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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다시 광장으로

  불면증과의 친분은 올해로 7년째를 맞는다. 규칙적인 식습관, 꾸준한 운동, 열정을 쏟은 공부. 하루가 고단하면 불면증은 물러간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불면증은 불쑥 내 우뇌를 방문한다. 지난 밤에도 오랜만에 찾아온 불면증과 씨름해야 했다. 졸려라. 졸려라. 제발 졸려라. 아무리 애원해도 불면증 님은 우뇌 깊숙한 곳에 앉아서는 연거푸 잡생각을 들이키셨다. 불면증이 잡생각에 취해갈수록 내 정신은 말똥말똥해졌다. 새벽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야속하게도 창문 밖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그제서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불면증은 볼 장 다 봤다며 약 올리듯 사라져버렸다. 시계는 다섯 시 삼십 분을 가리켰다. 무거운 눈꺼풀이 무너지듯 닫혔다. 지금 자면 못 일어날 텐데. 딱 5분만 눈을 감아보자.
  "삐리리리리릭. 삐리리리리릭."
  잠깐 감았을 뿐인데 알람이 울렸다. 지금 시각은 오전 여덟 시. 이제는 우리가 일어나야 할 시간. 어서 씻고 출근해야 해. 삐리리리리릭. 알람이 시끄럽게 짖어대도록 놔두고 몸부터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차고, 두 발로 선 뒤에야 알람의 주둥이를 싸맸다. 누운 채로 껐다간 그대로 잠들었을 테니. 샤워하러 욕실 앞에 섰다. 옷을 벗자 찬 공기가 등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졸음으로 꽉 차있건만, 몸뚱이는 정직하게 찬 공기에 반응했다. 아랫도리가 기지개를 켜듯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이놈은 자기만의 뇌를 가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똘똘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렇게 피곤한데, 녀석은 눈치도 없이 혼자서 발기찬 아침을 맞이했다. 뜨거운 물을 끼얹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녀석도 흐물흐물 풀이 죽었다. 이내 두통이 몰려왔다. 수면 부족은 언제나 두통을 부른다. 불면증이 머릿속에 뭘 싸지르고 간 걸까?
  "아... 오늘 완전 망했네."
  탄식이 자동발사되었다. 사람이 두 시간만 자도 멀쩡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피로의 족쇄는 육신을 놓아주지 않는 법. 오늘은 공부고 자시고 포기다. 저녁 약속을 지키려면 조금이라도 컨디션을 회복해야 했다.

  고시원 총무를 맡고 나서 처음으로 이 직업에 감사했다. 고시원 총무는 별로 할 일이 없다. 대충 청소를 끝내고 사무실 책상에 엎어졌다. 오늘은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으면. 방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으면. 사장님 심부름도 없었으면. 이대로 고요히 지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우당탕 쿵쾅. 사무실 옆 주방이 요란하다. 다들 밥은 먹고 다녀야겠지. 잠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자는 흉내를 냈다. 물론 피로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두어 시간쯤 골골대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책꽂이에 공부할 책들이 빼곡하다. 교재를 펼치면 내 두개골도 펼쳐질 것 같았다. 오늘은 공부고 나발이고 포기하지 않았던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이런 날에는 가벼운 우화가 좋겠지. 하지만 비스코비츠는 그다지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서구의 위트는 어딘가 베베 꼬여있다. 폭소보다 비꼼이 많다.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참다 참다 아스피린 두 알을 먹었다.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그녀가 도착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마무리할게. 나는 각 층의 쓰레기를 수거하며 대충 시설을 점검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외투를 걸쳤다.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니었지만, 야간 총무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형. 나 오늘은 좀 일찍 가볼게. 갈 데가 있어서." (고시원 총무의 인수인계는 이게 전부다)
  고시원을 빠져나오자 두통이 조금 가신 듯했다. 역시 퇴근이 보약이다. 아스피린 덕분이겠지.
  "어디 아파?"
  "아파 보여?"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
  "방금 아스피린 먹어서 그런가 봐. 열이 있었나..."
  "열은 왜? 감기 걸렸어?"
  "아니. 잠을 못 잤거든. 두 시간 잤나?"
  "괜찮겠어?"
  "괜찮아."
  "피곤하면 다음에 가도 돼."
  그녀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자고 싶었다. 나 하나 빠진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가야 했다.
  "괜찮아."
  "정말로?"
  나는 다시 마음이 흔들릴까 봐 화제를 돌렸다.
  "밥은 먹었어?"
  "아니."
  "그럼 배 채우러 가자. 소리 지르려면 배가 든든해야 해."

