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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V.I.P.> - 누아르 판타지

※ 이 글은 영화 <신세계>, <대호>, <V.I.P.>,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베를린>, <공동경비구역 JSA>, 게임 <더 위쳐>, <엘더스크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 박훈정

대표작 : <신세계>, <대호>, <V.I.P.>





  리얼리즘과 판타지

  <범죄와의 전쟁>과 <신세계>는 비슷하다. 개봉도 1년 차이고, 주요 소재도 둘 다 조직폭력배다. 심지어 장르마저 갱스터 누아르로서 같다. 그러나 두 영화는 다르다. 껍질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 속에 담긴 본질이 다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범죄와의 전쟁>은 리얼리즘*이고 <신세계>는 판타지다.
* 여기서 다루는 리얼리즘은 핍진성(Verisimilitude)의 요소인 현실감이나 생생함과는 다르다. 핍진성은 '얼마나 현실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본문의 리얼리즘은 '얼마나 현실의 진실에 가까운가?'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 차이를 수잔 헤이워드는 '이데올로기적 리얼리즘'과 '미학적 리얼리즘'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참조 : 리얼리즘)

  <범죄와의 전쟁>은 리얼리즘이 영화의 주제이자 감독의 메시지였다. 영화 속에는 그 시절의 대한민국이 담겨있다. 그곳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 법보다 강하다. 정의와 명분은 힘과 권력 앞에 무력하다. 다음 세대는 정의가 아니라 힘을 좇아 검사가 된다. 이것은 현실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내가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는 조직폭력배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고, 여전히 이어지는 우리의 이야기다. 한강의 기적과 올림픽 개최의 영광 이면에는 범죄 대한민국이 존재했다. 이를 박멸하지 못하고, 아니 안 하고 반달(반쪽 건달)처럼 성장만 바라보며 90년대 버블 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부패의 끝에서 고름이 터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 씁쓸한 대한민국의 현실=리얼리즘이 바로 <범죄와의 전쟁>의 본질이다.

  그러나 <신세계>에는 현실이 없다. 물론 영화 속 대사, 상황, 연기, 세트, 소품은 매우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속에 대한민국은 없었다. 배경을 홍콩으로 바꾸면 삼합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이었다면 야쿠자, 미국이라면 마피아, 멕시코라면 카르텔... <신세계>의 이야기는 국적 불문이다. 현실에 뿌리를 박지 않았다. 그곳에 우리의 이야기는 없었다. 철저히 그들의 이야기다. 오로지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들의 이야기 즉, 판타지다.

  물론 장르 구분에서 판타지란 검과 마법, 용과 마왕이 등장하는 작품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소재를 다루더라도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게임 <더 위쳐> 시리즈가 적절한 예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위쳐 게롤트'가 검과 마법을 이용하여 괴물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형적인 판타지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현실적이다. 음모, 배신, 홀로코스트, 인종 차별, 권력 암투, 그 속에서 업화에 고통받는 백성들... 이 끝없는 갈등 속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모두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의도치 않은 비극이 찾아오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어떤 결말이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와중에 무언가 선택해야만 한다. 마치 현실처럼. 그래서 <더 위쳐> 시리즈는 판타지이지만 리얼리즘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재부터 서사까지 완벽한 판타지로 <엘더스크롤> 시리즈가 있다. 마찬가지로 검과 마법 그리고 용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그 짜임새와 규모가 치밀하고 방대하다. 배경 설정만 봐도 몇 날 며칠을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다. 본 내용에는 영웅적 승리, 숭고한 희생, 악마의 농락, 신의 영광이 무수한 에피소드에 녹아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없다. <더 위쳐>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나를 돌아보게 되지만, <엘더스크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약간의 속임수를 더한다면 모든 것을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질 수도 있다.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꿈 같은 공간. <엘더스크롤>은 완벽한 판타지 세계를 창조했다.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완벽한 판타지는 장점이 많다. 플레이어는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고, 세계관 속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다. 반면에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면 플레이어와 작품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플레이하기보다 관람하게 된다. 이 차이는 두 게임의 컷 신 연출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엘더스크롤>은 따로 컷 신이랄 게 없다. 언제나 시점은 1인칭이고,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위쳐>는 컷 신이 존재하고, 인물은 영화처럼 화면에 등장한다. 그동안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컷 신을 건너뛰거나 관람하는 것뿐이다. (둘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는 결국 취향의 영역일 뿐이다. 다만 게임의 가장 근본적인 재미 즉, 체험하는 재미를 고려한다면 컷 신 사용은 되도록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영화는 게임과 다르다. 체험이 아니라 관람이 목적이다. 그래서 완벽한 판타지는 단점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관람할 때는 신나고 재밌게 몰입할 수 있으나, 이것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면 여운이 남기 어렵다. 소통도 힘들다. 작품과의 소통이란 작품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이 없다면 자신을 투영할 수 없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치고 만다. 이것은 쌍방향 소통이 아니라 일방향 방송에 불과하다. 관객은 그저 보고 즐기는 게 전부가 된다.

