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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설리> - America is Already Great.

※ 이 글은 영화 <설리 : 허드슨 강의 기적>(이하 "<설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설리>는 국뽕 영화인가?

2009년 1월 15일.
뉴욕에서 출발해 샬럿으로 향하던 US 에어웨이즈 1549편 에어버스 A320, N106US기가
버드 스트라이크로 인해 양쪽 엔진을 모두 잃었다.


  국뽕 영화를 아는가? 이들은 영웅주의 애국심에 기대어 흥행을 거둔다. 아무리 완성도가 형편없어도 관객 수 500만을 거뜬히 넘기더라. 조금이라도 영화로서 미덕을 갖추면 천만도 넘긴다. 좌우를 따지지 않고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명량>, <국제시장>, <암살>, <광해>, <변호인>, <국가대표>, <해적>, <디 워> 등 역대 흥행작의 절반가량이 국뽕을 품고 있다. 오오. 국뽕이여. 그대는 얼마나 강력한가. 요리로 치면 미원이요.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다. 흥행을 노린다면 국뽕은 현명한 선택이다. 내가 투자자라면 국뽕 팍팍 넣으라고 닦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론가로서, 나는 국뽕을 싫어한다. 국뽕이 과하면 작품을 망친다. 나름의 매력을 갖춘 작품이 국뽕 때문에 엉성해지기가 부지기수다. <명량>, <국제시장>, <해적> 등이 그랬다. 보잘것없는 실력을 국뽕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디 워>,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 등이 그러하다.

  이 작품들을 국뽕 영화라는 이유로 졸작이라 단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국뽕에 감동하는 사람도 있다. <디 워>의 애국가에 눈물 흘리는 사람. <인천상륙작전>을 보며 호국영령에 감사하는 사람. <명량>의 노잡이에 감정 이입하는 사람. 심지어 평론가 중에서도 <해적>의 국뽕 장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있었다. (평론가 황진미는 "백성과 국가의 길항적 관계까지 품은 유쾌한 액션 코미디"라는 한 줄 평으로 <해적>에 별점 7/10을 주었다.) 이들을 국뽕에 취한 우매한 대중으로 폄훼할 수 있는가? 그 어떤 평론가에게도 그러한 권위는 없다. 평론가라면 국뽕에 감동하는 대중의 시선도 해석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국뽕 비판은 조심스럽다.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국뽕을 비판하거나, (<명량>, <해적> 등) 국뽕이 담고 있는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반공) 그저 국뽕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국뽕이라도 잘만 쓴다면 칭찬해야 마땅하다.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의 일갈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에는 노무현이라는 영웅이 있다. 영웅은 민주주의라는 국가 이념을 수호한다. 이는 국민이 곧 국가라는 영화의 주제로 연결된다. 잘 짜여진 국뽕이다. 여기에 송강호의 열연이 더해지며 국민으로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장면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설리>는 어떠한가? <설리>에는 영웅이 있다. 기장 체슬리 버넷 셀런버거 3세(이하 "설리")는 영웅 칭호에 어울리는 판단력과 책임감을 보여줬다. <설리>는 미국의 위대함도 설파한다. 미증유의 재난에 완벽하게 대처하는 미국의 견고함을 뽐낸다. 트럼프가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이라고 외쳤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America is Already Great. (미국은 이미 위대하다.)"라고 외치고 있다. 영웅이 있고, 애국심을 외친다. 이거 완전 국뽕 영화가 아닌가. 그러나 설리는 노골적이지 않다. 침착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사건을 응시한다. 거장은 노련하게도 담담한 기조 속에 애국 만세의 외침을 기워 넣었다. 이토록 세련된 국뽕이라니!





2. 설리의 시선 - 영화는 어떻게 설리를 영웅으로 만드는가

동력을 잃은 비행기가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륙한 공항이나 주변 공항에 착륙하기에는 고도가 너무 낮았다.
설리 기장은 가장 가까운 허드슨 강에 비상 착수하기로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사고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양쪽 엔진 불능. 추락하는 기체. 긴박한 조종석. 그러나 느닷없이 쏟아진 재앙에도 보는 이의 염통은 오그라들지 않는다. 왜냐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깐. 자 이제 설리가 멋진 비행술로 허드슨 강 위에 기체를 사뿐히 올려놓으리라. 어? 어?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비행기는 맨해튼 빌딩 숲에 추락한다. 이어지는 검은 실루엣의 거친 숨소리. 그렇다. 비행기 추락 장면은 설리의 꿈이었다.


