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리들리 스콧은 SF 감독이었다. 그것도 최고의 SF 감독. <에이리언>(한국어 표기가 이렇다. 흠...)과 <블레이드 러너>는 10대 시절 나를 환장하게 만들었던 영화들이다. 사실 <글레디에이터>까지만 해도 리들리 스콧의 사극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국내에서도 큰 흥행을 했던 영화임에도, 사실 리들리 스콧 작품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오히려 나의 시선을 끌었던 영화는 <킹덤 오브 헤븐>이다. 특히 나를 압도했던 것은 종반에 나오는 공성전이었다. 감히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의 헬름 협곡 전투를 능가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전투신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리들리 스콧의 사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후속작 <로빈 후드, 2010>에서 크게 실망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마저도 후속작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버리니 리들리 스콧에 대한 기대가 차게 식어버린 것이 현재의 심정이다. 그런 그가 다시 사극을 들고 왔다.(아니 프로메테우스2는 안 만들고 왜...) 심지어 소재는 이미 할리우드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모세 이야기다. <글레디에이터>가 <쿼바디스>나 <벤허>등의 고전 할리우드의 영광을 되살렸다며 칭송받았는데, 이제는 <십계>를 들고 나와 과거의 영광에 묻어가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킹덤 오브 헤븐>을 생각한다면 보러 갈 수 밖에... 그런 마음으로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이하 ‘엑소더스’)를 감상하고 왔다.
스케일과 디테일
<킹덤 오브 헤븐>은 몇 번이고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스케일에 놀라지만 볼수록 자잘한 곳에서 느껴지는 디테일에 탄복하게 된다. 이러한 장점은 <엑소더스>에서 더 진화한 모습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웅장한 스케일이다. <글래디에이터>부터 적극적으로 CG를 활용한 것이 이제는 장인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CG로 구현한 이집트의 전경은 기술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구현된 도시의 모습이 설득력 있다는 점에서 감탄이 나왔다.(문명 오프닝 볼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진짜 백미는 히타이트와의 전투신이다. CG를 통해 높은 곳에서 전장을 조망하는 구도를 구현하며 칼싸움을 넘어 전쟁을 하는 기분을 선사해준다. (물론 CG가 아니라 그냥 사람을 때려 박아서 그런 장면을 만들었던 <워터루> 같은 영화도 있지만...) <킹덤 오브 헤븐>의 공성전이 한정된 공간이었던 것에 반해 <엑소더스>의 전쟁은 필드전을 구현하며 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릴 적에 CG가 발달하면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전투를 구현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그 상상을 영화로 구현하고 있는 감독이 바로 리들리 스콧이다. 후반부에도 각종 재앙과 전차 부대 그리고 출애굽기의 백미인 홍해신 등 큰 스케일의 볼거리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스케일이 보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디테일은 다소 취향을 타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엑소더스>의 디테일은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든다. 의상 등의 각종 소품에서부터 염하는 법이나 결혼장면 등 생활양식까지 촘촘하게 구현하고 있다. 내가 역사에 조예가 없다보니 이게 고증을 잘 따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영화의 목표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 있는 만큼 만족할 만한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레질이나 베틀 짜는 모습 들은 ‘굳이 저렇게 까지 자세하게 보여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단순히 미장센으로의 활용을 넘어 시대의 모든 것을 구현하려는 듯한 장인정신은 영화를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 나에겐 스케일과 디테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갈등도 영광도 없다. 오직 서사만이 있을 뿐이다.
영상 면에서는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두 만족스럽게 구현했지만, 이야기는 어떨까? 가장 큰 문제는 모세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권인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다들 알 것이며,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TV에서 <십계>라던가 <이집트의 왕자>를 보았을 것이다. 물론 출애굽기가 구약성경의 적벽대전이라 할 정도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미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알려진 페이지를 또 다시 읽어준다면 지루하게 들릴 공산이 크다.
리들리 스콧은 이러한 문제를 정면승부로 돌파하고자 한다. 전개에 있어 특정부분을 강조하거나 편집의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출애굽기의 서사를 묵묵하게 이어갈 뿐이다. 람세스와의 갈등이라는 극적인 요소마저도 그 서사의 일부분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이러한 정공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대중성에 있어서는 마이너스 요소가 될 공산이 크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각색도 없이 다시 보여준다면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루함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겐 정공법이 오히려 잘 통하는 것 같다. 출애굽기를 몰랐던 여친은 영화 속 이야기가 너무나 재밌었다고 한다. 다른 지인도 여친이 무척이나 재밌었다고...(그러니 여친과 함께 <엑소더스>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흥행 면에서는 마이너스겠지만 이러한 정공법은 감독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에 유리한 면이 있다. 여러 부분에서 기존과 다른 해석이 녹아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십계>처럼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아서 좋았다.
▲ 사실 람세스가 좀 쩌리가 된 감이 있긴 하다.
리들리 스콧의 종교관 그리고 모세의 리더십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감독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킹덤 오브 헤븐>으로부터 이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감독의 종교관이 있다. 모세는 파라오가 예언을 받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훗날에는 계시를 따르는 존재가 된다. 각종 재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도 하지만 ‘아이고 의미 없다’라는 듯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처형시켜 버린다. <십계>처럼 바다를 쩌~억 가르지는 않지만, <엑소더스>의 홍해 건너기도 기적이라 부르기엔 손색없는 장면이다. 무신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신앙을 인정하지만 이성도 중요하다. 감독은 아무리 신이라도 아이들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이중적이면서도 또한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앙관에 대해선 <킹덤 오브 헤븐>의 마지막 대사가 오버랩 된다.
발리안 :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살라딘 : 아무것도 아니라네.
발리안 : 헐퀴~
살라딘 : 모든 것이기도 하지.
이러한 리들리 스콧의 종교관에 대해 적극 긍정할 수는 없지만, 나름 괜찮은 시각이 아닐까 한다.
또한 감독은 모세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엑소더스>가 말하는 진정한 리더십은 리더의 존재를 초월한다. 리더는 사라지지만 ‘십계’라는 법을 통해 리더십을 이어간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면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리더십으로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할 거라 말했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아이를 죽이는 것도 신인가? 신이라도 깔 것은 까야한다는 리들리 옹.
총평
<엑소더스>는 웅장한 스케일과 디테일한 미장센이 조화를 이루며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점만으로도 충분히 관람할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니 만큼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감독만의 재해석을 통해 비 기독교인이 즐기기에도 무리 없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을 좋아한다면 돈 값을 충분히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의 이야기를 전혀 몰랐다면 더 재밌게 관람 할 수 있을 작품이다.
한줄평
다 아는 이야기를 웅장한 스케일과 촘촘한 디테일로 재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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