  그렇다고 완벽한 판타지가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는 말은, 현실의 족쇄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 더욱 몰입감 넘치는 전개, 더 충격적인 반전까지... 완벽한 판타지 속에서 작가는 장르적 쾌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신세계>가 그렇다. 매력적인 인물, 의외성 넘치는 전개, 클라이맥스의 전율, 결말의 카타르시스까지... 어설프게 리얼리즘과 작가적 메시지를 담으려 애쓰지 않았다.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여 훌륭한 픽션을 낳았다. 박훈정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가 재밌다

  북한은 한국 영화의 단골 소재다. 그럴 만 하다. 21세기 가장 이질적인 국가이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곳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다루고픈 소재다. 하지만 함부로 다뤘다간 엉성해지기가 십상이다. 할리우드가 북한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다. 솔직히 한국인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나오는 게 대다수다. 할리우드보다는 낫지만, 충무로라고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쉬리>나 <용의자>는 꼭 북한이어야 할 당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보니 북한이 선택되었다고나 할까? <베를린>은 북한의 국민 간 상호감시체계를 가져와 부부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며 긴장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첩보물의 클리셰이다 보니 딱히 고평가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특수성이 잘 드러난 작품을 꼽자면 <공동경비구역 JSA>가 있다. 이 영화에는 적이자 동포라는 남북한의 복잡 미묘한 관계가 등장인물 사이에 잘 함축되어 있었다.

  그럼 <V.I.P.>의 북한은 어떨까? 김광일(이종석)은 북한 권력층 2세로 로열패밀리라 불린다. 쾌락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무소불위의 권력 덕분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마치 북한의 조태오*같다. 권력형 범죄가 딱히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이것만으로 북한이어야 할 당위를 보여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북한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다. 영화는 김광일의 범죄에 악마성을 부여한다. 차마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극악무도한 범죄를 상세히도 묘사한다. 아무리 권력층이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럼에도 김광일은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북한 정도 되는 폐쇄적 독재국가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에 꼭 북한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독재국가나 컬트 집단을 넣어도 상관없다. 특수한 조건이 필요할 뿐, 북한이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V.I.P.>의 잔인한 묘사가 과하게 다가온다. 누아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굳이 그 정도로 묘사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김광일이 반드시 때려죽여야 할 답이 없는 인간이라는 점도 감금 중에 폭행을 기도하는 장면이나 채이도(김명민)를 쏴죽인 장면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김광일을 설명하기 위해 북한이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 조태오 : 영화 <베테랑>에 유아인이 연기한 인물. 재벌 2세로 갑질과 악행을 일삼으나, 돈과 권력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간다.

  하나 중반 이후 전개 과정을 보면 북한이라는 특수성이 제대로 작동한다. 백미는 예상치 못했던 전개가 북한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V.I.P.>의 플롯은 <신세계>와 닮았다. 인물이나 설정에는 클리셰가 존재하나, 이를 엮는 짜임새가 훌륭하다. 특히 관객이 예상할 수 없는 의외의 전개가 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의외성은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언제라도 황당함으로 고꾸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황당함에 빠지지 않도록 의외성을 붙잡는 요소가 북한이다. 김정일 사후 혼란한 정치 지형이 플롯 전개에 영향을 미치며 의외성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최고의 장면은 김광일이 리대범(박휘순)에게 끌려가 북한 선박에 오르는 장면이다. 드디어 사이코패스가 법의 심판을 받겠구나. 사이다 한 사발 들이켜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광일이 밍크코트를 걸치고 권총을 손에 든 채 의기양양하게 등장한다. 재수 없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관객의 목구멍에 고구마를 탕탕 박아 넣더라. 이 황당한 전개를 받쳐주는 게 바로 장성택의 복권이었다. 예상치 못한 역 사이다에 당황하면서도 '재밌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밌다'. 이것이 박훈정의 장점이다. <V.I.P.>를 보며 장르물을 다루는 박훈정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르적 쾌감을 건드릴 줄 아는 감독이다. 물론 장르적 쾌감을 넘어 작가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갖는 작품이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박훈정이 민족의식을 내세우려다가 되도 않는 전래동화에 그치고 말았던 <대호>를 생각하면, 작가의식을 버리고 장르적 쾌감에 집중한 <V.I.P.>가 훨씬 좋았다. 이야기꾼 박훈정의 클라스가 드러난 작품이었다.





  마치며...

  <V.I.P.>도 <신세계>와 같다. 판타지다. 북한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개연성을 제공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완성했지만, 현실은 없었다. <V.I.P.>의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과거 어느 왕정 시대로 옮겨 놓아도 무방할 것이다. 북한도 김씨 왕조인데? (조선 시대에도 권력의 비호를 받는 망나니는 있었다. 이순몽이라든가, 서달이라든가. 심지어 둘 다 세종대왕님 시절이었다...)