▲악몽을 꾼 설리


  이 장면은 두 가지 측면에서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하나는 예상을 뒤집었다는 점이다. <설리>는 실화다. 플롯을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관객은 결말을 예측한다. 영화가 예측 가능하면 관객은 안심한다. 관객이 안심하면 영화는 지루해진다. 물론 훈훈한 미담을 바라보며 싸구려 감상에 젖고 싶은 관객도 있으리라. 장담컨대 이들의 기대를 충족했다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수준의 작품이 나온다. (연평... 인천...) <설리>는 시작부터 관객의 예상을 배신한다. 거장은 실화를 다루면서도 관객에게 예측을 윤허하지 않았다. 집중을 강제한다. 그러나 꿈으로 집중력을 환기시키는 수법은 딱히 기발하지 않다.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하게 쓰는 수법이다. 시작의 배신이 단지 관객을 집중시키는 목적이었다면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다.

  그러나 이 장면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 당장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중에 피어날 생각의 씨앗이 숨어있다. 비행기 추락은 설리의 악몽이다. 악몽은 PTSD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도 설리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환각을 본다. 환각도 PTSD 증상 중 하나다. 미디어에서 미담으로 다뤄진 사건이라도, 당사자에게는 끔찍한 경험일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155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성공한 적 없는 도박수를 선택한 기장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영화는 설리가 느꼈을 충격과 공포를 PTSD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울거나, 술을 마시는 노골적인 묘사에 비하면 상당히 세련된 연출이다. 설리의 책임감 있는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작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통해 PTSD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설리>에 적절히 활용했다.


▲설리의 환각


  왜 영화는 설리의 고통을 보여줄까? 고통 혹은 고난이 영웅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영웅이란 현실적인 제약이나 죽음처럼 인간의 의지를 짓누르는 한계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파멸의 운명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영웅에게 신성하고 거룩한 영광을 부여한다. 영웅은 고난에 처했을 때 가장 거룩하다. 고난이 영웅적 자질을 입증하기 때문이다.1) 헤라클래스의 12 과업이나,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대표적이다. 설리는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곧바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환각을 보여주며 설리의 겸손을 부정한다. 설리의 착륙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PTSD를 부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고통이 설리에게 신성하고 거룩한 영웅성을 부여한다.

  시작의 배신은 단순한 분위기 환기용 오프닝이 아니었다. 악몽을 꾼 설리의 시선에는 공포로 인한 고통이 서려 있다. 이 시선을 통해 영화는 우리의 머릿속에 생각의 씨앗을 심었다. 영웅이라는 꽃으로 피어날 씨앗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의 시작을 통해 "설리=영웅"이라는 공식을 관객에게 인셉션*했다. 거장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인셉션 : 꿈속에서 특정한 개념이나 생각을 주입하는 고도의 사고 조작. 동명의 영화 <인셉션>에 등장하는 공상 개념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라과디아, 테터보로 공항에 모두 무사 착륙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설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신이 옳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고난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설리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 묻는다. 공항에 착륙할 수 있었음에도 허드슨 강에 비상 착수하며 위험을 자초한 게 아닐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나? 설리는 영웅이 되고 싶었나? 그는 진짜 영웅인가 아니면 사기꾼인가?

  이번에도 영화는 미디어의 허상을 지적한다. 신문과 방송에 나오는 설리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다. 사람들은 설리만 바라본다. "설리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미디어는 시공간의 제약을 없애며 설리를 초인적인 영웅으로 만든다. 그러나 영웅은 대중의 관심이 버겁다. 집 주변에 바글거리는 기자들. 저질 농담이나 지껄이는 레터맨 쇼. 한 잔 술의 여유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관심. 과연 설리는 영웅이 되어 행복할까? 아니면 차라리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길 바랄 뿐일까? 미디어는 편린을 보여줄 뿐이다. 40년 경력을 208초 사이의 일로 평가한다. 그런 미디어에 비친 설리를 보며 "영웅이 되고 싶은 사기꾼"이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화는 단호하게 말한다. 설리는 사기꾼이 아니라고. 설리는 한 잔 술조차 공짜로 얻어먹지 않았다.

  영화는 세 번에 걸쳐 사건 당시를 재현한다. 세 번의 재현을 통해 설리는 사기꾼 혐의를 벗고 진짜 영웅으로 거듭난다. 첫 재현에서 관제사는 비행기가 비상 착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승객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린다. 설리의 도전이 실패를 장담할 정도로 위험천만했음을 암시한다. 첫 번째 조건. 영웅의 고난이다. 두 번째 재현에서는 설리가 끝까지 책임을 완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리는 기장답게 마지막 순서로 비행기에서 내린다. 155명 탑승자 전원의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어떠한 영광도 휴식도 거부한다. 심지어 유니폼도 쉽사리 벗지 못한다. 이것이 책임감이다. 영화는 비행기를 둘러보는 설리의 불안한 시선을 비추며 그를 억누르는 책임감의 무게를 전달한다. 두 번째 조건. 영웅의 자질이다.


