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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커뮤니티, 소통, 어그로 그리고 나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 무플이다. 누가 그랬던가?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무관심이 조회 수로 드러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기분이 울적한 것은 조회 수는 높은데 댓글은 없는 경우이다. 한 번 독자의 입장에서 상상해봤다. 왜 기껏 들어와 읽어놓고 아무 말도 달지 않았을까? 내 글이 뭐라 한마디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정답은 글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미의 재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게시물을 클릭한다. 들어와 한두 문단을 읽는다. 글이 재미없다.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다른 게시물을 찾는다.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엄정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정성이 들어간 글은 비교적 독자에게 외면받지 않는 편이지만, 때때로 정성을 쏟아 넣은 글조차 무관심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면 정말 울적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고, 고치고, 다시 읽고, 고쳤는데... 내 글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기분이 든다. 아니, 인정받지 못한 것이 맞다.

  나는 인정받고 싶다. 내 글이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저속한 것은 아닐까? 매문(賣文)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아닌가. 대개 인간적인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서 관심을 갈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심받는 것이 나빠진다면 그건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관심병은 방식이 병든 것이다. 좋은 것으로 관심받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인정받기를 바란다. 관심을 바란다. 그리고 무관심을 싫어한다. 무플을 싫어한다.

  무플의 무서움을 안다면, 반론의 고마움을 깨닫게 된다. 신랄한 비판이라도 달린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해야 마땅하다. 그런 댓글에서는 뭐라도 배워간다. 필답이 오가는 와중에 내 생각은 정돈되고, 독자를 자극하기 위한 설득의 지점은 명료해진다. 이 설득의 지점을 포착하는 데에 필요한 것 또한 인정이다. 너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서 '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밀당을 해야한다. 그 밀당의 끝에는 미묘하고 깊은 철학적 가치가 자리한다. 괜히 최고의 영화 글이 인터뷰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많은 철학서가 대화체로 쓰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물론 소통 과정이 마냥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의 탕약을 쥐어짜는 소통을 거쳐야 보약 같은 결론에 이르는 법이다.

  꼭 결론에 다다를 필요도 없다. 오늘날은 다원주의 사회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대립하는 시대가 아니다. 옳은 것과 옳은 것이 대립하는 시대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다. 총천연색 무지개 빛깔이다. 그 속에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론을 얻지 못한다고 소통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도 의견을 나누고 갑론을박이 오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차이가 분명해지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지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경계선을 알아야 양보와 협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반론을 환영한다. 댓글로 밀당하는 러블리한 사람이 좋다. 미묘한 차이를 파헤쳐 논쟁의 가르마를 찾아내는 사람이 좋다.





  그런데 이 밀당의 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깊이 있는 가치를 끌어낼 생각이 없다. 상대방과 의견이 갈리는 미묘한 지점을 찾아낼 생각도 없다. 오로지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 그리하여 상대를 이겨 먹고자 한다. 하이에나처럼 상대방의 흠집만 기다리다 말꼬리라도 잡았다 싶으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흠집이 안 보이면 도발을 시전하고 광분을 양분 삼아 치고 들어온다. 그러다가 수세에 몰리면 "사람들 수준" 운운하며 광역 도발을 질러놓는다. 나는 이런 사람을 '어그로'라 부른다.

  어그로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듣기 싫은 말이라고, 소수 의견이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어그로라 규정할 수 있을까? 작가 유시민은 듣기 싫은 소수 의견을 꿋꿋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자 많은 언론은 이를 칭찬하며 민족의 우수성을 부르짖었다. 유시민은 <민족은 축구를 하지 않는다>라는 칼럼을 통해 민족의 우수성과 월드컵 성적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항의가 빗발쳤다. "대한민국 국민 맞아?"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시민의 말이 맞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그 민족이 우수한 민족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가장 위대한 민족은 브라질이 되어버린다. 1998년에 우승했던 프랑스는 단일 민족도 아니었다. 심지어 에이스였던 지단은 알제리계 무슬림이다. 애당초 민족의 우열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듣기 싫은 말이지만, 소수 의견이지만, 주장을 굽히지도 않았지만, 유시민은 틀리지 않았다. 유시민은 어그로가 아니었다. (참조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그렇다면 어그로는 구분할 수 없는 걸까? 그나마 구분 가능한 어그로 유형이 있다. 유언비어, 흑색선전, 가짜 뉴스, 찌라시... 이런 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어그로의 훌륭한 무기였다. 5.18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며 블로그 찌라시를 들이밀던 후배.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던 국회의원. 명백하게 죄가 드러났음에도 아니라고 발뺌하는 읍읍읍... 거짓, 왜곡, 조작을 서슴지 않고, 이를 까발려도 굽힐 줄 모른다면, 이는 명백히 어그로라 할 수 있다. 어그로가 이런 비열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오로지 이겨 먹는 데 있기 때문이다. 거짓을 까발리지 않는다면 어그로의 논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단 지르고 본다. 거짓을 알아차리면 "아님 말고"를 시전하고, 거짓을 못 알아차리면 승리를 가져간다. 정말 치사한 족속이다. 나는 이들이 싫다. 어그로가 싫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어그로와 싸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한다. 하지만 나를 표현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표현으로 상대를, 독자를, 세상을 감화시켜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무플이다.) 내 생각만 옳다고 부르짖으면 세상을 감화시킬 수 없다.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미묘한 지점을 찾아내고, 이를 자극하여 끝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온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자기 논리에 침전할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는 당연한데, 왜 사람들은 모르는지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을 돌아본다. 내 주장은 과연 옳은가? 주장의 근거는 정말 사실인가? 나만 옳다는 아집에 빠지진 않았나? 나는 어그로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홀로 고고한 글을 쓰기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편안한 글을 추구한다. 사색할 때는 외로워도 괜찮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등대를 짓는 사람은 고독해도 상관없지만, 등대를 다루는 사람은 뱃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글쟁이가 되려면 독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밀당할 줄 알아야 한다. 어그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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