  우리는 손을 잡고 라면집으로 갔다. 나는 차슈 라면. 그녀는 돈코츠 라면. 토치로 그슬린 차슈에서 은은하게 불향이 풍겼다. 나는 큼지막한 놈을 하나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맛있지? 응. 맛있어.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을 들이켰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내 그릇에는 국물만 남았다. 그녀의 그릇은 아직 한가득이었다.
  "내 것도 좀 먹을래?"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나는 밖으로 나와 찬 바람에 땀을 식혔다. 그래도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니 두통이 가셨다. 대신 배가 부르니 졸음이 찾아왔다. 역시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땀이 식자 한기가 뒷목을 끈적하게 핥아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가게로 들어갔다. 그녀의 그릇이 절반 정도 비어 있었다.
  "내 거 좀 먹어."
  "응. 알겠어."
  "아까는 안 먹는다더니?"
  "난 자기가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다 알거든."
  그녀가 풉풉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알아 그걸?"
  "안 알랴 주지."
  그녀는 내 그릇에 면과 고명을 옮겨주며 연신 웃어댔다.
  "너 그렇게 웃으면 면이 코로 나온다."
  "아. 그만 웃겨. 진짜 코로 나오겠어."
  그녀가 흠흠 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컴컴해졌다. 겨울이 다가왔다지만, 해가 이리 짧았던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물방울이 하나 얼굴에 떨어졌다. 그냥 어두운 게 아닌 모양이다.
  "비 오나 봐."
  "응. 나 방금 한 방울 맞았어."
  "가지 말까?"
  "아니야. 나 괜찮아. 밥 먹고 나니 쌩쌩해졌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비가 내린다. 이보다 좋은 핑계는 없을 텐데...
  "그래 비 오면 우비 입자."
  그녀가 나의 미련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살짝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몇 방울 떨어지고 말겠지 뭐."
  하지만 버스를 타자 빗줄기가 되려 굵어졌다.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아. 소나기일 거야."
  "오늘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역시 구라청... 저번 주는 꼭 시위 모이지 말라는 것처럼 비 온다고 난리 치더만, 한 방울도 안 왔잖아?"
  그 사이 버스가 서대문역에 다다랐다.
  "광화문 가실 분들은 여기서 내리세요. 오늘은 버스 우회합니다."
  기사님이 외치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다들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차창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역시 소나기였나 보다. 다행이다. 하늘도 우리 편인가 싶었다.

