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조금만 도와주면 금방 끝낼 수 있어."
나는 그녀의 부탁이 마냥 좋았다. 덕분에 그녀와 붙어있을 시간이 늘어나니 그저 싱글벙글했다. 말끔한 청바지에 잘 다린 셔츠를 입었다. 빨간 넥타이를 매려다가 '이건 좀 오바다.' 싶어 자제했다. 오늘은 어떤 향수가 좋을까 고민해본다. 아니 고민해 보는 척하고는 하나밖에 없는 향수를 칙칙 뿌렸다.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건 니 생각이고. 마이를 휙 돌려 멋들어지게 걸쳐 입고는 집 밖으로 나섰다.
학교 앞에 도착해 그녀에게 연락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나온단다. 멀뚱히 기다리고 있자니 비어있는 손이 허전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그녀가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를 두 잔 시켰다. 계산하는 도중에 통유리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피부가 더 뽀얗게 보였다. 카페를 나서자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반갑게 인사했다. 순간 드는 고민. 어느 손에 든 커피를 건네야 하지? 나는 오른손에 든 커피를 건넸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커피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비어있는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그때까지도 부탁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걱정이 앞섰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있어?"
"그럼 있지. 괜찮아. 내가 잘 말해놨어."
뭐라고 잘 말해놨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날 안심시키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지인을 만난다는 건 분명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머리를 만지고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아... 증말 못생겼다. 강의실로 걸어가는 복도에서 내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처음 보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에 나는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나는 문득 그녀를 의식하고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에 힘을 빼고 여유로움을 연기했다. 자신감이 없다면 허세라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교실로 들어서자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나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다들 자기 할 일에 집중했다. 모두 중간 과제로 바쁜 모양이다. 그제서야 그녀가 나를 부른 이유를 상기했다. 그녀의 작업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내가 만드는 건 이거야. 종이로 만드는 기차 모형. 혼자 하기는 좀 벅찰 것 같아서... 그런데 둘이 하면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아니다. 이 아가씨야. 이건 도저히 금방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교수님이 가족이나 친구가 도와줘도 된다고 허락하셨을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잘 생각했어. 이거 도저히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응. 중간고사 공부도 해야 하니깐 오늘 안에 반드시 끝내야 돼. 할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뱉지는 않았다. 그녀를 낙담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괜한 소리 하며 여유 부릴 시간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팔을 걷어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하게 입고 올 걸 그랬다. 빡빡한 바지와 셔츠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열쇠 여깄다. 마무리하면 경비실에 들러서 열쇠 반납하고. 경비 아저씨 안 계시면 순찰하시는 거니깐 출입부 작성하고 옆에 열쇠 놔두면 돼. 그럼 난 간다."
우리를 제외한 마지막 학생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이 몇 시더라? 시곗바늘 두 놈이 사이좋게 열 맞춰 서 있다. 잠시 후 큰놈이 좀이 쑤신 듯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하루가 지나버렸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우리 앞에서 차곡차곡 모습을 갖춰가는 모형 기차다.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나 더디다는 거... 슬슬 기력이 딸려 온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다."
그녀도 힘에 부친 모양이다.
"나 솔직히 이거 오늘 내로 못 끝낼 줄 알았어."
"진짜로?"
"딱 보는 순간 감이 왔지. '이건 오늘 끝낼 각이 아니구나. 그래 포기하면 편해...'하고..."
"진짜? 나도 솔직히 오늘 끝내자는 건 그냥 희망 사항이었어..."
내가 후 하고 한숨을 쉬자 그녀는 하아암 하품을 했다. 창밖에선 찌륵찌륵 귀뚜라미가 울고, 창 안에선 종이 자르는 소리, 풀 바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참선하듯 한참을 종이와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새벽 두 시. 모형 기차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손톱만 한 조각들이 아직도 한가득이다. 이것들을 전부 다 오리고, 접고, 붙일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눈 밑이 시꺼멓다. 핸드폰에 내 얼굴을 비쳐 본다. 온 얼굴이 시꺼멓다. 두 사람 다 피로에 절어 있었다. 문득 그녀에게 힘을 북돋워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래 불러 줄까?"
"노래?"
"응. 힘든 일을 할 때는 노동요를 불러야지."
"노동요 아는 거 있어?"
"아니. 그냥 아무거나 부르는 거지 뭐."
나는 노래방 레퍼토리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마왕도 되었다가, 대장도 되었다가, 간간이 팝송도 불러보았다. 그녀가 조금은 힘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노래를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 신청곡 받을게. 좋아하는 노래가 뭐야?"
"음... 난 성시경 노래가 좋아."
그노무 성시경. 이 시대 최고의 댄스가수 같으니라고. 내 음색은 성시경의 노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달곰한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락빠 인생 15년인 나에게 성시경이라니...
"아... 음... 나 성시경 노래는 잘 몰라."
"아... 아쉽다. 뭐 별수 없지."
그녀가 살짝 실망한 눈치다.
"음... 그럼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노래를 부르면 되지!"
"모? 애국가?"
"아니. 얘가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럼 뭔데?"
나는 잠시 눈을 감고는 첫 소절의 가사를 생각했다. 이상하게 잘 아는 노래는 중간부터 기억난다. 속으로 전주를 불러보고 나서야 첫 소절이 떠올랐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노래를 듣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그녀가 내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한다. 그 모습에 나도 흥이 올랐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 있다면."
노래를 마치자 그녀가 웃는다. 마치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이 웃음소리가 되어 새어 나왔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시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사랑이었다. 그 당시 나는 실패를 몰랐고 열심히 한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 준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귀려고 노력하지 말고, 나를 가꾸는 데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걸 몰랐다) 그래서 고민했고, 공부하고, 사색했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일까? 외모를 따져도 사랑일까? 조건을 따져도 사랑일까? 사랑도 변하는 걸까? 변하지 않아야 사랑일까? 덕분에 나름의 정답을 하나하나 찾아갔다. 그렇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거의 알아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날, 내 생각은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누군가 나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사람의 눈이 그토록 초롱초롱 빛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환희라는 말을 눈으로 목격한 기분이었다. 베토벤 9번 교향곡도 그 모습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단전부터 가슴 전체를 가득 채우는 그 충만한 감성을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그녀의 순수한 기쁨이 나에게 전해진 순간, 내 속에서 가늠할 수 없는 황홀함이 피어난 순간, 나는 확신했다.
아!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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