▲마지막까지 비행기를 살피는 설리


  그리고 마지막 재현. 지금까지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설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설리는 음성기록을 듣기 전에 시뮬레이션을 볼 수 있도록 조치를 부탁한다. 공청회 당일. 설리는 시뮬레이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35초의 시간 지연을 얻어내어 자신에게 유리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끌어냈다. 그리고 드러난 음성기록. 재현된 기장과 부기장의 모습은 침착하고 정확했다. 설리를 몰아붙이던 조사위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끝내는 설리를 영웅으로 인정한다. 설리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을 스스로 구원했다. 영웅의 완성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이 과연 진실일까? 설리에 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드러난 사실 증거만으로도 설리는 존경할만하다. 그가 재난 앞에서 보여준 판단력, 침착함, 책임감은 충분히 영웅적이다. 그렇다면 설리 이외의 요소는 어떨까? 영화에서 반동 인물로 등장하는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 조사위원들의 태도는 과장되어 있다. 실제 공청회는 사고 후 1년 반이 지나 열렸다. 사고의 내막이 모두 밝혀진 뒤에 벌어져 조사는 간단히 진행되었다. 파일럿 시뮬레이션 결과도 영화와 다르다. 라과디아로 귀항하는 시뮬레이션은 4회 모두 성공하였으며, 35초의 딜레이를 적용한 1회 시뮬레이션만 실패했다. 그런데 이 35초의 딜레이를 제안한 것이 설리가 아니라 조사위원 측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적 성향을 고려하면 악의적 왜곡이라 의심할 만하다. 설리 기장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불공평하다."며 조사위원들을 가공인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영화 속 조사위원들은 전부 가공인물로 구성되었다.2)

  설리는 이미 사실 증거만으로도 영웅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굳이 극적 가공을 통해 신화적 영웅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극적 왜곡을 통해 긴장감과 예술성을 갖춘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과연 <설리>의 영웅 만들기는 무엇일까? 극적 재미를 위한 노장의 배려일까? 고전적 영웅을 재현한 거장의 예술혼일까? 아니면 보수 지지자의 악의적 왜곡일까?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논할 도리가 없다


US 에어웨이즈 1549편 불시착 사고는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기장 체슬리 버넷 설렌버거 3세는 국민 영웅이 되었다.
언론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에서 공동체주의를 보여줬다며 극찬했다.


  영화 속 미국은 위대하다. 전대미문의 재난 앞에서도 정해진 규정은 착착 돌아간다. 기장은 승객들을 구조하고 최후에 내린다. 민간 수송선은 기민한 반응으로 신고와 구조의무를 다한다. 관제탑은 사고 이후 담당자의 신병을 구속하고 성실 근무 여부를 철저히 감독한다. 구조 당국은 신속한 구조는 물론이고, 요구조자의 현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한다. 이것이 시스템이다. 이것이 국가다. 위대한 미국이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민첩한 구조작업도, 철두철미한 규정 준수도 아니었다.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앞에 두고도 일말의 잘못을 파헤치는 조사위원들의 모습에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그들은 영웅을 영웅으로 두지 않는가? 오랜만에 뉴욕에서 기분 좋은 비행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환호에 기꺼이 똥물을 뿌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나는 영화가 조사위원을 악의적으로 그렸다 생각지 않는다. 각각의 조사위원에게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일이겠지만, 조사위원회 전체 혹은 미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행동에는 위대한 미국의 정점이 담겨있다. 조사위원회는 영웅 띄워주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추구해야 할 것은 진실. 그들의 지조는 미국이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정의로운지 보여준다. 심지어 진실을 추구하다 오명까지 뒤집어쓰건만, 그 오명마저 달게 받아들인다. 진실 앞에서는 자신의 명예도 돌보지 않는다.


▲설리에게 존경을 표하는 조사위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위대한 미국. 그 앞에서 이성은 마비되고 감정만이 격하게 끓어오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토로뿐이다. 그들의 위대함을 바라보며 느끼는 부러움, 패배감, 좌절감 그리고 슬픔, 분노, 죄책감. 어째서 우리의 선장은 가장 먼저 배를 버렸는가? 어째서 우리의 보고체계는 그리도 엉망인가? 어째서 구조 당국은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나? 어째서 구조 실패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가? 어째서. 어째서 이 국가는 진실을 감추려 애쓰는가? 이게 나라냐?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나는 망국의 국민인 셈이다. 나라 잃은 국민에게 나라의 위대함을 논할 도리는 없다. 나는 위대한 미국을 논할 도리가 없다.





참조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571&cid=41799&categoryId=41800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2) https://namu.wiki/w/%EC%84%A4%EB%A6%AC:%20%ED%97%88%EB%93%9C%EC%8A%A8%EA%B0%95%EC%9D%98%20%EA%B8%B0%EC%A0%81?from=%EC%84%A4%EB%A6%AC%20%ED%97%88%EB%93%9C%EC%8A%A8%EA%B0%95%EC%9D%98%20%EA%B8%B0%EC%A0%81 (나무위키 -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