  우리는 서대문역에서 광화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여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여."
  "할 거 다 하겠다는 심보더만."
  "촛불 시위로는 부족한 걸까? 지금처럼 그냥 무시해버리면 아무 소용 없잖아."
  "폭력 시위를 해도 똑같아. 전혀 무섭지 않거든. 죽창이 무서운 건 조선 시대까지야. 그때는 죽창으로 원님이고, 지주고 찔러 죽일 수 있었으니깐. 지금 죽창 들고 덤벼봤자 물대포만 있어도 막을걸. 더 격렬하게 쇠파이프에 화염병 던지며 싸워도 결국 경찰력이 이겨. 설령 청와대 담장을 넘어봤자 대통령은 이미 헬기 타고 도망가면 그만이야.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지. 오늘날의 폭력 시위는 실질적 위협이 못 돼. 일종의 퍼포먼스일 뿐이야. 진짜로 위협하려면 총 들고, 탱크 몰고 와야지. 근데 이러면 시위가 아니라 쿠데타겠지?"
  "그래도 더 강한 의지를 보여줄 순 있잖아."
  "수만 명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과 백만 명이 결집하는 것 중에서 뭐가 더 강한 의지의 표현일까? 난 후자라고 생각해. 민주주의의 기본은 1인 1표니깐. 수만 명의 강성보다 백만 명의 결집이 더 의미가 있지."
  "그렇지만 백만 명이 모였어도 꿈쩍도 안 하는걸."
  "폭력 시위도 무시하면 그만이야. 여론을 생각하면 되레 손해지. 폭력을 썼다간 불법 시위로 매도당하고 여론은 악화될 테니깐. 시민들의 호응도 없을 테고.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곳이라면 내가 너랑 함께 왔을 리가 없잖아. 어떤 사람은 피를 봐야 여론을 모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이런 주장은 정말 비겁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피가 필요하면 자기가 가서 분신(焚身)이라도 하라지. 본인은 희생할 생각도 없으면서, 남의 희생을 바라는 건 진짜 비겁한 거지."
  "그런데 이렇게 계속 무시하면서 내년까지 가면 어떡해? 그냥 임기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해?"
  "대한민국의 권력은 대통령만 가진 게 아니니깐. 삼권분립이잖아. 국회와 법원에도 권력은 있어. 탄핵이라는 수단도 있지. 그러니깐 시위해야 해. 국민이 바라는 바를 계속 표출해야 해. 대통령은 다시 뽑힐 일 없으니깐 무시할 수 있어. 하지만 재선을 노려야 하는 국회의원이라면 절대 무시 못 할 거야. 이정현 같은 의원은 이번 사태로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봐도 돼. 순천 사람들이 이정현을 또 뽑아주겠어? 절대 어림없지. 그러니 시위가 의미 있는 거야. 대통령을 끌어내릴 권력과 수단을 가진 집단을 압박할 수 있으니깐."
  "그럼 계속 압박해야겠다. 이번 주에도 백만 명 나왔으면 좋겠어."
  "글쎄다. 오늘은 별로 안 나올 것 같아. 매주 나오는 건 솔직히 피곤한 일이야."
  "수능도 끝났는데 학생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오늘내일 논술 본다 그러더라고. 사장님 조카가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내일 논술 보러 간다고 고시원에서 하루 묵는다더라."
  "그러면 고3은 못 오겠네."
  "여고생들한테 이 오빠가 민주주의도 알려주고 그러면 좋을 텐데..."
  "이 사람 진짜 가끔 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어. 여고생이 그렇게 좋아?"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여고생이 아니라 교복이지."
  "응?"
  "교복을 입었으니깐 좋은 거지. 여고생 그 어린 애들이 뭐가 좋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교복이 좋은 거야. 누가 입는가는 상관없어."
  "그럼 내가 교복 입으면 되겠네?"
  "그럼 최고지. 자기 교복 있어?"
  "버렸지."
  "아아. 그 신성한 교복을..."
  "불순해. 불순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세종로 사거리에 도착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직 이순신 동상도 보이지 않건만, 내 앞에는 엄청난 인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는 사람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민주주의라니.
  "이걸 직접 보면 폭력 시위가 필요하다는 소리 절대 못 한다. 진짜."
  "응. 진짜로."
  "우리 차 벽 보러 갈까?"
  "올 때마다 차 벽 보러 가자 그런다?"
  "내가 그랬어?"
  "응. 매번 그랬어."
  "볼만 하잖아. 이명박근 십 년 아니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차 벽을 보겠어. 진짜 전무후무한 꼼수인걸."
  세종로를 따라 광화문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순신 장군 앞에 수십만의 촛불이 파도치고 있었다. 우리는 세종문화회관을 빙 돌아 광화문으로 갔다. 역시나 광화문 앞에는 차 벽이 세워졌다. 도대체 이런 흉물을 누가 생각해냈을까? 당장 때려 부숴도 시원찮을 벽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부당함의 상징이다. 아니. 어쩌면 두려움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선을 그어야 안심하는 법이다. 실제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건만, 진시황은 만 리에 걸쳐 장벽을 쌓았다. 백만 명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성냥개비처럼 무너질 차 벽이라도 이리 그어 놓아야 안심이 될 터였다. 그러나 벽은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지금 박근혜의 영향력은 차 벽 안쪽에 머물 뿐이다. 지지율 5%. 국민이 등 돌린 대통령. 물러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우리는 차 벽을 뒤로하고 광화문과 세종대왕상 사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다. 중앙 무대에서 MC 메타(힙합듀오 가리온 멤버)가 소리치고 있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사람들이 복창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국민이 주권자다."
  "국민이 주권자다."
  "주권자의 명령이다."
  "주권자의 명령이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
  나도 함께 소리쳤다. 차 벽도 이 외침을 막을 수 없으리라. 청와대 지붕이 함성에 흔들리리라. 힘껏 소리치니 피로마저 날아가 버린 듯했다.
  "나. 밤 되니깐 또 쌩쌩해지는 것 같은데?"
  "어휴. 그러다 또 잠 못 자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런데 여기 있으니깐 정신이 번쩍 든다. 힘이 나."
  "잘됐다. 아까는 진짜 안 좋아 보였거든. 지금은 괜찮네."
  가리온이 인사를 끝으로 무대를 내려갔다.
  "가리온이 누구야? 유명해?"
  "한국 힙합 1세대던가? 나도 힙합은 잘 몰라서. 그래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 전에 내가 보여줬던 <불한당가>도 가리온이 주축인 크루야."
  "오. 그럼 대단한 사람이잖아."
  "진짜 이런 게 힙합이지. 힙합 하는 애들은 맨날 화나 있으면서 이 시국에는 화를 안 내더라?"
  "크크크크. 에이 그래도 이렇게 나서는 게 그리 쉽나."
  "그 말이 맞아. 가리온이 대단한 거지."

