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에게는 조금 미안하다. 왜냐하면 이 글은 <그래비티>를 다뤘지만 <인터스텔라> 덕분에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개봉 전 예상대로 <인터스텔라>는 화제의 영화가 되었으며,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누군가에겐 지리는 영상 가득한 은총 같은 영화이고, 누군가에겐 ‘엉터스텔라’1)이다. 영화의 장단이 분명한 만큼 빠는 이야기나, 까는 이야기나 어느 쪽의 이야기도 모두 흥미로웠으며 수긍이 갔다. 헌데 한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인터스텔라>는 SF 영화가 아니다.”
내가 본래 타인의 감상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타입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느끼는 바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깐. 하지만 누구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는 존재한다. <인터스텔라>에 있어서 그 지점은 이 영화가 SF 영화라는 점이다.
<인터스텔라>가 SF인지 아닌지 따져보니, 과거 <그래비티>를 두고 오고간 평론가들의 공방이 떠올랐다. 이현경(씨네 21)의 리뷰 「삶과 죽음의 무한도킹」에 대해 듀나가 「‘그래비티’ 우주에 중력 없는 게 상식이라고?」라는 리뷰를 쓰며 반박한 것이다. 영화 보는 취향에 있어 듀나를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 글에서 드러나는 SF에 대한 그의 애정에는 매우 공감했었다. 이 글은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래비티>의 SF적 가치를 편파적으로 조명해보는 SF빠의 응원 격문이다.
*「삶과 죽음의 무한도킹」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4814
*「‘그래비티’ 우주에 중력 없는 게 상식이라고?」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2875
SF와 우주 그리고 <그래비티>
SF 영화에서 우주란 어떤 의미인가. 최초의 SF 영화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1902) 이었다. 이 점을 상기할 때 우주는 다양한 유전자를 지닌 각양각색의 SF 작품들을 만들어낸 원시바다와 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왜 우주를 선택했을까? 호기심이란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문명이래 지금까지 인간은 땅과 바다를 정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대부분의 땅과 바다는 정복되었다. 이것을 인류의 성과라며 기뻐해야 할까? 알렉산더 대왕은 땅 끝까지 정복한 뒤 더 이상 차지할 땅이 없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렇다. 정복할 곳이 없다는 것은 비극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아직 모험의 공간이 남아있다. 하늘 위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땅과 바다를 정복한 인류는 오늘날에 이르러 우주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가 모험이 펼쳐지는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우주는 인간에게 모험이 펼쳐지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미지의 영역을 ‘과학의 힘’으로 개척한다는 점 또한 SF라는 장르명칭과 부합된다. SF의 명칭 번역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으나(공상과학소설, 과학소설, 과학적 창작물 등) 어떤 것이든 간과하지 않는 핵심이 있으니 바로 ‘과학’이다. 여기에서 스타워즈가 SF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같은 소모적인 자격논란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과학은 SF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점이다. SF라면 과학적 고찰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과학적인 고찰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SF 작품으로 인정받아야 한다.2) 우주는 그 곳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과학적 고찰이 필요한 공간이다. 심지어 로켓 발사가 영화의 전부였던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 같은 작품도 있다. 우주는 SF에 있어 과학과의 연계가 필수 불가결인, 정말 SF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반짝이는 별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곳이 아직까지 모험이 남아있는 미지의 공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더구나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고찰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렇기에 <달나라 여행>은 최초의 SF 영화가 되었고, 우주라는 배경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지는 모태가 되고 있다. <그래비티>는 그러한 우주를 실감나게 표현 하는 것에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SF팬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선물이 있을까? 단지 그것을 치밀하게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SF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바로 우주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그래비티>는 소년시절에나 품고 있었던 우주를 향한 두근거림을 나에게 다시 상기시켰다.
▲ 사실 우주는 그냥 아름답기도 하다...
우주서사시
SF 덕후, 우주빠 소년의 눈에 비친 <그래비티>는 마치 전설과 같았다. 우주 재난으로부터 생환하는 무용담만으로도 전설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놀라운 업적이란 느낌을 넘어 보다 각별히 전설적이라고 느껴진다. 이유는 감독(알폰소 쿠아론)이 종교적 이미지를 통하여 우주비행사들을 신화적 존재로 치환했기 때문이다.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이 신화에서 신이자 예언자이다. 그는 사고 이후 라이언을 이끌며 지구로 귀환하는 길을 안내한다. 심지어 우주 미아가 되는 상황에서조차 라이언에게 소유스를 타고 톈궁으로 가서 선저우를 타라는 로드맵을 하달한다. 그의 계획은 마치 라이언에게 내려진 예언이자 신탁과 같다. 따지고 보면 영화 내용 전체는 맷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맷은 배우의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조기 퇴장을 했음에도 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언자적 면모를 과시한다. (어쩌면 이러한 무게감을 준 것이야말로 배우의 이름값일지도...)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블록)는 이 신화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맷에게 신탁을 받고, 그것을 고난 끝에 이루어낸다. 맷과 라이언의 신화적 관계는 소유스의 연료가 떨어진 절체절명의 장면에서 죽었던 맷이 살아 돌아오며 극대화된다. 맷은 죽음을 넘어서는 기적을 통해 신격화되었으며, 다시 한 번 라이언에게 구원의 지혜를 전한다. 이는 결국 이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라이언의 환각으로 처리하였지만(아니라면 현실 감각의 끈을 놓아버리게 된다...), 나에게는 마치 아테네의 신탁을 받는 페르세우스를 연상시켰다.
