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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리뷰] <서울역> - 적나라한 메시지, 무너진 이야기.

※ 이 글은 영화 <서울역>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울역>은 어떤 영화보다도 헬조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보편적 복지를 역설하면서, 정작 복지가 필요한, 노숙자를 외면하는 청년. 도움의 손길을 빨아먹는 양아치들.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공무원들. 살려달라는 아우성과 폭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공권력. 'Be the Reds'티를 입고 빨갱이를 욕하는 자칭 애국 보수. 주인공은 그 지옥도에서 돌아갈 집을 부르짖어 보지만, 돌아갈 곳은 없었다. 어쩌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지옥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헬조선을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능력도, 달아날 장소도 없지 않은가. 결국, 모델하우스처럼 잘 꾸며진 거짓 평화 속에서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우리의 현실인 셈이다.

  <서울역>은 연상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출구 없는 지하도를 걷는 듯한 답답함. 희망을 사치로 만드는 씁쓸한 결말. 무엇보다 비유와 상징을 통해 강력하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서울역>은 <부산행>과 다르다. 분명한 연상호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부산행>에서 무뎌진 비판의식이 아쉬웠던 사람이라면, <서울역>에서 날카롭다 못해 가시 돋친 혓바닥이 환상을 발라내고 치부를 드러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메시지를 지녔다고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역>은 여러 단점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떨어지는 작화 수준을 보여주고, 더빙은 코 먹는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도 이러한 단점들은, 이번까지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연상호는 <부산행>을 통해 이제서야 메이저 감독으로 거듭났고, <서울역>은 저예산 애니메이션이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연상호의 작품에서 쩌는 작화 실력과 낭랑한 더빙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연상호가 어떤 메시지를 어떤 이야기에 담아냈는지다.

  안타깝게도 <서울역>의 이야기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극 종반, 혜선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석규가 실은 포주였다는 반전이 드러난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석규는 딸도 아닌 혜선을 찾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서울역 주변을 뒤진 것인가? 혜선이 떼먹은 돈이 100억쯤 되면 모를까, 가출 소녀에게 받을 돈이 얼마나 된다고 생지옥을 마다치 않는단 말인가. 마치 <배트맨 v 슈퍼맨>에서 '느금마사'라는 대사 한 방에 로이스 레인과 렉스 루터의 캐릭터가 무너진 것처럼, <서울역>에서는 '울 아빠 아님' 한 방에 석규라는 캐릭터가 무너져버렸다. 물론 이를 위한 복선(혜선과 직접 통화하지 않는다. 살인에 거리낌이 없다)을 보여주긴 하지만, 혜선을 위한 석규의 고군분투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충격적 결말과 강렬한 메시지를 위해 이야기에 무리수를 둔 셈이다.

  좀비 떼와 차벽에 시민들이 갇혀 있는 상황도 문제가 있다. 이 상황은 많은 상징을 내포하며 극의 주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이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 납득이 가는 설명이 부족하다. 관람할 때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나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분명히 이야기의 디테일이 부족한 순간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를 가졌다 한들 이를 담아내는 이야기가 형편없으면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다. 개연성 없는 무리수와 디테일이 부족한 이야기는 과연 <서울역>이 픽션으로서 기본적인 완성도를 가졌는지 의심하게 한다.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메시지는 칼럼을 통해서 말할 수도 있다. 칼럼이 아니라 픽션에 담아내기로 했다면, 극으로서 최소한의 완성도를 보여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