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비쌤 윤PD

<덩케르크> - 세 가지 시간, 하나의 승리

※ 이 글은 영화 <덩케르크>,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 시간의 예술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세상은 미술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진은 미술을 대체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의 발명은 미술을 해방시켰다. 화가는 현실을 완벽히 재현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되었다. 현실을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는 진실을 추구한다. 그렇게 미술은 여전히 예술로서 숨 쉬고 있다.



  사진은 태생부터 모방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왜냐하면, 사진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셔터가 열리면 그 순간에 피사체로부터 반사한 빛이 감광판에 새겨진다. 여기에는 어떠한 왜곡도 존재할 수 없다. 필터랑 포토샵 무시함? 사진에 형태를 새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전자기파(빛)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피사체를 재현하려는 욕망이 없다. 그래서 사진은 모방하지 않는다. 현실을 박제할 뿐이다.



  그렇기에 사진이 예술이 되는 것은 미술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절대 극적이지 않다. 픽션에는 명대사가 쏟아지겠지만, 법원 속기록을 읽으며 가슴 울리는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훌륭한 사진작가는 순간의 박제 속에 진실을 함께 새겨넣는다.

  이 사진에는 2차 세계대전을 이끈 처칠의 카리스마가 담겨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시는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를 놓지 않자 그의 입에서 시가를 뺏어냈다. 처칠은 화가 난 표정을 지었고, 카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사진에는 인간 처칠의 진실을 담을 수 있었다.


  이후 처칠이 웃으면서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했다. 그러나 직후에 찍힌 사진에는 처칠이 아니라 웬 대머리 영국 할배가 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사진은 순간 속에 진실을 담아낼 수 있고, 이는 사진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사진도 예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진은 순간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순간의 현실을 담을 순 있으나, 시간이 흐르며 다채롭게 변화하는 현실을 담아낼 수는 없다. 이를 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영화다.


  장미 사진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사진에는 장미가 뿜어내는 고혹적인 매력이 듬뿍 담겨있다.


  그런데 장미가 피어나는 활동사진을 보면 어떤가? 여기에는 고혹적인 매력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함께 느껴진다. 사진이나 조화(造花)로는 느낄 수 없는 살아있다는 감격. 이것은 활동사진으로만 느낄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시간을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 순간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시간을 담을 수 있지만, 시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현실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CCTV를 보며 감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간을 재단한다. 현실을 편집한다. 컷과 컷 사이에 의미를 넣는다. 나아가 시간을 되돌리고, 빠르게 느리게 템포까지 바꾼다. 현실의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지만, 영화의 시간은 절대로 그냥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극적이다. 예술이 된다.

▲ 스탠리 큐브릭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컷과 컷 사이에 수만 년의 세월을 함축했다.





  (영화는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을 2시간 내외의 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담아내야만 한다. 어느 모로 보나 영화는 시간의 예술인 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 시간의 마술사



  놀란의 영화에서 시간은 언제나 독특했다. 그의 충격적인 장편 데뷔작 <메멘토>는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흑백의 화면은 시간순, 컬러 화면은 역순. 그리고 영화는 이를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며 진행한다. 이 놀라운 진행을 통해 마지막 신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기억과 사실의 괴리와 존재에 대한 의문을 마주하게 된다. 시간을 뒤틀어 진리의 조각을 발견한 작품이다. <인셉션>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 깊은 꿈속으로 들어갈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각 꿈의 단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몽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시간을 왜곡하는 과학적 소재를 제시한다.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 근처에서 느려진 시간은 애처로운 부성애를 낳았다. 블랙홀 안에서 과거로 돌아간 시간은 극을 해결하는 결정적 수단이 된다. 이거 완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니냐? 블랙홀을 통과하여 마주한 미래는 희망찬 결말을 보여줬다. (이제 와 생각하기에 놀란이 블랙홀에 관심을 둔 이유는 바로 시간의 가변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덩케르크>에서도 시간은 독특하다. 영화는 세 가지 시간 축을 제시한다. 병사의 일주일. 선장의 하루. 파일럿의 한 시간. 세 가지 시간 축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며 교차되어 보여진다. 덕분에 사건의 선후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사건에 다양한 감성을 담아낸다. 떨고 있는 병사(킬리언 머피)의 행동은 처음에는 이기적인 민폐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른 시간 속에서 그가 겪었던 공포와 고통을 보고나면 분노보다 측은함이 앞선다. 끝내 "괜찮다."고 말하는 피터(톰 글린 카니)의 대사를 이해하도록 만든다.



  다른 시간 속 다른 입장은 반전과 서스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콜린스(잭 로던)의 비행기가 바다 위에 불시착한 뒤 파리어(톰 하디)는 콜린스가 무사하다는 수신호를 본다. 그러나 이는 무사하다는 신호가 아니라 탈출하지 못한 몸부림이었다. 그냥 지나쳤다면, 감흥없이 흘러갈 장면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간축에서 교차되어 보여졌기에 관객에게 안타까움과 긴장감을 유발한다.



  <덩케르크>의 배경이 되는 다이나모 철수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작전 중 하나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면 현장감 넘치는 영화의 스타일과 맞물려 그대로 다큐멘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란은 절제의 미덕과 시간의 연금술을 통해 <덩케르크>를 극적으로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 모두를 오로지 편집만으로 엮어냈다. 슬로우 모션도 빨리 감기도 없지만, 관객은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영화는 일주일의 날실과 하루의 씨실 위에 한 시간의 자수를 새겨넣었다. 이것은 오직 영화만이 표현 가능한 일이다. <덩케르크>를 보며 엄지를 척 들어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서로 다른 시간이 달려가는 곳



  어떤 사람은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재난 영화였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는 싸워서 무찔러야 할 적군도 없고, 충성을 바칠 조국도 없다. 덩케르크 해안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목적은 오직 생존과 귀환뿐이었다. 그러나 국가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전쟁은 재난과 별다를 바 없다. 전쟁은 권력자의 자기 과시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갈아 넣는 개 같은 일일 뿐이다. 놀란에게 있어 전쟁은 죽음을 뿌리는 재난에 불과했다. 영화 속 대사는 이러한 시각을 뚜렷이 드러낸다.

▲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만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는가?"


  (그런 면에서 "Home"을 "조국"이라 번역한 것이 불만이다. 국가를 강조할 생각이었다면 "Home"이 아니라 "Homeland"라고 하거나 명확하게 "England"라고 불렀겠지.)



  <덩케르크>에서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각각의 인물은 각자의 전쟁을 치를 뿐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단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바로 전쟁이라는 악마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살아남는 것이다. 결국, 40만 병사는 살아남았다. 그들은 패자가 아니라 승자였다. 독일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전쟁과 싸워 이긴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군은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덩케르크>는 전쟁을 미화하지 않았다. 영화는 살고자 하는 욕망을 변호했고, 전쟁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로했으며, 전쟁과 싸워 승리한 모두를 찬양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반전(反戰)영화다. 그렇기에 또한 전쟁 영화다. 모든 전쟁 영화는 반전 영화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