다.

  국내 관객은 지나치게 개연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연성은 영화의 한 요소일 뿐이다. 앞뒤가 착착 들어맞는다고 주제가 또렷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철학이 뛰어나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개연성을 무시하거나, 역으로 이를 통해 관객을 속이며 주제 의식을 강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작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타란티노는 세계적 거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곡성>은 '곡성 닦이'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따지기 전에 영화를 느끼길 바란다. 말이 되냐 안 되냐를 따지기 전에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들어주길 바란다. 우선 경계를 풀고 작품을 흠뻑 만끽하길 바란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 파악하지도 않고, 개연성만 따지며 작품을 천대하지는 말자.





  참조

  1) 문화원형백과 바리공주 서사창작 <플롯, 스토리, 사건의 차이>,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링크)

  2) 나무위키 - 개연성  (링크)

  3) <영화미학과 비평입문>, 1999, 이효인, 한양대학교 출판부

  4) 문학용어비평사전 - 복선, 2006,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링크)

  5) [허핑턴포스트인터뷰]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이란 상상력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것이다" (링크)





※ 저는 글을 쓰면서 나무위키를 자주 인용합니다. 아시다시피 위키위키는 함부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나무위키라면 덮썩 믿어선 안 되죠. 그럼에도 나무위키를 인용하는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알고있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자 할 때,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나무 위키를 인용하는 게 훨씬 깔끔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지식과 차이가 없을 때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 플롯과 스토리의 차이를 느끼고 싶다면 나하도르님의 "이야기 읽는 블로그"를 권해드립니다. 게임으로 즐겼던 플롯을 스토리로 정리해 놓으셨습니다. 개꿀잼입니다. (링크)

※ 두 사람이 왜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변론은 링크로 대체합니다. 영화 <캐롤>에서도 이에 관한 대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다.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이다.".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 <너의 이름은.>의 제목에서 "."이 중요하다고 하네요.  "너의 이름은?"이라는 뜻이 될 수도, "너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라는 뜻이 될 수도, "너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어."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