  리얼리즘은 영화의 본질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픽션의 본질일 수도 있다. 픽션은 아무리 환상적이고 기발한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그 속에 현실 인간의 고뇌를 담아야 한다. 보는 사람이 고민하고, 돌아보고,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좋은 작품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신세계>보다 <범죄와의 전쟁>을 높게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V.I.P.>도 고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재밌는 이야기가 선사하는 쾌감은 인정해야 한다. 의외성이 풍부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개연성을 제공한 측면은 <곡성>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곡성>은 의외성을 위해 교차편집으로 사기를 쳐서...) 작가의식이라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장르적 쾌감에 집중한 박훈정은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보러왔다.'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한다면 <V.I.P.>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잔인한 걸 편안하게 보라고??





※ SF에도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가 있지만, <엣지 오브 투모로우> 같은 작품도 있으니까요. 재미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 그나마 <신세계>는 이자성(이정재)과 정청(황정민)의 브로맨스 덕에 여성 관객에게도 어필할 요소가 있었지만, <V.I.P.>는 그런 거 없습니다. 피처럼 찐득한 상남자 누아르랄까요. 여성 관객을 잡지 못하니 아마 흥행은 어려울 듯합니다.





(이하의 내용에는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V.I.P.>와 관련하여 페미니즘 이슈가 돌더군요. 일부 관객은 여성을 성적 폭력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몰지각한 작품이라 말하더군요. 하지만 피해자가 여성이라고 여성 혐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성범죄의 대상이 대부분 여성인 것이 현실이니까요. 물론 영화에서 범행 묘사가 불필요하게 과한 점은 동의합니다만, 그 이유가 여성 혐오 때문은 아닙니다. 맥락상 불필요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죠.

여성 피해자가 등장하거나 그 방식이 잔인하다 하여 여성 혐오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일례로 여성 피해자가 등장하고 그 서사가 매우 끔찍하지만, 여성 혐오가 아니라 훌륭한 페미니즘 작품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강철의 연금술사>입니다. 이 작품은 소년물입니다만, 초반부터 끔찍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쇼우 터커는 국가 연금술사 자격을 얻기 위해 아내와 딸을 키메라로 만들죠. 인간 이하의 패륜 범죄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에피소드였죠. 그 대상은 아내와 딸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묘사의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작품에서도 여성을 피해자로 두는 것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강철의 연금술사>가 페미니즘 비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작품 전반에 걸쳐 능력 있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윈리 록벨은 뛰어난 엔지니어이고, 리자 호크아이는 사격의 명수이며, 이즈미 커티스는 곰도 때려잡는 초인 연금술사이고, 올리비에 암스트롱은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으로 나오죠. 이 작품의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소년 만화에서 이처럼 다채롭고 능동적인 여성 인물을 보기는 쉽지 않죠. 덕분에 <강철의 연금술사>는 여성 독자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페미니즘 비평으로 <V.I.P.>를 평가한다면 피해자가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비판해야 합니다. 바로 능동적인 여성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죠. 채이도(김명민)의 경우 여성이 맡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골초+욕쟁이+폭력경찰), 박재혁(장동건)이나 폴(피터 스토매어)의 경우에는 여성이 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범죄물에서 여성이 활약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013년에 개봉한 <감시자들>의 경우 주인공(한효주)은 여성이었고, 본부의 리더 이 실장(진경)도 여성이었습니다. 2007년 작 <세븐 데이즈>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물입니다. 두 작품 모두 흥행작이었죠.

혹시 감독이 여성은 범죄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면 이는 여성 혐오로 볼 수 있겠죠. 확실히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는 여성 비중이 작습니다. <신세계>의 바둑 선생(송지효) 정도가 그나마 주체적인 여성이었죠. 그래서 비판해야 한다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점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처럼 소모될 수밖에 없는 역할을 따질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역할의 여성이 부재하는 지점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죠.

실효성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종석이 그동안의 이미지와 다른 섬뜩한 악역을 맡아 연기력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만약 여자 배우가 박재혁(장동건) 역을 맡았으면 어땠을까요? 걸크러시 폭발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탄생했을 거라 자부합니다. 하지만 여성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죠. 그리고 이건 <V.I.P.>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 개봉한 <장산범>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염정아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간의 영화계 변화는 어떻게 체감하나. 활동을 활발히 하던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한국영화계. 특히 여배우로서 체감하는 지점이 다를 것 같다.

=그 차이를 남자배우들은 못 느낄 것 같다. 그들에겐 평생 차기작들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배우들은 그룹으로 나오지 않나. 한꺼번에. 그런 작품들이나 시도를 할 수 있는 걸 보면 부럽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배우들이. 여자 캐릭터를 하나도 끼워주지 않더라.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뭘 할 수 있는 영화가 거의 없다. 여배우들을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할 작품이 너무 없다는 거다. 나 역시 일단 들어오는 시나리오 편수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너무 좁아졌다. 나도 그렇고 배우들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도 많이 출현한다. 드라마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캐릭터 표현이 좋아서 가는 측면도 있지만, 영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는 것도 있다.

올해 9월 개봉하는 문소리 주연, 각본, 감독의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도 비슷한 이슈가 등장할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여성 캐릭터의 부재는 <V.I.P.>만의 문제가 아니라 충무로 전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능동적인 여성 인물의 부재를 비판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이 화두는 실질적으로 여성 배우 처우 개선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