많은 사람이 <그래비티>를 SF의 하위 장르인 ‘우주오페라(Space Opera)’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우주+드라마(Space+Soap Opera)’라는 어원과는 달리 현재는 통속적으로 우주공간에서의 모험을 다룬 우주 활극을 지칭한다. 그러나 <그래비티>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랙> 같은 전형적인 우주오페라와는 다른 작품이다. 충실한 우주의 재현은 과학적 개연성을 중요시하는 ‘하드 SF(Hard Science Fiction)’에 가깝다. 더불어 종교적이라 말할 정도로 다소 진지한 분위기 또한 우주오페라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언의 영웅성과 우주에 대한 낭만을 고양한다는 점에서 우주오페라의 감성이 녹아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주오페라보다는 신화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살려, <그래비티>를 우주서사시(Space Epic)라 부르고 싶다.
▲ 맷 코왈스키는 예언자의 지혜는 물론 구세주의 숭고함까지 갖췄다.
개인을 넘어 종으로서의 인간으로
<그래비티>가 한 개인이 겪는 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우주와 인간에 대한 서사시가 되려면 라이언에게 인류를 대표하는 사명이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진입한 뒤 보여주는 태아의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다. 태아는 첫 세포분열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생물 종의 진화과정을 자신의 형태로 재현한다. 따라서 태아의 이미지는 생명의 기원이자 또한 진화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스타차일드(StarChild)’와도 통하게 된다. 태아의 이미지를 거쳐 감으로써 라이언이 한 개인에서 종으로서의 인간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개구리도 이와 연결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개구리인가? 3D 기술을 뽐내고자 했다면 수초나 물고기, 특히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물고기가 훨씬 좋았을 텐데 왜 개구리가 튀어나왔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우주생활 때문에 다리 근육이 약해진 라이언이 기어가듯 육지로 상륙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원시 양서류가 처음 육지로 진출하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심지어 주변 풍경마저도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원시적인 느낌이다. 원시 양서류에게 중력이란 엄청난 압력이었으나 그들은 이를 극복하고 육지로 진출했다. 개인으로서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발걸음이겠지만, 인류에게는 우주의 고난을 헤치고 돌아온 영웅의 발걸음이었으며, 닐 암스트롱의 그 발걸음을 상기시켰다. 감독은 전작인 <칠드런 오브 맨>(2006)에서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재난을 그려냈다. <칠드런 오브 맨>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각이었다면, <그래비티>는 종으로서의 인간의 사명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나 내일로 진화하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 작품적으로 중요했던 장면이지만, 사실 다른 의미로도 이 영화의 핵심이었던 장면이다.
총평
<그래비티>를 개인의 귀환과 삶의 의미를 다룬 작품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우주라는 낭만적 영역을 죽음과 재난의 은유적 표현으로만 여기는, 극 전개와 인물에게만 함몰된 제한적인 시각이다. 우주를 그저 이쁘고 돈 많이 들어간 병풍으로 바라볼게 아니라, 우주란 어떤 의미이며, 그 속에서 라이언이 어떻게 우주와 대등한 존재로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비티>의 우주는 고전 서사시의 바다와 같다. 서사시의 주인공은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고 돌아와 인류의 영웅으로 성장한다. 바다라는 미지의 영역은 오늘에 이르러 우주로 치환되었다. <그래비티>는 그 미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라는 SF적 사명을 전해주는 우주서사시이다.
1) 이 표현은 구밀복검님의 리뷰글을 언급하고자 가져왔다.(http://www.pgr21.com/?b=8&n=54800) <인터스텔라>를 극찬하는 나와는 반대의 시각이지만, 그럼에도 재밌게 공감하며 보았다. 닥추글.
2) 나아가 과학적 개연성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SF는 논문이 아니라 창작물(Fiction)이다. 어느 정도의 비 과학적 표현이나 장치들은 눈감아 주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타 워즈>를 SF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함부로 결단내리기가 어렵다...
※ <그래비티>가 SF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부당하다면, <인터스텔라>가 SF가 아니라는 말도 같은 이유로 부당합니다. 이 글에서 <그래비티>를 SF 중심의 시각에서 풀어냈듯이 <인터스텔라>도 그렇게 바라볼 여지가 충분한, 아니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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