  광화문 광장은 마치 콘서트장 같았다. 무대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가수의 공연과 연사들의 열변이 이어졌다. 입장권도, 펜스도 없는 광장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였다. 함께 소리치고, 노래 불렀다. (<하야가>가 따라부르기 좋더라) 전설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비견할 만한 광화문 촛불 축제였다. 솔직히 연설은 무슨 소리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구호를 외치면 다 같이 소리 높여 복창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이 외침에 함께하는 의의가 있을 터. 모든 말을 경청하고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외치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스크린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전인권이었다. 광화문 촛불 축제의 메인 이벤트였다. 그의 어눌한 연설은 뒷자리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이어진 노랫말은 똑똑히 들려왔다.
  "저 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역시 노래가 좋다.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는 더 좋다. 헤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나와 그녀와 우리는 함께 노래 불렀다. <상록수>에 이어 <걱정 말아요 그대>가 울려 퍼졌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노래가 한창일 때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 오늘 같은 날 <행진>이 나와야 하는데."
  노래를 마치고 전인권이 무언가 말했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전인권 특유의 외침만 들렸다.
  "에~~"
  나는 전인권을 흉내 내어 소리쳤다.
  "에~~"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그녀도 활짝 웃었다.

  그리고 노래가 이어졌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생각지도 못한 선곡이었다. 나는 애국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애국주의가 비뚤어지면 파시즘과 매카시즘이 나온다. 건국 반세기 동안 애국이라는 명분 속에 독재와 빨갱이 매도가 횡행했던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을 곱게 보지 않는다. 나에게 국가는 필요로 맺어진 계약 관계이다. 국가가 나를 지키고, 나는 국가를 지킨다. 그게 전부다. 나는 가족과 연인을 사랑할 뿐, 국가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내가 애국가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질 줄은 몰랐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서 듣기에는 우리의 가슴이 너무나 벅차게 뛰고 있었다. 애국이 무엇인가? 국가가 무엇인가? 누가 묻는다면 나는 광화문의 백만 촛불을 가리키겠다. 지금 여기 타오르는 의분(義憤)이 바로 애국이다. 의분을 태우는 국민이 바로 국가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가 끝나자 경쾌한 드럼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박자다.
  "그렇지. <행진>이 나와야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주변 사람들이 또 키득거렸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나는 신이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역시 떼창을 해야 흥이 난다.
  "행진. (앞으로) 행진. (청와대로) 행진. 하는 거야."
  "행진. (앞으로) 행진. (청와대로) 행진. 하는 거야."
  사람들이 센스 있게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신이나 목청이 터져라 노래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힘을 쏟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묵직하게 돌아왔다. 전인권은 앵콜곡을 불렀지만, 함께할 기력이 없었다. (심지어 외국곡이었다) 나는 지친 표정으로 그의 열창을 감상할 뿐이었다.
  "오늘은 이만 갈까?"
  "그럴까? 이제 진짜 힘이 없어."
  시위대는 청와대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몸 상태만 좋았어도 끝까지 갔을 텐데.
  "다음 주에도 또 나오자."
  "이거 또 나와야 하나..."
  "나와야지."
  "눈치껏 물러나면 안 나와도 될 텐데."
  "그럴 눈치가 있으면 사태가 여기까지 왔겠어?"
  "진짜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이렇게까지 하면 알아서 내려와야지."
  "조종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 될 거야."
  "크크크. 아. 또 나오기 귀찮다. 귀찮으니깐. 알아서 내려와라. 제발 좀 눈치껏 내려와 줘."
  나의 멍청한 절규가 시위대의 열기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시위대를 빠져나왔다. 피로를 업고 가느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두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분 좋은 피로만 남았다.

  그날 밤 나는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음 주에도 이 귀찮은 짓을 반복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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