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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아가씨>는 반전 영화도 아니고 페미니즘 영화도 아니다.

※ 이 글은 영화 <아가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전의 사용법

  반전은 그저 시나리오의 전개 방식 중 하나임에도 '반전 영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르화 되었다. '반전 영화'에는 정형화된 쾌감이 존재한다. 바로 전복의 카타르시스다. 차근차근 쌓아온 이야기를 한 방에 무너뜨리고는 순식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세운다. 반전 영화는 이 한 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에 감정선을 집중시키며 관객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위해 노력한다. 반전 영화의 최고봉이라 여겨지는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러한 연출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 추락하는 머그잔이 산산조각 난다. 그동안 쌓아온 이야기가 무너지는 것을 훌륭하게 시각화한다. 이를 클로즈업하고 반복 재생하며 반전의 충격을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 반전 영화의 고전 <유주얼 서스펙트>의 반전 장면


  그렇다면 <아가씨>는 반전 영화일까? 분명 <아가씨>의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하지만 전말이 드러나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이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반전의 충격을 강조한 장면이 있다면 1장의 마지막을 꼽을 수 있겠다. 배신에 절규하는 숙희와 이를 바라보는 히데코의 냉소가 어우러지며 충격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는 반전의 완성이 아니다. 전말이 없기 때문이다. 전복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2장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미스터리의 전개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1장의 마지막에 피어난 미스터리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 친절함에 전말이 드러날수록 반전의 충격이 사라진다. 반전을 강조하기 위한 어떠한 연출도 없다. 강조했던 것은 숙희와 히데코의 정사신이었다. 시점만 다를 뿐 똑같은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다.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는 연출이다. 되려 반전을 깎아 먹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무슨 반전 영화가 이런가? 그렇다. <아가씨>는 반전 영화가 아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에서 <아가씨>의 반전은 전개에 해당한다. 어떤 극작가가 비장의 카드를 전개에 집어넣겠는가. 게다가 전말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유주얼 서스펙트>였다면 머그잔이 떨어지는 데 1시간이 걸린 셈이다. <아가씨>의 반전은 소모적으로 사용됐을 뿐이다. 반전이 목적인 '반전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가씨>의 반전은 무엇을 위해 소모됐을까? <아가씨>가 반전을 사용하는 방식은 첫 장면을 통해 제시된다. 처량하게 비가 오는 처마 밑에서 가족들이 모두 나와 숙희를 배웅한다. 어쩔 수 없이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가는 숙희를 안타까워하며 끝단이는 "내가 가야 되는데. 내가 가야 되는데."라고 울먹인다. 그러나 처량하고 안타까웠던 배웅은 숙희의 나레이션을 통해 반전을 맞이한다. 불쌍한 소녀의 실체는 여우처럼 교활한 사기꾼이었다. 끝단이의 눈물은 애틋한 정이 아니라 표독한 물욕이었다. 자기 새끼에게만 젖을 물리는 이기심이었다. 이 작은 반전을 통해 감독은 영화가 반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영화는 반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단순하게 서사 순으로 사기꾼의 작당 모의 후에 배웅 장면을 넣었다면 끝단이를 포함한 숙희 일가의 물욕을 이처럼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1장과 2장에 걸쳐 벌어지는 반전을 바라보면 그 중심에는 히데코와 숙희의 로맨스가 자리 잡고 있다.

  1장은 히데코에게 빠져드는 숙희의 심정을 그려낸다. 그 이유는 다소 1차원 적이다. (원래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왜 날 사랑해?"라는 질문에 "그냥. 이유 없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로맨티시스트다) 아름다운 외모, 끌리는 냄새, 달콤한 성애... 영화는 히데코의 매력을 이처럼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라는 나레이션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 감성을 집대성한 장면이 바로 목욕신이다. 입속을 드나드는 골무를 통해 모성애와 야릇함이 뒤섞이며 오묘한 애정전선을 이룬다. 시각, 촉각, 청각, 미각에 이어 "아. 이 냄새였구나."라는 대사를 통해 후각까지 더하며 '사랑'이라는 공감각적 심상을 스크린에 구현했다. 오감이 넘치는 실로 '감각적인' 장면이었다.

▲ 히데코의 목욕신


  반전을 중심으로 본다면 2장은 해석장이다. 다른 시점이라 하더라도 굳이 같은 장면을 이리도 친절하고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 상세함 속에서 숙희의 매력이 드러난다. 끝단이가 정 많은 언니에서 표독스런 아낙으로 거듭나듯이, 숙희는 2장의 반전을 통해 교활한 여우에서, 순박한 강아지로 거듭난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의 관계가 역전되면서 히데코에게 연민을 느끼는 숙희의 감정이, 숙희에게 연민을 느끼는 히데코의 감정으로 데칼코마니처럼 전이된다. '숙희 강아지'가 도드라지는 장면은 정사신이다. 히데코의 옥문을 열심히 핥느라 침과 애액으로 뒤범벅된 얼굴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털이 한 올 묻어있었으면 더 위트 있지 않았을까?) 여기에 이어지는 "아무것도 모르신다면서 타고나셨나 봐요."라는 촌스러운 대사는 숙희를 강아지로 만드는 데 화룡점정을 찍는다. 숙희의 매력은 노골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에 관계의 역전을 통해 은유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반전으로 드러나는 숙희라는 인물의 간극을 곱씹는다면 숙희의 매력에 빠져드는 히데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백작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히데코가 묻자, "반드시 사랑하게 되실 거에요." 숙희가 대답한다. 이 말에 히데코는 숙희의 뺨을 때린다. 두 사람의 사랑이 위협받는 순간이다. 바로 이 장면이 <아가씨>의 위기인 셈이다. 이러한 구성에서 드러나듯이 <아가씨>의 주제는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다. 숙희에게서 진심을 느낄 수 없자 히데코는 자살을 결심하고, 숙희는 히데코를 말리기 위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아가씨. 죽지 마셔유." 숙희의 외침은 애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아가씨>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치정문제이다. 하지만 동성애와 반전을 도구 삼아 독특함을 더했다. 스토리로 정리된 전말은 뻔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플롯은 나름 흥미롭다.

