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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그 많은 '리뷰'들이 정말 '리뷰'일까?

※ 이 글은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독자를 갖게 되고, 불명확하게 쓰는 사람들은 평론가를 갖게 된다."

  영화 <곡성>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곡성>의 이야기는 불명확하다. 혹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곡성>은 떡밥을 씹고, 뜯고, 맛보는 재미를 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리뷰'가 쏟아졌다. 5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지만, 천만 관객 영화보다 많은 리뷰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불명확하게 쓰는 글은 평론가를 갖는다.

  그런데 그 많은 '리뷰'들이 정말 '리뷰'일까? 리뷰(review)는 비평(critique)보다는 깊이가 얕고, 즉각적인 감상 위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평(評)의 한 갈래다.1) 따라서 리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 작품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그 가치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작품의 좋은 점은 무엇인지, 나쁜 점은 무엇인지. 즉,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곡성>을 다룬 '리뷰' 중에는 <곡성>에 대한 판단을 담지 않은 것이 많았다. 대신에 줄거리에 관한 해석을 담았다. "무명의 정체는 무엇인가?", "외지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살굿의 대상은 누구인가?", "좀비의 정체는 무엇인가?"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 이를 리뷰라고 할 수 있을까? 평(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리뷰가 아니라 줄거리 해석, 떡밥 놀이, 숨은그림찾기라고 생각한다.2)

  물론 떡밥 놀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작품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다. 그러나 떡밥 놀이를 통해 <곡성>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럽다. 나는 <곡성>이 갖는 예술적 가치로 두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맥거핀과 장르 변주를 통해 클리셰와 장르 파괴를 넘나드는 현혹술이다. 다른 하나는 현혹술을 바탕으로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신의 공포다. 이러한 가치는 <곡성>이 갖는 모호함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모호함이 장르적 쾌감으로 다가왔고, 인물과 전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함이 불신의 공포를 낳았다. 그런데 리뷰라 쓰인 많은 글이 리뷰가 아닌 '줄거리 해석'이 되면서 <곡성>에서 모호함을 제거해버렸다. 명쾌한 해석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모호함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관객의 떡밥 놀이는 분명 작품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곡성>을 관람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 비난한다면 오만이고 똥부심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바로 감독 나홍진이다. 그는 관객과의 대화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을 설명했다. 등장 인물의 정체나 행동 나아가 상징에 관하여 정답을 알려주었다. 감독 스스로 모호함의 가치를 깎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해석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떡밥 놀이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대중은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기보다, 무엇이 맞냐 틀리냐에 주목하게 되었다.

  나홍진이 못 박아 버려 아쉬웠던 상징으로 3번 우는 닭이 있다. 나홍진은 이것이 예수를 3번 부인한 베드로를 상징한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내 생각은 달랐다. 3번 우는 닭은 우리 민담에서도 자주 나온다. 구미호나 도깨비에게 홀렸다가 닭이 3번 울 때까지 버텨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토속 신앙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와 찾아본 인터뷰는 베드로 이외의 다른 해석을 허락지 않았다.

  작품은 감독과 독자 사이의 소통이다. 그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창작이 태어난다. 텍스트는 살아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줄거리 해석은 제2 창작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양하고 그럴듯한 해석은 분명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곡성>은 수만 가지 "나만의 <곡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홍진의 발언은 해석에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는 선언을 했고, 관객은 맞냐 틀리냐를 따지게 되었다. 모호한 지점에 대해 자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물어보는 글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당당하게 자기 꼴리는 데로 해석하라고 말하고 싶다. 관객은 주체적으로 작품과 마주해야 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내 기분과 감성을 표현해야 한다. (여기에 적절한 근거가 더해지면 리뷰가 되고, 그를 통해 작품의 의미와 반향을 고찰하면 비평이 된다) 나홍진의 발언은 그 주체성을 억압했다. <곡성>의 과열된 떡밥 놀이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홍진이다.

  상반기 가장 뜨거운 한국영화로 떠오른 <곡성>. 그 열기가 조금 식어가는 지금, 우리가 물고 뜯고 맛보며 열광하는 동안 지나쳐버린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곡성>의 떡밥 논쟁을 보며 감상이 무엇인지, 비평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고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의 결론은 항상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나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작품과 온전히 소통하기 위해 관객은 주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막말로 작품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영화가 불친절하다 말해도 좋다. (같은 내용이라면 쉽게 쓸수록 좋은 글이다) 주관적인 감상에 적당한 핑계 근거만 더할 수 있다면 누구나 좋은 리뷰어가 될 수 있다. 눈치 보지 말고, 물어보지 말자. 내 감상은 내가 쓰는 거니깐.
  




1) 요즘에는 둘 사이에 별로 차이를 두지 않고 말한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리뷰는 독자 중심이고, 비평은 작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리뷰가 감상 위주라면, 비평은 분석 위주다. 리뷰는 전체적인 판단, 예를 들면 별점 같은 평가를 한다. 하지만 비평은 별점이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그 안에서 추구할만한 가치를 뽑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있으면 별점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사실 둘을 엄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엄밀할 때만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2) http://www.pgr21.com/?b=8&n=65170 이 글을 '리뷰'가 아니라 '줄거리 해석'이라고 한 점에서 글쓴이의 내공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