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이번 방송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다루려고 했는데, 녹음실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하여 (열심히 떠들었는데 하나도 녹음이 안 되었다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계획했을 때에는 고려치 않았는데 바로 오늘(12월 4일)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재개봉한다고 해서 물때를 잘 맞춘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개봉도 하니 통속적인 리뷰 보다는 하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재개봉 기념 하울 집중탐구 시작하겠습니다.
여성 판타지의 극단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하울과 소피의 공중산책이다. 위기의 순간 하늘로 솟구치는 쾌감과 하늘을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여유로움, 그리고 무엇보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음악까지... 하울의 매력은 이 공중산책 한 신에 모두 녹아있다.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하늘을 나는 쾌감일까, 높은 곳에서 오는 두려움일까, 아니면 온전히 하울의 매력 때문일까? 이를 분간할 수는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그저 꿈결같은 황홀함에 빠지게 만들어주는, 그야말로 마법같은 장면임에 틀림없다. 하울은 이처럼 등장과 동시에 소피와 관객에게 자신의 매력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혹자는 이 장면이 여성에게 더 어필하는 이유가 하울이 공중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을 걷는 와중에 자신의 손을 잡고 지켜주는 그 모습이 좋다는 것이다. 결국 하울은 여성이 남성에게 바라는 욕망의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굉장히 마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성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 혹은 도움을 바라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낸다고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등 기존 작품을 통해 여성의 독립성을 꾸준히 견지해온 미야자키 하야오를 생각한다면 살짝 갸우뚱 하기도 하다. 하지만 하울의 공중산책은 많은 여성에게 마초가 아닌 낭만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마초와 낭만의 경계를 구분짓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면, 이러한 보호는 여성에게 낭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도움의 필요 여부와 그 방법에 대한 의사존중 없이 무대뽀로 지켜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답 없는 마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바라는 여성의 태도도 중요할 것이다. 그저 도와주기만을 바란다면 징징대는 된장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 기저에도 독립성이 있어야만 이상적인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이 장면 전, 후에 그려지는 소피의 독립적인 모습은 그런 면에서 매우 필수적이었다. 그녀가 독립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공중산책이 낭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청소를 참 열심히 하는데, 청소가 독립성과 자생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작품에서 여러모로 유용한 장치로 쓰인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수필 『자기만의 방』에서 마차에서 내리는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남성의 모습을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의 독립성을 강하게 어필했다는 점에서 얼핏 모순적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남과 여를 각각의 젠더로 구분하기보다 함께 조화를 이루며 영적으로 협동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녀에 따르면 마차에서 내리는 여성을 에스코트 하는 남성이나 소피의 손을 잡아주는 하울의 모습은, 신사다운 남성의 젠더를 강조하는 마초가 아니라, 서로가 함께 인간으로서 호응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중산책 신은 마초적이거나 여성향이라고 보기 보다는 인간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중산책은 여성향의 극단이라 칭할 정도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강하게 어필하는 장면이다. 혹 하울과 소피의 성별이 바뀐다면 남성향 장면이 될 수도 있을지 생각해 봤지만, 오히려 <라퓨타>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아주는 소년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뭐 굳이 젠더를 따지며 비평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이 장면은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한 여성향의 극단이다. 왜냐하면 공중산책은 아름다웠고, 하울은 멋있었으니깐.
▲ 하울에게 반한 것은 아니지만, 저도 이 장면에는 반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하울을 왜 좋아하는 거지?
공중산책의 황홀함을 지나간다면 이후에 나오는 하울의 모습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특히 지독한 외모지상주의를 보여주는 데.
“아름답지 않은 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어.”
라며 바라보는 소피와 나의 마음을 후벼 판다. 소피는 ‘난 예뻤던 적이 없다’며 울었고, 나는 ‘하루만 못생겨 봤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못생겼으니깐’하고 울었다. 그나마 순무 허수아비가 처량하게 비 맞으며 울고 있는 소피에게 우산을 씌워주지만... 결국 소피는 하울에게 가지 않는가? 아... 잘생기면 다인가 보다.
솔직히 극 전반에 걸쳐 하울과 소피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에 대해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울이 소피를 보호하는 장면이 종종 있지만 그 행동이 소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다른 목적에 딸려오는 기분이다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다소 직설적이고 촌스러운 대사를 뱉으며 사랑을 고백한다. 뭐랄까, 이런 모습을 보며 ‘하울도 나를 좋아하는 건가?’라고 생각한다면 노랑불을 초록불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러한 하울에 비해 확실하게 그린라이트를 날려주시는 분이 바로 순무 허수아비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소피와 친구들을 구해준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황야의 할머니의 차가운 한마디뿐이다.
“소피의 마음을 잘 알았겠지? (알았으면 어서 꺼져)”
나는 정말 강력하게 외치고 싶다. 왜 하울이요? 왜 순무 아니고 하울이요?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패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순무 허수아비만 안타까울 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은, 나는 처음 공중산책의 황홀함이 뒤로 갈수록 퇴색되어 가는데, 오히려 뒤로 갈수록 하울이 더 멋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하울의 나약하고 때론 징징대는 모습 때문에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그것도 하울이니깐 보호본능을 자극하겠지, 쓰랄형님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누가 지켜주겠는가. 아... 역시 잘생기면 다인가 보다.
솔직히 개인적인 남성의 시각으로는 왜 하울을 좋아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중산책은 아름다웠지만 그 하나로 하울의 다른 모든 모습들이 용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납득이 되는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 이상 고민하고자 하는 의욕도 꺾인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다. 왜 그들은 하울에 열광하는 것일까?
▲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순무 불쌍해.
마치며...
올해를 마지막으로 지브리는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후 판권 관리나 캐릭터 상품 개발은 할 터이니 스튜디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브리는 끝난 셈이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키워준 지브리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점은 참 아쉽다. 개봉 당시 <하울...>을 보며 희미해진 메시지와 비약하는 전개에 분개했었는데 다시 보니 이만한 작품도 없다는 기분이다.(하지만 전작들이 워낙 쟁쟁한 작품들이라...) 사실 공중산책 장면 하나만으로도 다시 볼 만한 가치가 있기도 했다. 지브리를 추억하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다시 찾는 것도 요즘 같이 밖으로 돌아다니기 추울 때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 팟캐스트 방송 [미련한 연애 시네마]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다뤘습니다. 영화이야기와 영화에서 딸려온 다양한 연애이야기를 다뤘습니다.
※ 팟캐스트 방송 [미련한 연애 시네마]에서는 청취자의 연애 상담이나, 영화에 대한 궁금한 점 등을 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혹시 방송을 들으시고 관심 있으신 분은 sillylovecinema@gmail.com으로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팟빵 주소 http://www.podbbang.com/ch/7783
앱스토어 주소 https://itunes.apple.com/kr/podcast/milyeonhan-yeon-ae-sinema/id890712343?m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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