  <아가씨>의 1, 2장에는 반전이 있지만, 반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반전을 도구 삼아 드러나는 히데코와 숙희의 로맨스다. 반전을 통한 쾌감과 긴장감을 느끼지 못해 아쉽겠지만, 그 반전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심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본다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아가씨>는 반전 영화가 아니다. 반전을 도구로 사용한 멜로 영화다.




  페미니즘? 헨타이즘!

  절정에 이르러 영화는 두 여성이 새롭게 거듭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히데코가 목을 매는 장면은 숙희의 애절한 사랑 고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목을 맸던 히데코가 숙희의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숙희는 히데코의 성장을 지배해온 이모부의 추악한 성욕을 목도하고는 분노에 휩싸인다. 장서를 찢고, 물감을 뿌려 훼손한다. 히데코를 성적 도구로 이용해온 이모부에게 숙희가 철퇴를 내린 셈이다. 서재를 엉망으로 만든 두 사람은 야반도주한다. 그러다 마주친 담벼락. 히데코는 담벼락을 넘지 못한다. 그러자 숙희가 가방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어 준다. 담벼락에 선 히데코는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과감히 아래로 뛰어내린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히데코의 대사처럼 숙희 덕분에 히데코는 억눌린 삶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주체적 인물로 거듭났다. 후에는 숙희를 이용하려 했던 백작에게 복수를 해주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여성주의적이다. 자신들을 이용했던 남성에게 복수하고, 서로의 사랑으로 삶을 개척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냥 여성주의 영화로 보기에는 의아한 부분이 있다.

  우선 결말이 아쉽다. 두 여성을 이용했던 두 남성이 함께 사이좋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죽음에 두 여성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면 복수는 스스로 해야 한다. 타란티노 영화마냥 두 여자가 칼 들고 찾아가서 다 도륙 내버리면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두 여성의 계획에 따라 두 남성이 죽임을 당했어야 했다. 이를 위해 또 하나의 반전이 나왔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백작의 자지를 지키며 마무리된다. 깔끔한 점은 좋았으나, 허전하고 의미 없는 결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저 아쉬운 정도이다.

  여성주의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정사신이다. <아가씨>의 정사신은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남성향의 정사신이다. 야동에서 숱하게 보아온 모습이다. (나도 야동을 보긴 하지만;;;) 야동은 인간을 성의 도구로 격하하는 영상물이다. 히데코는 성적으로 도구화된 삶을 살았다. 낭독회를 통해 목소리 창녀로 살아온 존재다. 영화는 그런 히데코를 야동의 주인공으로 만들며 또다시 성적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정사신에서는 은구슬을 사용한다. 이모부의 학대에 삶의 희망을 잃고, 끝내 자살까지 생각하던 히데코였다. 그런데 이모부의 도구를 자신의 쾌락에 사용한다? 은구슬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며 남성성을 조롱하는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글쎄. 내가 히데코라면 낭독회의 장면을 스스로 구현하는 짓은 더럽고 끔찍해서 생각조차 안 할 것 같다. 성 학대라는 소재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은구슬은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은구슬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은구슬은 나왔고, 다시 한 번 남성 취향의 정사신이 벌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를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본다. 맙소사. 그 순간 나는 낭독회에 찾아온 변태 손님이 되어있었다. 객석에서 히데코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면을 상상하던 변태들처럼, 나는 스크린을 통해 영상으로 구현된 낭독회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찬욱은 마지막 정사신을 통해 관객을 자신의 낭독회에 초대한 셈이다. 그 순간 여성주의 같은 고상한 철학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변태적 색욕뿐이다. <아가씨>는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 헨타이즘(hentaism) 영화였다.





  필력 좋은 야설

  <아가씨>는 볼만한 영화이지만, 남는 게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저 흥미롭고 예쁜 영화였다. 남는 게 있다면 박찬욱 감독의 성적 취향이랄까? 박찬욱은 관객을 자신의 낭독회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관객에게 전사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필력 좋은 야설을 본 기분이다. (그래. 그곳이 야설사이트였던 시절도 있었지. p2p 나온 뒤로는 안 들어갔지만...)

  마지막 정사신을 보며 해방감보다 에로티시즘에 주목했던 것은 내가 AV에 익숙할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이리라. 벗은 여자를 보며 머리나 가슴보다 자지가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이를 유도하는 장치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를 근거로 낭독회에 참여한 당혹함과 죄책감을 감독 탓으로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헨타이즘은 헨타이즘일 뿐 죄가 없다 말한다. 하지만 헨타이즘을 강제로 전사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헨타이즘은 유죄다.

  언제부터인가 박찬욱은 자신의 취향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관객은 물론이고, 평단과 제작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고 있다. 자기 멋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뭐 박찬욱쯤 되면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겠지... 거 참 부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